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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04. 2020

안티르네상스, 허영의 소각

얼마 전 우리 국민의 총격 사건에 화장이냐 소각이냐 하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끝난 논란은 아닙니다. 소각은 불에 태워 없애는 것이고 화장은 장례의 형식이니 물리적 현상은 같을지라도 의미와 해석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소각은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말끔히 없애는 것이나 화장은 육체를 불로 정화해 깨끗해진 영혼은 남기는 것이므로 당연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형도 있습니다. 바디뿐만이 아닌 소울까지 없애려 한다는 측면에서 방법은 화장과 비슷하나 의미는 소각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중세 마녀사냥 시 마녀 입증을 위해 고문은 다양하게 가하지만 처형식만큼은 화형으로 동일하게 집행한 것은 그러한 맥락일 것입니다. 영혼까지 싹!


소각과 화형 사람이 모여지면 쇼적인 의미가 더해지면서 주최 측이 전달하고자 하는 선언적 메시지는 강해집니다. 이른바 스펙터클 효과입니다. 마녀 화형식은 요즘 교수형과는 달리 다수의 군중이 모인 곳에서 집행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두가 잘 보이게 단을 높게 쌓아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소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이 행한 분서갱유 시 아방궁 안의 만조백관과 학자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과거 행했던 500억 원대 불량 휴대폰 소각 장면은 당시 공장 운동장에 모인 2천여 명의 직원은 물론 TV 뉴스를 통해 전 국민이 보았습니다.


1497년 어느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선 역사적인 소각식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허영의 소각, 허영을 불에 태워 없애려 도시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이러한 의식이 행된 것입니다. 이 행사의 기획 연출자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그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장였습니다. 당시 그는 메디치 가문을 몰락케 하는데 일조그 도시의 지도자였습니다. 위대한 자라 불리는 로렌초 메디치 사후 피렌체는 이렇게 일순 기독교 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 도시국가로  변모해있었습니다.



허영은 태울 수 있는 물품이 아니대신 그것을 상징하는 귀족과 부자들의 사치품, 예술품, 서적, 화장품, 의상, 오락물 등이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사보나롤라 입장에선 모두가 신성을 위반하고 방해하는 물품들일 것입니다. 허영이 태워진 도시에 남은 건 억제된 금욕검약한 청빈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근세를 연 르네상스가 추구한 인간 중심에서 다시 신 중심의 중세로귀환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꽃의 도시 피렌체가 이렇게 침묵하는 암흑의 도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허영의 소각, 그것은 르네상스를 소각하는 안티-르네상스의 의식이었습니다.


1492로렌초 메디치의 죽음이 이러한 과거로의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그의 후계자 피에로가 아버지만 못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비극 아닌 비극은 로렌초 본인이 불러온 측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렌체에 적응 못해 도시를 떠났던 사보나롤라 그를 다시 불러들여 산 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앉힌 이가 바로 로렌초 그였기 때문입니다. 메디치 입장에선 사람을 잘 못 쓴 것이지요.


그 이전 1478년 부활절 치 가의 음모 사건이 실패한 후 로렌초는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피렌체에서 유일한 경쟁자 파치 가가 사랑하는 동생 줄리아노를 잃은 의 복수극으로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제 그가 가는 길은 공화국 피렌체에서 군주의 길로 바뀌게 됩니다. 파치 가와  잡았던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조카인 리아리오가 나폴리 등 주변 세력을 규합해 여전히 그를 호시탐탐 노리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는 그렇게 세게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위기 타개를 위해 그는 국가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시뇨리아 의회를 해산하고 그의 밑에 10인 위원회를 설치해 피렌체완벽히 장악합니다. 다수의 협치가 아닌 독단적 중앙집권적 통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국 그를 위협했던 교황 세력은 제거되고, 이후 그는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주변의 막강 도시 국가인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등과 상호 불가침 평화조약을 맺어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반도의 평화 시대를 열어갑니다. 당연히 그 중심엔 로렌초 메디치의 피렌체가 있었습니다. 아니 피렌체의 로렌초 메디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가 임명한 산 마르코 수도원장 사보나롤라, 그의 눈엔 이런 로렌초가 탐탁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피렌체를 위해서라지만 정치적 이익을 위해 권모술수가 날뛰고 그 안에 필연적으로 피어나는 부패와 도덕적 해이 등을 그는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군중들 앞에서 르네상스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고, 비싼 건축물과 정원을 조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메디치 가와 귀족들에게 날 선 비판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먹여 살리라고.. 그리고 회개하라고.. 그의 눈엔 당시 부강한 꽃의 도시 피렌체가 멸망 전 소돔과 고모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민초들에게 부자들의 전유물인 예술과 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는데 그 수가 점점 불어나 로렌초가 통제하기 힘든 상황까지 이릅니다. 설상가상으로 로렌초는 가족력인 통풍으로 43세인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는데 이로써 도시의 권력은 사보나롤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넘어갑니다. 그들을 기에 아들 피에로 메디치는 많이 유약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로렌초의 권력 기관인 10인위원회를 해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구성해 피렌체를 이끌게 됩니다.


그 후 피렌체는 달라졌습니다. 르네상스의 활기찬 기운은 사라지고 기독교적인 도덕과 규율이 지배하는 도시가 된 것입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신의 도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이 틈을 노린 당시 유럽 최강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합니다. 그 결과 강력한 군주가 부재한  렌체는 프랑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 사보나롤라는 괴뢰정부의 수반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로렌초 메디치가 생전 애써 만들어놓은 도시 간 평화협정은 깨졌고 경제군사외교문화예술적으로 강했던 피렌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을 모아놓고 허영의 소각 의식을 실행한 것입니다.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점점 더 강도가 세어지는 그의 도덕과 금욕 정책에 무료해하고 지루해하며 옛 시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강하고 힘 있던 메디치 시대가 살만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축제와 예술, 진귀한 것, 승전보 등 볼거리, 들을거리가 넘쳤던 바로 그 시대 말입니다.


이래서 정치는 어렵습니다. 군중은 입에 달고, 코에 향기롭고, 귀를 간질이는 새로운 것에 혹하지만 그것의 유통 기한이 끝나면 또 새 것이나 반대급부적인 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허영의 소각 20여 년 후인 1516년 영국의 토머스 모어는 이상적인 국가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유토피아를 출간하게 됩니다.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사보나롤라는 1498년 반대파에 의해 처형당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정치 권력자와 함께 세속화된 교황청도 계속해서 비판해왔기에 교황의 눈밖에 난 그의 종교재판은 형식적으로 치러졌을 것입니다. 이단으로 사형 언도, 그리고 선택된 처형 방법은 화형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의 흔적은 물론 영혼까지 완전히 지우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1년 전 그가 주도했던 허영의 소각처럼..



* 사보나롤라의 저서 세계의 몰락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타락한 권력자와 세속화된 교황 모두에 탄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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