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피보다 진하다! 영국의 왕가

명예혁명과 하노버왕가

by 마하

일본 보수 우파의 산실인 자민당은 지난 2월 8일 치러진 총선(중의원 선거)에서 310석 과반을 차지하며 역대 최다로 압승을 했습니다. 자신감에 찬 당의 총재이자 일본의 여성 총리인 다카이치 사나에는 승리의 일성으로 헌법과 황실기본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녀가 추진하겠다는 황실기본법(皇室典範)의 개정 골자는 천황이 될 수 있는 황족의 자격을 확대하겠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남자 황족만이 천황이 될 수 있는데 그 후보군에 여자 황족도 포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여권의 문제가 아닌 황실에 남자를 찾기가 힘들어서입니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나루히토이고 차기로 그 자리를 승계할 후보군은 딱 3명에 불과합니다. 아들이 없는 그이기에 승계 서열 1위는 왕세제인 동생 후미히토, 2위는 2006년생인 동생의 아들 히사히토입니다. 3위는 90세인 천황의 숙부이니 그 순위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듯 현재 일본의 황실은 절대적으로 후계자인 왕자 부족입니다. 직계 아들이 없는 현 천황 다음은 방계로 가야 합니다. 왕자로 북적여야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일본의 황실이 안정되고 활기찰 텐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정을 책임지는 사나에 총리는 법 개정을 통해 나루히토 천황의 외동딸인 2001년생 아이코 공주까지 황위 서열 후보군에 포함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계인 그녀가 차기 천황 1순위가 될 것입니다. 적십자사에 근무하며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은 공주라서인지 이 개정안은 국민들의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민당 내에서도 강경파는 이러한 여자 천황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대신 폐족이 된 황족을 부활시키자고 합니다. 황족의 숫자를 늘려 천황 후보의 풀을 늘리자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엔 황족이라곤 17명에 불과한데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족인 화족을 없앨 때 방계의 황족도 대거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패망한 일본을 다스린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수장인 맥아더가 그렇게 했습니다.


일본 나루히토 천황의 유일한 직계인 아이코 공주 (출처, 연합뉴스)


기원전 660년부터 오늘날인 126대까지 내려온 일본 천황제에 여자 천황은 8명이 있었습니다. 남자 혈통이 부재할 때 과도기적으로 천황 자리에 앉았다가 자격 있는 후보자가 생기거나 성장하면 자리를 물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법으로 금지되어 여자 천황이 나올 수가 없는데 그 법을 고쳐 천황 자격을 주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별까지 확대하며 천황제를 존속시키려는 것은 오로지 그 집안만이 천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듯이 천황이든 왕이든 황제이든 그 피가 흐르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 피가 없는 사람은 제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나도, 그 이상으로 나라와 지구를 구해도 제왕이 될 수 없습니다. 대명천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선진국에서 이것은 모순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평등에 위배되니 최고법인 헌법에도 위배되니 말입니다. 그래도 입헌군주제라는 미명 하에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에선 혈통을 내세우며 왕가를 예우하고 있습니다. 국가 정체성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왕가의 나라 선봉에 영국이 있습니다.


영국은 일본과는 달리 여자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들보다 서열은 밀리지만 아들이 없으면 딸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 2세가 그랬고, 메리와 빅토리아 등 영국엔 여왕이 심심치 않게 출현했습니다. 이것은 중세 때 대부분의 유럽 왕정 국가들에서 채택한 살리카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살리카법은 프랑크왕국의 부족 중 하나인 살리족의 법입니다. 프랑스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그 부족이고 그가 최초로 프랑스를 통일하며 그 법을 성문화 시켰습니다. 토지 상속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해당되고 딸은 상속받지 못한다는 법을 왕위 승계에도 적용한 것입니다. 왕정에서 영토인 땅은 왕의 재산이었으니까요. 그 법을 온 유럽이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리카법의 원조 프랑스엔 여왕이 없는 것입니다. 왕가의 상징인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유일한 여왕인데 그녀가 즉위할 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그것이 부당하다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을 일으켰습니다. 계몽군주라 불린 그도 여자왕은 참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던 프랑스왕가는 아들이 없어 왕위가 끊어지면 방계의 우선순위 남자가 왕위를 이어 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실 모두 같은 피의 왕가였습니다. 카페왕가, 발루아왕가, 부르봉왕가로 심플하게 이어지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987년 위그 카페왕이 개창한 카페가문의 한 피입니다. 두 번째 왕가인 발루아는 악명 높은 필리프 4세가 아들이 없어 조카가 왕위를 이어가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그 꼴을 볼 수 없던 영국이 일으킨 백년전쟁이었습니다. 부르봉왕가도 마찬가지로 카타리나 메디치의 아들이 셋이나 왕좌를 못 지키고 후사도 없이 죽으며 그녀의 사위인 앙리 4세가 개창한 것입니다. 그렇듯 프랑스에서 딸은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모든 왕은 오늘날 윈저왕가까지 그 시조인 노르만왕가의 첫 왕 윌리엄 1세의 피를 수 천분의 1, 아니 수 조분의 1이라도 가지고 있는 왕족입니다. 영국엔 역사상 영국인 왕으로 유일하게 대왕 칭호를 갖고 있는 알프레드대왕이 있지만 왕가의 시작은 그가 아닙니다. 웨섹스왕국의 왕으로 잉글랜드 통일 대업을 이루긴 했지만 이후 바이킹인 데인족이 또 침략을 해와 가문이 바뀌고, 이후 왕족이 아닌 신하 헤럴드가 왕이 되기도 해 바다 건너 영국으로 건너와 그를 물리친 노르만공국의 정복왕 윌리엄 1세를 왕가의 시조로 보는 것입니다.


영국왕가의 시조인 노르만왕가의 윌리엄 1세 (1028~1087, 1066)


그 후 영국은 플랜테저넷, 튜더, 스튜어트, 하노버, 작센코부르그고타를 거쳐 윈저왕가로 이어졌습니다. 이름이 달라지는 것은 여왕의 경우 그 자녀는 남편의 성을 따르기에 여왕 자녀 때부터는 아버지 성이 왕가의 새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버진퀸으로 무자식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후 그다음 왕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스튜어트왕가의 시작입니다. 그의 아버지 성이 스튜어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튜어트 다음인 하노버왕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제임스 1세의 엄마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생존 시 숙명의 라이벌이었습니다. 역사상 동시대에 이렇게 국경을 마주한 두 여왕이 앙숙인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녀들은 9년간 양 국가의 여왕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기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전쟁과 다름없는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당이모뻘인 엘리자베스에 의해 참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적대국 여왕의 아들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공주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입니다. 메리 여왕의 조부이고 결국 잉글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6세의 증조부입니다. 이것은 왕가에선 그만큼 피가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원수의 자식을 입양해 나라를 물려준 꼴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엔 그 중요한 피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앉힌 시대가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혈통이 100인 명백한 남자가 있음에도 그 피보다 99배는 옅은 사람을 겨우 찾아내서 왕으로 앉힌 것입니다.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우리 조선의 철종보다 훨씬 더 심한 케이스입니다. 더구나 그 왕은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외국인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왕가에서 하노버왕가로 전환된 앤 여왕의 다음 왕인 조지 1세의 이야기입니다. 앤 여왕은 결혼은 했으나 왕위를 이을 성장한 자식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 명백한 순도 100%인 스튜어트가문의 남자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것은 종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카톨릭교도였고 영국 왕실이 찾는 왕은 개신교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작은 1688년 일어난 명예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명예혁명은 피 한 방울 안 흘린 것이 혁명의 본질이 아니라고 지난 1월에 출간한 <TAKEOUT 영국.GB.UK>에서 밝혔습니다. 그 40여년 전에 일어난 청교도혁명의 본질이 청교도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책에서 저는 명예혁명의 본질은 카톨릭과 개신교간에 일어난 영국의 종교전쟁이고, 청교도혁명의 본질은 의회파와 왕당파간에 일어난 영국의 내전이라고 썼습니다. 명예혁명은 개신교를 수호하려는 명분으로 네덜란드로 시집간 훗날의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인 오렌지가문의 윌리엄 3세가 의회와 합작해 카톨릭교도인 현직 제임스 2세를 몰아낸 사건이 본질입니다. 즉, 시집간 딸과 사위가 왕인 아버지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막장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의회는 그 사건을 부추겼습니다.


명예혁명으로 공동왕에 오른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부부 (1688)


고립무원이 된 아버지 제임스 2세는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런 사건에 명예를 붙이기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1534년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하고 그녀의 시녀인 앤불린과 결혼을 하기 위해 발동한 수장령 이후에도 개신교인 영국국교회가 150년 후까지도 완벽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예혁명이 성공하며 비로소 영국의 종교개혁은 완수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카톨릭에 대한 논란은 사라지고 영국은 완전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에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했습니다. 명예혁명으로 물러난 카톨릭교도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선왕인 찰스 2세나 제임스 2세 이후 더 이상 카톨릭을 선호하는 왕은 안 나왔지만 왕실 밖은 여전히 정리가 안 된 것입니다. 전직 왕인 제임스 2세가 살아있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카톨릭교도들은 제임스 2세를 재옹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자코바이트의 난(1688~1746)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때문에 희생이 되었습니다. 명예혁명 때엔 한 방울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데 그 후유증의 해결엔 많은 피가 들어간 것입니다. 자코바이트는 제임스 2세의 라틴어명인 제이콥, 야코보(Jacob)에서 유래합니다. 우린 성서의 영향으로 통상 야곱이라 부르는 이름입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공동왕이 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또한 후사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왕은 메리 2세의 여동생이 이어받았습니다. 튜더왕가의 헨리 8세의 두 딸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이어서 여왕이 되었듯이 스튜어트왕가의 제임스 2세의 두 딸인 메리 2세와 앤도 연이어 여왕이 된 것입니다. 이 앤 여왕 때 영국은 잉글랜드와 스코들랜드가 통합이 되어 비로소 완전한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707년 발효된 연합법에 의해 통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제임스 1세 때부터 104년간 1왕 2국가 동군연합 체제로 이어온 두 나라의 의회가 하나로 통합되고 연합국가의 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GB)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위치한 섬의 이름이 왕국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훌륭한 통합입니다. 그런데 통합 군주인 앤 여왕도 또 후사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덴마크의 왕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는 먼저 죽었고 그들 사이에 난 아들은 11세에 죽었습니다. 이제 영국 스튜어트왕가엔 왕실엔 그녀만 남게 되었습니다.


스튜어트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 (1665~1714, 1707)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왕궁 밖엔 혈통으로 보면 앤 여왕보다 더 막강하고 정통인 스튜어트왕가의 왕자가 살아있었습니다. 앤 여왕의 아버지로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입니다. 1714년 앤 여왕이 죽고 왕실에선 새로운 왕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준비 작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왕으로 모셔오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피의 정통성이 확실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인 제임스 2세와 같은 카톨릭교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국의 카톨릭교도들에겐 제임스 3세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자칭이든 타칭이든 제임스 3세는 앤 여왕으로 보면 이복동생입니다. 하지만 첩이 아니라 언니인 메리 2세와 앤 여왕을 낳은 첫 부인과 사별 후 정식으로 재혼한 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라 그는 태어나자마자 왕위 서열 1위였습니다. 당시 왕실의 개신교도 의회파는 그가 자라서 아버지를 이어 카톨릭왕국으로 회귀할까 싶어 확실한 개신교도였던 메리 2세와 명예혁명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듯이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매 여왕이 연이어 왕손을 남기지 못해 왕실에 스튜어트의 피가 한 방울도 안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정도면 스튜어트의 적통인 그를 왕으로 모셔오는 게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 엘리자베스 1세 사후엔 당시 적국인 스코틀랜드의 왕도 자국의 왕으로 모셔온 의회였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명예혁명을 촉발시킨 제임스 2세의 아들 3세가 카톨릭교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밖에서 자코바이트들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던 제임스 3세 역시 개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종교적인 신념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복누나인 앤 여왕 생존 시 그녀는 불안한 스튜어트왕가의 존속을 위해 제임스 3세에게 개종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왕이 될 수 있고 선조 때부터 이어온 스튜어트왕가를 지킬 수 있었음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왕에서 쫓겨나고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제임스 2세, 3세 부자


그레이트브리튼왕국이 된 영국은 이제 피의 순도는 뒤로 하고 스튜어트의 부계이든 모계이든 방계이든 종교가 개신교인 후보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피가 더 진한 인사를 우선적으로 리스트를 짰을 것입니다. 주로 공주 신분으로 외국으로 시집간 딸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의 종교가 카톨릭이었습니다. 개신교도를 찾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찾아내어 차기 왕으로 낙점된 인사가 하노버왕가를 연 조지 1세입니다. 스튜어트왕가를 연 제임스 1세 딸의 외손자로 하노버 선제후국의 그가 영국의 왕으로 픽업된 것입니다.


하노버가문의 조지 1세보다 스튜어트가문의 피가 더 진한 인사가 그 앞에 무려 50여명이 더 있었음에도 그들 모두는 탈락했습니다. 이유는 그들 모두가 카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조지 1세가 당첨이 된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스튜어트의 최적자가 살아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실제로 왕실에선 제임스 3세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인사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중요한 혈통도 종교라는 대의 앞에서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카톨릭 왕이 나와서 자코바이트의 카톨릭교도들이 득세하게 되면 개신교도인 현재 위정자들의 지위가 위태롭고, 명예혁명으로 아버지인 제임스 2세를 쫓아낸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이익 문제 때문에 제임스 2세는 비운의 왕, 그의 아들인 제임스 3세는 비운의 왕자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자코바이트의 난은 하노버왕가를 연 조지 1세 사후인 1746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권력과 어우러진 영국의 종교전쟁은 명예혁명이 일어난 1688년부터 이렇게나 길게 60년 가까이 이어진 것입니다. 마지막 지도자는 제임스 3세의 아들로 역시나 스튜어트왕가의 적통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였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왕위 복귀를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은 무산된 것입니다. 그 시기 영국은 하노버왕가의 두 번째 왕인 조지 2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대세를 거스르기엔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자코바이트의 난 마지막 대전인 컬로든 전투 (1746)


반대로 바다 건너 프랑스의 부르봉왕가를 연 앙리 4세는 왕위 앞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버렸습니다. 종교도 영국과는 반대로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이행되었습니다. 본래 그는 프랑스의 개신교인 위그노의 지도자였으나 카톨릭교도가 주류인 파리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자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1589년 왕으로 결정은 되었으나 대관식은 정식 개종 후인 1594년에 파리에 입성하여 치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가 개종을 뜻하는 파리 입성을 결정하며 "파리는 미사를 드릴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앙리 4세는 왕이 되자마자 프랑스 전역에서 모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낭트칙령(1598)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의 키워드인 관용을 상징하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퐁텐블로칙령(1685)으로 그것을 취소하고 1국 1종교로 회귀해 찬물을 끼얹었지만 말입니다.


현재 영국의 윈저왕가는 더 이상 이름이 바뀔 일이 없는 왕가입니다. 윈저 이전인 독일계인 작센코부르그고타왕가 시절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에 대한 국민감정이 좋지 않자 이름을 성씨 아닌 왕궁명인 윈저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인 알버트공이 그 가문 사람이었습니다. 하노버왕가 때부터 계속해서 독일 남자들이 영국의 왕가에 들어온 것입니다. 개명은 1917년 조지 5세가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국은 왕실에서 자손이 끊어져도, 여왕이 어떤 가문의 남편을 맞이해도 과거처럼 왕가의 이름이 바뀔 일이 없어졌습니다. 당장 현재 찰스 3세부터 과거의 룰을 적용하면 그는 마운트배튼왕가의 첫 번째 왕으로 불려야 합니다. 선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공이 그리스계인 그 가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듯이 윈저왕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국의 영원한 왕가가 된 윈저입니다.


윈저왕가의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의 부부 (1952)

보듯이 유럽사에서 종교는 혈통보다 강하고 무섭게 왕실 위에 군림했습니다. 피보다 더 진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가가 존속되는 나라들을 보면 왕정이 폐지되고 폐족이 된 나라의 왕손들은 꽤나 씁쓸할 것입니다. 당장 우리나라 이씨 조선 왕가의 후손들부터가 그럴 것입니다. 645년간 무소불위로 중부유럽을 호령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책임지고 끝이 났습니다. 마지막 합스부르크인 카를 1세는 1918년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해외로 쫓겨나 유럽의 서쪽 끝 대서양의 마데이라제도에서 사망했습니다. 반면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왕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내각에서 왕실 존립을 위해 법개정을 할 정도로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1931년 시대의 흐름에 밀려 왕좌에서 내려온 스페인의 부르봉왕가는 이후 프랑코총통의 장기 집권으로 완전히 끝이 났지만 1975년 그가 죽으면서 왕가의 부활을 명해 살아나 현재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르고 재미있는 왕가의 스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