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문을 살린 두 교황

레오 10세 & 클레멘스 7세

by 마하

메디치 중의 메디치, 위대한 자라 불린 로렌초 메디치는 두 명의 아들을 교황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명은 친자이고, 또 한 명은 양자였습니다. 하지만 양자라 하더라도 그 아들은 메디치가문의 피가 엄연히 흐르는 아이였습니다. 그의 동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줄리아노라 불린 동생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문의 경쟁 가문인 파치가의 음모로 암살을 당했습니다. 1478년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인 피렌체 두오모에서 부활절 미사 도중 일어난 피습이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형 로렌초는 파치가를 피렌체에서 멸문을 시켜버렸습니다. 동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였기에 피의 복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파치가의 음모엔 저 멀리 남쪽 로마의 교황 식스토 4세도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파치가의 그 암살 사건을 사주까지는 아니더라고 허용한 것입니다. 이유는 교황의 조카인 리아리오가 피렌체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몰라라는 영지를 매입하기 위해 메디치 은행에 대출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역시 먼 친척인 살비아티 주교를 피사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피사를 식민 도시로 둔 피렌체의 군주 로렌초 메디치가 역시 또 그의 입성을 질질 끌었기 때문입니다. 로렌초는 교황의 영향력이 그가 다스리는 피렌체 가까이에서 커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은 파치가로 넘어갔고, 파치가는 그 틈을 이용해 메디치가문을 피렌체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잡기 위해 그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물론 보듯이 실패했습니다. 타깃인 형제를 다 죽였어야 했는데 한 명만 죽었기 때문입니다. 형인 로렌초도 목에 칼이 스쳤으나 재빨리 피해 죽음은 피해 갔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교황령인 로마와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분노한 로렌초 메디치가 교황의 사람인 피사 대주교인 살비아티까지 재판 없이 곧바로 목매달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분노한 교황 식스토 4세는 피렌체 남부 나폴리왕국과 손을 잡고 피렌체를 공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피렌체의 절체절명의 위기, 이때 로렌초는 혈혈단신 홀로 나폴리로 가 그곳을 다스리는 페란타 왕을 만났습니다. 피렌체가 무너지면 결국 나폴리도 교황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니 같이 견제하자고 그를 설득한 것입니다. 결국 3개월에 걸쳐 끈질기게 진행된 그의 진심이 전달되었습니다. 나폴리의 페란타는 교황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피렌체 침공 계획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조국 피렌체를 구했습니다. 과연 위대한 자라 불린 로렌초 메디치였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피렌체는 나폴리의 수중에 들어가 식민 도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피치 미술관 외벽의 로렌초 메디치(1(1449~1492)


이때 로렌초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가문에서 교황을 배출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이런 식으로 방해가 되는 교황으로부터 그의 가문과 피렌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도시 국가 피렌체의 군주였지만 그 이전 유럽 16개 도시에 메디치 은행을 보유한 기업인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심경은 우리 정치사에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을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로렌초 메디치는 그의 아들 대에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교황을 배출했습니다. 역시나 그들은 로렌초가 기대한 대로 종교의 수장 역할은 물론 그 시기에 일어난 메디치가문의 위기를 돌파하는 가문의 수호자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1492년 가족력인 통풍으로 43세에 죽은 로렌초였기에 그의 두 아들이 교황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들이 어릴 때부터 교황이 되기 위한 길을 걷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추기경이 되고 교황으로 올라섰습니다. 레오 10세(217대 교황, 1513~1521 재위)와 클레멘스 7세(219대 교황, 1523~1534재위)입니다.


파치가의 음모로 동생 줄리아노가 죽은 후 어느 날 한 어린아이가 메디치가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였습니다. 25세의 미혼으로 불귀의 객이 된 줄리아노였지만 그는 살아생전 좋은 집안에 잘 생긴 외모와 마상 경기 등 뛰어난 스포츠 실력으로 피렌체의 여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가 살해당할 때 어느 여인의 뱃속에 있어 유복자가 된 아이가 찾아온 것입니다. 가문의 수장 로렌초는 동생의 사생아인 어린 줄리오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양자로 입양해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자라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로렌초는 일찌감치 그를 교황 후보군으로 생각하며 키웠을 것입니다. 그의 둘째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첫째 아들인 피에로는 여느 왕가나 가문처럼 가업을 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의 뜻대로 차남인 친자는 레오 10세가 되고, 조카이자 양자는 클레멘스 7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둘은 한 집에서 자란 형제이면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교황, 과연 대단한 메디치의 시대였습니다.


1492년 로렌초 메디치가 죽으며 피렌체는 곧바로 위기에 휩싸입니다. 1494년 그간 피렌체를 호시탐탐 눈여겨봐 오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는 나폴리까지 침공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로렌초가 생존 시엔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등 주요 도시 국가들이 그의 외교력 하에 똘똘 뭉쳐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그가 죽으면서 그것이 와해되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때 피렌체의 지도자인 피에로 메디치는 참으로 못난 짓을 벌였습니다. 역시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혈혈단신으로 프랑스의 샤를 8세를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는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성명학의 영향이 진짜 있는 것인지 메디치가문 중 피에로란 이름을 가진 지도자는 모두 부실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피에로도 통풍으로 침대 신세만을 지다가 집권 5년 만에 별로 한 일 없이 사망했으니까요.


로렌초 메디치 사후인 15세기말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국가들


피렌체를 통째로 프랑스에 바치자 피렌체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도한 메디치가문을 도시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 이전 강경했던 로렌초 때부터 그의 독재에 가까운 정책으로 불만이 쌓여온 상태에서 그의 아들인 피에로가 불을 붙인 것입니다. 로렌초가 임명한 산마르코 수도원장인 사보나롤라가 그 추방을 주도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침공한 1494년부터 18년간 메디치가문은 유대민족처럼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디아스포라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불운한 피에로라 불리는 가문의 수장은 1503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옮기다 배가 뒤집혀 장렬하게 익사한 것입니다. 메디치에선 피해야 될 이름 피에로입니다.


추방 기간 동안 일종의 망명 정부가 되어버린 메디치가문을 이끈 자는 로렌초의 차남 레오 10세였습니다. 추기경 신분으로 그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 와중에 시민이 원하는 온전한 공화국 체제로 운영돼오던 피렌체는 사보나롤라 이후 구성된 소데리니 정권 하에서 붕괴되었습니다. 이번엔 스페인이 침공해오자 정의의 기수를 뜻하는 곤팔로니에레인 그가 가장 먼저 신속하게 망명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스페인 군이 피렌체에 입성도 하기 전 근처 도시인 프라토에 도달하자 줄행랑을 쳤습니다. 이래서 메디치가문은 18년간의 디아스포라를 끝내고 1512년 자기 집이 있는 피렌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다시 로렌초와 같은 강력한 메디치 시대를 그리워해 그 가문의 입성과 집권을 허용한 것입니다. 이래서 정치는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로마 교황청과 채널이 있는 추기경 신분인 레오 10세의 외교력이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피렌체에 돌아온 레오 10세는 1년 후인 1513년 교황이 되며 로마로 떠났습니다. 그는 떠나며 익사한 불운한 피에로의 아들을 가문의 지도자로 올렸습니다. 그에겐 장조카인 로렌초 2세 메디치를 가문의 수장으로 앉힌 것입니다. 우리 조선의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탐해 단종을 몰아냈지만 레오 10세는 반대로 조카를 군주로 앉히고 그가 떠났습니다. 물론 그는 교황으로 갔으니 계유정난과의 비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교황으로 재직 시 레오 10세는 르네상스의 예술가 중 라파엘로를 가장 총애했습니다. 그에게 베드로대성당 건축감독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폭탄을 맞은 교황이 되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첫 교황인 레오 10세(1475~1521). 왼편은 추기경이었던 동생 클레멘스 7세


메디치가문은 이후 또 피렌체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1527년부터 1530년까지의 디아스포라입니다. 이 일은 교황 때문에 일어났고, 그 교황이 잘 매듭을 지어 유랑기를 끝내고 피렌체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교황이 줄리아노 메디치의 사생아인 클레멘스 7세입니다. 형인 레오 10세와 그 사이엔 더치맨인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재위) 교황이 잠시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7세는 추방과는 별개로 가문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우선 그의 가문이 다스리는 피렌체의 역사인 <피렌체사>를 펴냈습니다. 그의 선대 메디치들도 다 나오니 가문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책을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벨리에게 의뢰해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사>를 출간할 때 사장될 뻔한 그의 <군주론>도 함께 출간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없었으면 불후의 명저 <군주론>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1516년 마키아벨리가 복직을 위해 로렌초 2세 메디치에게 <군주론>을 헌정했을 때 그는 그 책의 진가를 못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삼촌인 클레멘스 7세는 그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로렌초 2세 메디치는 그 책은 거들떠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헌정한 사냥개 두 마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만약 그의 할아버지인 로렌초 메디치였다면 당연히 유심히 보고 마키아벨리를 채용했을 것입니다. 위대한 자였던 할아버지의 이름만 물려받은 로렌초 2세 메디치였습니다.


메디치가문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


클레멘스 7세는 르네상스의 거장 중 미켈란젤로와 가장 가까웠습니다. 역시나 어린 시절부터 로렌초 메디치의 양자와도 같이 같은 집에서 자랐던 미켈란젤로였습니다. 클레멘스 7세가 3살 어렸지만 거의 친구처럼 지냈을 것입니다. 물론 미켈란젤로는 동갑내기인 레오 10세와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알아봐주고 키워준 메디치가문을 위해 많은 작품을 작업했습니다. 가문의 영묘이자 사당인 산로렌초성당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안에 지은 가문의 도서관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건축했습니다. 라우렌치아는 그와 클레멘스 7세를 품어준 로렌초 메디치를 기리는 이름입니다. 클레멘스 7세가 건축주였습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인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문과 등을 돌린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메디치가문이 2차로 추방당한 3년 동안의 기간입니다. 그때 그는 쫓겨난 메디치가문이 아닌 피렌체 공화국 편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메디치와 적대적인 관계로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530년 메디치가문이 재입성했을 때에 그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위의 1차 추방기 때 피렌체에서 공직을 맡으며 반메디치파에 섰던 마키아벨리는 고문에 옥고를 치렀지만 미켈란젤로는 소울메이트인 클레멘스 7세가 용서하고 눈감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는 1534년 그런 클레멘스 7세가 죽자 곧바로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를 알아봐주는 주군 격인 메디치가문의 수장이 죽자 그 가문과 작별을 고한 것입니다. 앞서 마키아벨리는 1513년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면서 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1527년 로마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대약탈(Sacco di Roma)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1494년 프랑스가 피렌체를 침공하자 그 꼴을 볼 수 없던 스페인도 이탈리아를 침공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65년간 8차에 걸쳐서 이어진 이탈리아전쟁(1494~1559)의 시작입니다.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도시국가로 산재해 있던 이탈리아가 강대국의 먹이로 외세의 경연장이 된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프랑스 편에 섰습니다. 하지만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는 스페인의 지분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페인이 당시 합스부르크가문과 결혼동맹으로 하나가 되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역사상 최대 영토로 유럽의 최강자로 올라섰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놓고 둘이서 격돌한 것입니다. 1894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우리 청일전쟁과 똑같은 양상이 이탈리아반도에서 벌어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청나라가 들어오니 일본이 들어온 것처럼 말입니다.


<로마대약탈> 요하네스 링겔바흐, 17세기 중반


코냑동맹(1526)으로 프랑스 편에 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곤혹스러웠습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왕이자 합스부르크가문의 수장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가 굴복하지 않자 용병을 동원해 로마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인구 5만이었던 로마가 1만 정도의 인구가 될 정도로 로마는 약탈로 인한 아사와 질병으로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클레멘스 7세는 그 화를 피해 다른 곳으로 피신해 가있었습니다. 그런 클레멘스 7세를 보고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가문을 또 추방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2차 디아스포라(1527~1530)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기간 클레멘스 7세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카를 5세에게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해주는 조건으로 침공을 멈추게 하고 로마 수복을 추진한 것입니다. 그 조건은 세속 군주라면 누구든 탐을 내는 이벤트였습니다. 과거 로마제국처럼 교황이 인정하는 진정한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니까요. 아울러 그는 추방당한 메디치가문의 피렌체 입성도 함께 시도했습니다. 프랑스는 물론 피렌체와 등을 지며 적과의 동침을 추진한 것입니다. 그 협상으로 클레멘스 7세는 로마의 교황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피렌체를 신성로마제국군의 도움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피렌체공화국의 군사 고문으로 요새 설계와 방어 무기 등을 제작하는 건축가 역할을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반메디치파에 섰던 것입니다.


이탈리아전쟁 시기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위엄. 왼편 끝에서 두 번째가 교황인 클레멘스 7세, 그의 우측은 포로로 잡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1530년 메디치가문은 3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피렌체가 안정이 되자 클레멘스 7세는 알레산드로 메디치를 가문의 수장으로 내세웠습니다. 과거 그의 형인 레오 10세가 1차 추방을 마치고 돌아와 장조카인 로렌초 2세에게 권력을 돌려준 것과 같은 모양새였습니다. 사실 클레멘스 7세가 권력을 쥐어 준 알레산드로는 그의 사생아가 유력합니다. 전임인 로렌초 2세가 아들이 없어서 그렇게 승계가 이루어졌습니다. 흑인 하녀 사이에서 태어나 무어인이라 불린 메디치였습니다. 하지만 그 알레산드로(1532~1537 재위)는 5년 만에 암살을 당해 비운의 메디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코시모 1세(1537~1574 재위), 이 시절 메디치가문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는 피렌체의 영토를 토스카나 전체로 넓혀 토스카나대공이라 불린 메디치였습니다.


이렇듯 메디치가문의 역사엔 두 번의 추방이 있었습니다. 그때 위기를 돌파한 가문의 인물은 장손인 적통의 메디치가 아니라 종교인이 된 차남이나 양자였습니다. 그들이 못난 메디치를 대신해 구원투수로 등판해 추방을 종식시키고 가문을 살린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적자보다 능력도 있었겠지만 추기경과 교황직을 수행하며 국제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기에 그런 기사회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메디치가문은 그 후 한 명의 교황을 또 배출했습니다. 선조의 이름을 물려받은 레오 11세로 그는 메디치의 교황 중 가장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교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과 27일만 교황직에 있었습니다. 1605년 4월 1일에 즉위해 27일에 사망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빨리 죽어서 그런 후대의 평가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든 고위직에 오르면 처음엔 원칙대로 열심히 일하니까요.


베드로의 열쇠를 넣어 교황의 가문임을 보여주는 메디치가문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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