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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Dec 04. 2020

If or If not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로 갔다면..

라라랜드..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라는 뜻의  제목에 힘입어선가 이 영화는 2016년도에 개봉되어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화제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5천여 억을 벌여들였고 아카데미에서 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투자자와 제작자 그리고 배우 모두 영화 시작 전 꾼 꿈 그대로 모두가 찬란한 별이 된 것입니다.


당시 관람 시 이 영화의 후반부 어떤 장면에서  시선은 유독 길게 고정되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재즈 피아니스트 역인 라이언 고슬링이 자기 공연장에 우연히 관객으로 들어온 옛 연인 역인 엠마 스톤을 보고 회한에 잠기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와 헤어진 후 배우로 성공해서 지금은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합니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치던 그와 마주 선 그녀, 눈빛이 교환되고 불꽃도 튀려 하는 찰나 그는 그냥 쓱 그녀를 지나칩니다. 이건 과거의 현실입니다. 이후 어찌어찌해서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만 만약 그때 그가 와일드하게 그녀를 와락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면 그와 그녀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과거의 상상입니다. 영화에선 연애 후 아래 영상에서 보듯 둘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미고 육아를 함께 하는 상상의 나래가 뽀샤시하게 파스텔 톤으로 펼쳐집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라이언 고슬링의 상상대로 그가 그때 엠마 스톤과 키스를 하였다면 그 둘은 결혼까지 이어졌을까요? 남자들이 하는 말 중에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호기 서린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정석으로 돼있는 말입니다. 그 자리가 술자리라면 효과는 더욱 배가 됩니다. 탁자도 한번 탁 치면서.. 그런데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과연 뭐가 달라졌을까요?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이 상상하듯  그녀와 결혼해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더 나아가 첫사랑 그녀 때문에 인생까지 확 풀려 지금보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꽤나 많았던 선택의 순간에 내가 만약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인한 상상 속 결과의 대부분은 지금보다는 나은 상태에 있는 본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베터 라이프 결과를 전제해서 하는 확률이 높을 테니요. 현재에 백 프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가정을 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 최면으로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니 상상 속에서라도 그러고픈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 순간은 잠시 행복해지도 모르겠습니다. ~할 걸, ~하지 말 걸 이렇게 아쉬워하며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라 불리나 봅니다. 이른바 걸걸걸, 껄껄껄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에 기초하여 쓰인 아주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입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에 빠진 화자 나는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 끝에 한 길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길은 발자국이 덜 찍힌 길이었습니다. 선택으인해 먼 훗날 화자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술회하는 인생이 들어있는 시입니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선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마지막 구절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과연 진짜 그 길을 선택해서 그의 인생이 그렇게 달라졌을까요? 그러면 선택하지 않은 길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도 궁금하고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 길입니다. 가지 않은 길이 왠지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 길을 선택해서 갔으계속해서 장밋빛 탄탄대로가 이어지, 길 끝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나타날 것만 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 가지 사건을 소환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이후 역사를 바꾼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vs 루비콘 강

"건널 것인가? 말 것인가?"



기원전 49년 6월,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 앞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로마를 떠나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그 땅에서 8년간 총독으로 근무한 후의 일입니다. 그의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로마로 간다는 것이고, 로마로 간다는 것은 원로원과 1차 삼두정치의 파트너였던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이었습니다. 본국 로마보다 열세의 병력이었기에 목숨을 내건 일이었습니다. 강을 안 건너고 오늘날 프랑스 땅넓고 풍요로운 갈리아에서 와인을 즐기며 여생을 즐겨도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강을 건넜고 쿠데타에 성공, 로마의 종신독재관이 되어 오늘날 역사가 평가하는 수많은 로마인 중 가장 위대한 로마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카이사르는 암살도 안 당했고 오늘날 그의 무덤은 프랑스 땅에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신 후대의 역사가는 카이사르를 로마 제국의 수많은 속주의 총독 중 일개 총독으로 그를 작고 희미하게 기록했을 것이고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짜아르 등의 용어들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살아생전 황제에 오른 적이 없었는데 죽어서는 전 세계에 황제의 대명사가 된 그였습니다. 당연히 오늘날과 비슷한 태양력인 율리우스력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저는 단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일 말입니다. 그가 결심이 덜 돼 오늘날 역사가 기록하는 그날 안 건널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영원히 안 건너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달이든, 아니면 그다음 계절에, 또 아니면 그다음 해라도 그는 건넜을 것입니다. 당시 그의 주변 환경이나 정세가 그의 선택을 접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 건너기엔 그의 정치적 야심이 너무 커서 루비콘 강은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도강 전 그는 외쳤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본디오 빌라도 vs 예수 그리스도

"사형 선고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리아 속주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고 82년 후 남쪽 유대 속주에선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엔 헤롯왕이 있었지만 당시 사법권은 정복자인 로마가 갖고 있었기에 재판은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볼 때 속주 유태인 지배층이 끌고 온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지저스 크라이스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죄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형강력하게 청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돌려보냅니다. 그랬더니 돌아갔다가 다시   사형합니다. 그래서 또 돌려보냅니다. 군중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쩌고 저쩌고 얘기하는 건 유대교 국가 유대에선 그 훨씬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선지자들이 숱하게 해온 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유죄성을 가리는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의 설교 중 로마에 유해한  식민지적 정치색 있었느냐 없었느냐인데 그런 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없었습니다. 이 재판 몇년 전 총독 살해 미수로 중형을 선고받은 영화 벤허의 주인공 유다같은 죄가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찾는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로마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설교하며 정복국 로마의 조세 정책에 순응하라고까지 했으니 죄라 할 것이 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아참, 가이사는 카이사르이니 위에서 카이사르가 만약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예수가 이 말도 할 수 없었겠네요. 물론 신약 성경에도 나오지 않겠고요. 역사는 이렇게 과거와 맞물려 돌아가니  과거 없는 과거가 없듯이 과거 없는 현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세 번째 재판에서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가 원치 않는 판결이었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하지 않았다면?


그럼 예수는 안 죽었을 테니 당연히 부활도 없었겠지요. 예수는 다른 성인인 석가모니나 마호메트처럼 80세, 60여 세까지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는 예수의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 종교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교와 선명한 차별점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예수 인생의 하이라이트인 수난 사망 부활이 그의 인생에서 빠지기에 예수는 아마도 그저 위대한 유대인 선지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될 확률이 높습니다.


저는 단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빌라도가 세 번째 사형 청원에도 또 거절해서 돌려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 지배층 그들은 예수의 죄를 불려서 또 그를 찾아왔을 것입니다. 결국 네 번째든 다섯 번째든 그는 결국 유대 지배층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 입장에선 속주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곳을 움직이는 토착 세력인 유대 지배층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는 유월절 기간이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 있기에 혹여 폭동이나 반란도 우려해 유대인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청을 들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빌라도 앞의 33살 예수란 청년은 목수 출신의 일개 서민이니 사형을 당해도 별 후폭풍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의 선택을 바꾸는데 일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빌라도의 이 선택은 훗날 그의 조국 로마를 구하게 됩니다. 약 3백 년 후 기독교는 결국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니까요. 유일신의 기독교는 광대한 로마 제국의 각기 다른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통일된 사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올림푸스 산 위에 사는 그들 로마의 신들은 숫자도 워낙 많고 족보도 복잡해 이민족들에게 주입하기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사형 선고는 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로렌초 메디치 vs 미켈란젤로

"산책을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15세기 후반 어느 날,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 메디치는 그의 사유지인 정원에 산책을 나가려 합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도시를 강하게 만든 것은 물론 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양성하고 후원해 꽃의 도시 피렌체에 르네상스를 꽃피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날 그가 향한 에덴동산을 모티브로 만든 그 아름다운 정원도 피렌체의 무명 예술가들에게 개방하여 그곳에서 무료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게 한 공간이었습니다.


정원에 도착해 거닐던 로렌초는 한 작가 앞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조각하는 작품이 비범해 보여서 그랬는데 보니 작가는 아직 앳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목축의 신을 조각하고 있었는데 로렌초가 보기엔 그 신이 좀 젊어 보여 그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 그다음 날 그곳에 또 가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신은 그가 생각하는 나이대의 신으로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뛰어난 소년의 재능에 감탄한 로렌초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양자를 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3년 동안 그의 휘하에 있던 위대한 스승들에게 교육을 맡기는데 놀라운 것은 조각이나 회화 등은 가르켜주지 않았습니다. 신학 라틴 철학 고전 등 이런 인문학 범주의 교육만을 집중적으로 시켰습니다. 위대한 자라 불리는 로렌초 메디치에게서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탄생한 것입니다.


만약 그날 로렌초가 그 정원에 가지 않았다면?


미켈란젤로는 그를 못 만났을 니 그는 그의 후원도 못 받았을 것이고 양질의 인문학 교육은 더더욱 못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의 뛰어난 재능에 힘입어 그는 그 시대의 뛰어난 예술가는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다비드 등의 수준에 이르는 울트라 마스터피스는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단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비껴가서 둘이 못 만났을 수는 있어도 언젠가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방문할 때 보거나 아님 다른 장소에라도 그 둘은 만났을 것입니다. 피렌체란 공간적 틀 안에서 두 사람이 움직이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고수의 눈에 고수는 결국 눈에 띄기 마련이기에 그렇습니다. 로렌초가 주관하는 조각 콘테스트 같은 것을 통해 미켈란젤로를 만났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 둘의 만남은 예술을 향한 천재의 강한 열정과 그런 예술가를 찾는 패트런의 강한 욕망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날 그 정원은 두 사람의 뻗치는 열정과 욕망의 선이 만나는 교차점이었습니다.




이성계 vs. 위화도

"진군할 것인가? 회군할 것인가?"



1388년 5월, 이성계와 그의 군대는 압록강 안의 섬 위화도에 있었습니다. 진군전쟁이고 회군은 쿠데타입니다. 진군의 끝은 요동(랴오둥)이고 회군의 끝은 개경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역사에 기록된 대로 회군이었습니다. 이른바 위화도 회군, 이성계의 이 선택으로 당시 군주인 우왕은 폐위되고 최고 실력자인 최영은 참형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회군 명분으로 내세운 사불가론은 요동정벌이란 진군에 대한 불가론이지 것이 회군에 이어지는 쿠데타의 명분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당시 조정 세력과 충돌 없는 원상복귀 회군은 불가능했기에 두 세력은 그렇게 부딪쳤습니다. 친원파와 친명파, 보수 세력과 신진 사대부 등 이렇게 둘로 갈라진 당시 여말의 중앙 정치판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1392년 친명 회군 세력인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에 의해 조선이 건국됩니다. 회군이라는 선택이 역성혁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당시 이성계가 회군하지 않고 진군하였다면?

 

요동반도에 도착한 고려군.. 우리나라 역사에 이렇게 우리 군대가 중국 본토에 말발굽을 들인 적이 있었던가요? 과거 고구려와 발해 때는 발원지와 본래 영토이기에 그때완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명과 전쟁을 벌였으면 최영이 바라듯 승전해 함경도 철령 이북 우리 땅을 사수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싸웠다면 모르지요. 싸움의 승패는 붙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요.


저는 단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계와 고려군이 회군하지 않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진군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친명파인 이성계와 그의 세력은 명과 화친을 맺거나 항복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히려 그들과 합세해 최영의 고려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회군해서 개경을 공격한 그들이니 이것은 전혀 이상한 가정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요동으로 진격했어도 친원 국가 고려는 멸망했고 친명 국가 조선은 세워졌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당시 그들의 국가관이 그랬고 역사의 시계추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즉 진군이든 회군이든 오늘날로 이어지는 결과는 같았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물의 역사적인 선택을 요하는 네 가지 사건을 통해 그때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의 결과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보시듯 저의 결론은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가지 않은 길 선택 시  잠깐 그의 삶이 다르게 펼쳐는 지겠지만 결국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역사와 같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같은 역사적 환경 속에 같은 역량을 지닌 개인이 선택한 역사이기에 운명도 같은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 나무의 가지들이 이방향, 저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해도 가지들을 붙든 큰 줄기는 한 방향인 하늘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위인이나 셀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느 범부선택도 같은 이치로 훗날의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은 그의 상상처럼 그때 엠마 스톤에게 키스를 퍼부었어도 그녀와 결혼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의 이별 이유였던 그들 미래에 대한 같은 고민으로 둘은 역시나 헤어졌을 것입니다. 그때 피아노 앞에서 키스를 했다고 해서 그 진로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사랑의 호기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당장 저부터가 첫사랑 운운했던 남자였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때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 해도 이후 그녀는 결국 저를 떠났을 것입니다. 연애 기간만 좀 연장됐을 뿐이지 분명히 똑같은 이유로 그녀는 떠나갔을 것입니다. 당시 그녀의 이상과 바람이라는 것이 성인이 될수록 더 커지면 커졌지 결코 작아지거나 사라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잘 알기에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첫사랑의 환상에 빠져있는 이 땅의 남자들은 이제 그녀를 그만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당신과 그녀와는 이 길을 갔어도 또는 저 길을 갔어도 안 될 운명이었습니다. 환경이 아니고 사람이 바뀌어야 바뀔 운명인 것입니다.


버트 프로스트가 1915년 '가지 않은 길' 시를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에 불과했습니다. 그 나이에 이런 인생을 담다니.. 천재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하면 그때는 그가 인생이라는 큰 제를 완벽히 이해하고 풀었기엔 그의 경험이나 지혜가 아직은 미성숙된 상태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천재에게도 필연적으로 긴 시간을 요하는 분야는 있으니까요. 인생이란 문제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가 만약 인생의 이런저런 질곡을 거쳐 하늘의 뜻을 헤아린다 하는 인생 후반기 50대 이후에 이 시를 썼더라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저는 또 가정을 해봅니다.


가지 않은 길 원문엔 가지 않은 길로 안 감으로써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지고 차이가 발생했다고 그가 지만 혹시 이렇게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 길을 갔어도 인생 전체엔 별 차이가 없더라라고 말입니다. 즉 시 마지막 원문인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가 "That has made little difference"로 바뀌는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89세까지 살았습니다. 저는 그도 인생 후반기에  충분히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가 막상 인생을 살아보니 노란 숲 속의 이 길을 갔든 저 길을 갔든 별 차이가 없더라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먼 훗날까지 살아본 인생과 먼 훗날까지 살 인생이 관조하는 인생은 분명히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경험과 실재가 누적된 프로스트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시를 철회할 순 없습니다. 그러기엔 전 세계에 걸쳐 너무 유명해졌고 시집도 꽤나 많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프로스트가 과거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쓴 이 시는 이미 반드시 현재형인 인생의 진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증명 아닌 증명을 하고자 합니다. 가지 않은 길이 미래에 어떤 차이를 줄까 하는 사례입니다. 중국집에 식사하러 가면 우리는 대부분 고민을 합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라고 말입니다. 뭘 먹을까는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되는 선택과 고민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내려보내는 지금 시간이 오후 5시 20분입니다. 저는 아까 점심에 고민하다가 짜장면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후 이 시간까지 지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이 회사 회의도 했고 40분 전부턴 이 글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저의 현실입니다.



근데 만약 과거짜장면이 아니고 짬뽕을 먹었다면 지금 저의 이 시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변화가 있을까요? 짬뽕을 먹는 점심 그 시간 저의 역사는 짜장면을 먹을 때와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끝나면 그때부턴 제가 지나온 오늘 오후의 역사가 똑같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물론 짬뽕이 유난히 매워 속 쓰림에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약국을 들러 위장약을 사는 역사가 추가될 순 있습니다. 그래도 그다음 시간부턴 다시 같아져 지금 이 시간 똑같이 이 글을 정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 심하게 짬뽕에 상한 해물이 들어있어 오후 내내 병원 신세를 지었다 한들 어느 시점 저의 역사는 다시 짜장면을 선택한 역사와 같은 시간의 길을 가고 있을 것입니다.


가볍고 짧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선택의 예를 들었지만 저는 위에서 예를 들은 카이사르, 빌라도, 로렌초, 이성계 등의 선택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이 살았던 보다 오늘날 훨씬 더 역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땐 단지 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사건의 중요도가 큰만큼 이후 파장은 짜장면 짬뽕 사례보다는 컸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어느 길을 선택했든 결국 어느 시점엔 본 궤도로 다시 올라와 단일 역사의 흐름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사로 말입니다.


그러니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렇게 큰 고민을 안 도 될 것입니다. 선택을 고민한다는 것은 선택 대상의 가치가 비슷하다는 것이기에 거기에 최선을 얹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여건과 환경 속에 선택자인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만큼 거기에 걸맞게 선택의 역사는 흘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 결과는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고, 그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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