메디치와 <군주론>
1479년 12월 피렌체에서는 그 1년 전인 1478년 4월 두오모 대성당 안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을 단죄하는 마지막 처형식이 열렸습니다. '파치가의 음모'라 불리는 그 사건은 부활절 미사 도중 피렌체의 경쟁 가문인 파치가가 메디치가의 지배자들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로 메디치가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가 칼에 19번이나 찔려 죽었고, 역시나 암살 대상이었던 그의 형 로렌초는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칼을 피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로렌초는 파치가의 사람들과 그 수족들을 모두 잡아들여 복수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들 중엔 바다 건너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망간 범인도 있었습니다. 로렌초는 콘스탄티노플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협조공문을 보내 그를 피렌체로 압송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범죄인 인도조약을 발동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유럽에서 영향력이 컸던 메디치였습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은 그 스펙터클한 처형 장면을 구경하느라 모두 고개를 빼고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죄인을 가두던 바르젤로궁 외벽 창문 밖으로 밧줄에 목이 메어 덜커덕 떨어져 신체가 늘어지는 교수형을 구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수의 이름은 바론첼리로 그는 1453년 동로마제국이 무너지며 오스만제국으로 변한 콘스탄티노플에서 왔기에 복장이 특이했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에 섞여있던 어떤 화가는 빠르게 그 처형 장면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그림 속에 그 의상에 대한 설명까지 달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처형 장면을 구경한 또 다른 유명 인사가 있었는데 그때 그는 겨우 열 살에 불과한 어린이였습니다. 마키아벨리였습니다. 사형 집행자인 로렌초 메디치 포함 피렌체의 그 한 공간엔 역사적인 인물이 세 명이나 있던 것이었습니다. 어렸지만 그때 마키아벨리는 느꼈을 것입니다. 뜻에 반하는 자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반드시 제거하는 피렌체의 군주 로렌초 메디치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때부터 움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1801년 11월 조선의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그들이 함께 했던 귀양길의 마지막 밤을 그들의 본관인 나주의 한 주막에서 보내게 됩니다. 날이 밝으면 형 약전은 뱃길 따라 서쪽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땅길 따라 동쪽 강진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우애 좋은 이 형제는 볼 듯 볼 듯하다가 끝내 못 보고 서로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약전은 16년 귀양살이 후 섬에서 사망했고, 그리고 2년 후 귀향이 풀린 약용은 고향인 남양주 마현리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귀양지인 흑산과 강진에서 두 형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흑산도로 간 정약전은 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어류도감이자 해양생물백과인 <자산어보> 한 권을 남겼습니다. 어상 문순득의 오키나와, 필리핀 표류 생활을 저술한 <표해록>이란 책도 썼습니다만 그것은 대필한 책이었습니다. 보듯이 그는 본인의 학문을 내세우는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산어보>는 그가 거주한 흑산도 주민인 어부들에게 이로운 책입니다. 죄인을 따뜻하게 맞아준 그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 썼는지 모릅니다. 약전은 동생 약용과 선왕인 정조가 탄복할 정도로 내공을 갖춘 학자였습니다.
강진으로 간 정약용은 유생인 제자들을 양성하며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3종세트를 남겼습니다. 보듯이 제도, 법령, 행정, 형법, 민생, 경제, 토지, 조세 등 국가와 지자체 경영 전반에 대한 내용을 망라한 책입니다. 과연 대 실학자다운 저서입니다. 그런데 약용은 혹시 복권을 꿈꾸며 그의 건재함을 알리는 이런 책을 쓴 것은 아닐는지요? 누구든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바뀌면 세상은 바뀌니까요. 반면에 맏형 약전은 보듯이 그런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혹시 약전은 그와 막내인 약용이 배교를 선택한 가운데 둘째 동생인 약종이 그들 대신 순교를 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세상과 무관한 책을 쓴 것은 아닐른지요? 당시 그들의 정씨 집안은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상상입니다. 정약용은 18년 유배 후 18년을 더 살았습니다. 유배 중과 유배 후 복권 논의는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은 오로지 복권을 위해 쓴 책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세상의 군주 가이드북들 중 단연코 가장 유명한 책이고, 후대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를 비롯해 세상의 내로라하는 왕후장상들이 탐독한 책이지만 정작 이 책을 쓴 마키아벨리는 그가 원하는 복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 역사적인 책이라면 재상 자리에도 오를 만한데 그것은 고사하고 시골 면장 자리 하나 재취업을 못한 것입니다. 이유는 그가 그의 시대 군주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었니다.
로렌초 메디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위에 등장한 '파치가의 음모' 때의 그 로렌초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 로렌초였다면 <군주론>의 가치를 단박에 알아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자(Il Magnifico)라 불릴 정도로 메디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메디치였기 때문입니다. 피렌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혈혈단신으로 적진인 나폴리로 뛰어들 정도로 용맹한 군주였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완성했을 때의 로렌초는 그의 손자인 동명의 로렌초 메디치였습니다. 흔히 로렌초 2세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1516년 마키아벨리로부터 <군주론>을 헌상받은 그는 그 책보다 다른 사람이 헌상한 사냥개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가난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 천재들의 단골 출생지인 피렌체에 또 한 명의 계보가 다른 천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 이전인 1265년 태어난 단테 알레기에리처럼 말입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홈스쿨링과 피렌체의 저명 학자였던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의 조수로 생활하며 그의 인문학적인 역량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공직의 기회가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메디치의 도시 피렌체에 메디치가 부재했던 시기였습니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인 무능한 피에로가 피렌체를 망쳐놨기 때문입니다.
1492년 로렌초 메디치가 가족력이라 할 수 있는 통풍으로 43세의 나이로 죽고 그의 아들인 피에로 메디치가 집권했습니다. 불운한 피에로라 불린 그는 1494년 일어난 샤를 8세가 이끄는 프랑스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 한 번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메디치 가문을 쫓아냈습니다. 피렌체의 주인 메디치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탈리아반도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 패밀리는 18년 후인 1512년이 돼서야 다시 피렌체에 돌아오게 됩니다.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있던 기간은 바로 그 공백기 18년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부재했던 시기에 피렌체의 행정과 외교 실무를 도맡은 고위 관료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1494년 메디치가 추방되자 피렌체는 수도승 사보나롤라가 다스리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 메디치가 다스렸던 피렌체도 제도적으로는 공화국인 도시국가(City State)였습니다. 그때도 시뇨리아(Signoria)라 불리는 의회가 가동되었으니까요.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 아래서 도시를 대표하는 10인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렌체는 침략국인 프랑스의 괴뢰국가와도 같았습니다. 도시는 메디치 추방에 앞장선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엄격한 기독교 정책으로 수도원처럼 변해갔습니다. 르네상스의 자유도시가 엄숙하고 경건한 신정일치의 도시로 바뀐 것입니다. 사보나롤라는 한술 더 떠 교황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황인 스페인 출신인 알렉산데르 6세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1498년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행정 수반인 곤팔로니에레라는 직함을 가진 소데리니가 다스렸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번엔 그의 밑에서 서기장이란 직함으로 피렌체의 외교와 국방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인 소데리니의 우유부담함에 실망을 하였습니다. 너무 인간미가 있었나 봅니다. 결국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그의 고국인 스페인과 한 편이 되었을 때 정세 판단을 잘못하고 프랑스 편에 선 소데리니는 스페인 군이 피렌체 근처 도시인 프라토를 점령하자 황급히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 메디치는 위대한 자 로렌초 메디치의 둘째,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후계자였던 첫째 아들 피에로는 유랑 시 강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그 형을 대신에 피렌체의 지도자가 된 둘째 조반니 추기경은 이듬해인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서 드디어 첫 교황이 나온 것입니다. 그가 면죄부 판매로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레오 10세입니다. 그가 로마의 교황청으로 가자 셋째인 줄리아노가 피렌체를 다스렸는데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는 불행히도 1516년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는 물에 빠져 죽은 형 피에로의 아들인 장조카를 피렌체의 군주에 앉혔습니다. 그가 위에 나온 <군주론>을 헌정받은 로렌초 2세입니다. 본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그의 삼촌인 줄리아노에게 헌정하려 했는데 그가 일찍 죽어 대상이 로렌초 2세로 바뀐 것입니다.
피렌체를 수복한 메디치 가문은 마키아벨리를 즉각 해임했습니다. 재집권했으니 그간 반 메디치 편에 섰던 자를 숙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추방에 앞장선 수도승 사보나롤라 아래서 공직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숙청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두 팔을 뒤로 젖혀 밧줄로 공중에 매달린 상태에서 자유 낙하로 떨어트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는 스트라파도(Strappado)라는 고문을 받았습니다. 어깨가 탈구되는 가혹한 고문입니다. 그런 고문과 투옥 속에서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 마키아벨리는 1513년 레오 10세가 교황에 취임하며 사면되었습니다. 그리고 귀양 가듯이 쫓겨나 피렌체 외곽 시골의 움막집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군주론>의 타임이 온 것입니다.
두오모가 멀리 보이는 그 움막에서 마키아벨리는 명저 <군주론>을 썼습니다. 와신상담 복권을 위함이었습니다. 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그의 뛰어남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저술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현세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술한 책과 아티클로 정치권의 콜을 받고 공직에 나가는 인사들을 우린 종종 목도하니까요. 주로 정치적 색채를 띤 글로 인해서입니다.
움막에서 마키아벨리는 글 쓰는 루틴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오전엔 생계를 위해 막일을 하고 오후엔 주막에 가서 신분 낮은 사람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리곤 밤이 되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단 공직 기간에 입었던 깨끗한 관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성현들을 만나기 위한 일종의 의식 행위였습니다. 그리곤 문을 걸어 잠그곤 매일밤 4시간씩 <군주론>을 저술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구해줘서 읽었던 <로마사>의 저자 리비우스를 비롯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등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지혜를 책에다 담은 것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런 리추얼(Ritual) 하에서 탄생했습니다.
<군주론>을 저술하며 마키아벨리는 한 사람의 모델을 생각했습니다. 그가 피렌체 격동의 시기에 보고 만난 많은 인물들 중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한 군주를 생각하며 글을 쓴 것입니다. 체사레 보르자였습니다. 그는 교황인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로 아버지 빽으로 18세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그것을 팽개치고 정치가의 길로 접어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정복 사업을 벌여 라벤나를 비롯한 이탈리아 북동부를 그의 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마냐라 불리는 지역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군인으로서의 용맹성도 보이지만 도덕적으로 비겁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은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이런 모습을 군주가 가져야 될 덕목(Virtue)이라 생각하고 그를 이상적인 군주로 생각한 것입니다. 국가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서라면 군주는 도덕적인 희생을 감수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6세 교황이 1503년 죽자 그도 시름시름 앓다가 32세인 1507년 죽었습니다.
로렌초 2세 메디치가 <군주론>을 외면한 것은 반 메디치파를 위해 일한 마키아벨리를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공화주의자로 본 것입니다. 그렇게 명저 <군주론>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힐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유심히 본 다른 메디치가 있었습니다. 아니 책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저술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는 위의 '파치가의 음모' 때 암살당한 줄리아노 메디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줄리아노는 미혼이었는데 암살을 피한 로렌초 메디치는 동생의 사생아인 줄리오를 양자로 입양해 그의 아들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도 교황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친아들인 레오 10세 다다음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바로 그입니다. 이렇게 로렌초 메디치는 두 아들을 교황으로 키웠습니다. 보듯이 엄밀히 클레멘스 7세는 레오 10세의 사촌입니다.
클레멘스 7세는 추기경 시절에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사를 의뢰했습니다. 그 가문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복권에 실패했기에 백수였던 마키아벨리는 그 오더에 응해 5년(1520~1525)에 걸쳐 8권의 <피렌체사>를 완성했습니다. 로마시대 때부터 1492년 로렌초 메디치의 죽음 때까지를 다룬 책입니다. 도시를 다스린 메디치 가문의 악행도 나와야 했기에 그런 부분들은 비유와 은유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마키아벨리의 복권에 또 장애가 되었습니다. 1527년 정세 판단을 잘못한 클레멘스 7세 때문에 로마 대약탈사건(Sacco di Roma)이 일어났습니다. 9개월간 성 베드로의 땅 로마가 군홧발에 초토화된 사건입니다. 교황과 힘겨루기를 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 의해 일어난 참사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교황이 쫓기듯 도망가자 피렌체 시민들은 또 한 번 메디치 가문을 도시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다시 한번 복권을 희망하여 공직에 응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을 위해 <피렌체사>를 썼기에 그의 복권의 꿈은 또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병사했습니다. 1527년 58세의 나이였습니다.
<군주론>은 1530년 다시 로마로 돌아온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인쇄가 허용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을 위해 <피렌체사>를 집필하고, 뛰어난 사상가인 마키아벨리의 학문적 역량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532년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1559년 교황 바오로 4세는 그 책을 금서로 묶었습니다. 도덕심을 부정한 악마적인 책으로 보고 출간과 독서를 막은 것입니다. 하지만 고삐 풀린 <군주론>은 세상으로 자꾸자꾸 퍼져 나갔습니다. 세상은 넓고, 나라는 많으며, 군주가 되고픈 후보들은 더 많으니까요. 그렇게 마키아벨리의 재취업은 끝까지 불발되었지만 세상 모든 제왕, 정복자, 독재자, 지도자, 그리고 정치사상가의 교과서가 된 그의 <군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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