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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23. 2021

아름다운 훔쳐보기

엔니오 모리꼬네는 탁월했습니다. 영화가 1차적으로 인체를 반응케 하는 시각과 청각 요소 중, 그 청각 중에서 음악의 효과 지분을 그보다 많이 끌어올린 영화음악 작곡가가 세상에 또 있었던가요? '시네마 천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황야의 무법자' 등 그가 음악을 한 영화의 스토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물가물 잊힐지언정 그가 만든 OST들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고 들을 때마다 감성 작용 또한 최초 관람 시의 그것과 다를 바 아닙니다. 청각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일정 시간 살아있을 정도로 강하다 하니 과연 그런가 봅니다. 물론 당연하게 청각을 자극하는 그의 음악이 그만큼 뛰어나고 인상적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시각이 크게 좌우하는 영화 스토리와도 합이 맞는 조화를 이루어서도 그럴 것입니다. 20세기 이후 클래식 분야에서의 작곡가는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 대체재로서 영화음악에서의 그의 역할은 부재한 그들 이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년 전 사망한 그를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가히 마에스트로!


훔쳐보기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훔쳐보는 대상은 아름다울 수 있어도 훔쳐보는 행위가 아름답기는 힘들 것입니다. 훔쳐보기란 대개 훔쳐보기의 행위자가 훔쳐보기의 대상자가 인지하지 못하게끔 최대한 본인을 감춘 상태에서 작은 틈새를 통해 은밀하게 진행하는 시각적 행위를 이르는데, 이것이 나쁜 행위이고 범죄적 요건까지 갖추게 되는 준거는 그 대상자가 훔쳐보기를 허용하거나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성적 만족을 위해 벌이는 성적 이상 증세인 관음(觀淫 )과 왕왕 연계되기에 훔쳐보기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Lady Godiva


아름답지 않은 훔쳐보기의 대표적인 스토리로 레이디 고디바가 있습니다. 훔쳐보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신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11세기 중엽 영국 코벤트리 지방 영주의 아내였는데 남편인 레오프릭 영주가 농노들에게 세금을 크게 매기자 이에 대해 항의를 하였습니다. 농노 편에 선 것입니다. 선한 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영주는 그녀에게 만약 알몸으로 영지를 한 바퀴 돌면 그녀 말대로 세금을 깎아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약조를 했는데 그녀가 덜컥 그렇게 한 것입니다. 희생심도 강한 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고디바의 태도와 행동에 감복한 주민들은 그녀가 알몸인 채 말을 타고 마을을 돌 때 모두가 커튼을 내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있어 아무도 알몸의 그녀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농노들은 무거운 세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훈훈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여기에 옥에 티가 하나 끼어들었습니다. 그것은 주민 중 재단사 직업을 가진 한 남자가 그녀에게 감복을 덜 받았는지 몰래 커튼을 빼꼼 제치고 그녀를 훔쳐본 것입니다. 그 나쁜 훔쳐보기로 그는 천벌을 받아 눈이 멀었습니다. 그리고 불명예스럽게도 훔쳐보기를 즐기는 사람인 관음증 환자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런 호색한을 가리키는 'Peeping Tom'에 출현하는 Tom이 바로 그이니까요.


레이디 고디바는 20세기엔 국적을 영국에서 벨기에로 옮기고 초콜릿으로 환생하여 지금도 여전히 벌거벗은 그때의 모습으로 전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 탄 나체 모습이 고디바 초콜릿 브랜드의 이미지 심벌로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숭고함을 브랜드가 차용한 것이지요. 아마도 어린이들도 특히나 좋아하는 상업적인 제품에 나체 비주얼을 이렇게 버젓이 썼음에도 아무 잡음 없이 기대 이상의 판매 효과를 거두고 있는 마케팅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일단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애마부인을 떠올릴 소비자는 없을 테니까요. 소비자는 고디바를 구매할 때 기능적으로는 초콜릿에 페이하는 것이지만 효용적으로는 레이디 고디바의 선한 행동과 희생 정신에 페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디바 그녀 덕에 참 격조 높은 초콜릿이 되었습니다.


고디바 초콜릿 심벌 & 로고


감시와 처벌


프랑스의 선각자 미셸 푸코가 1975년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부제. 감옥의 탄생)'에서 이야기한 감시도 그런 류의 훔쳐보기일 것입니다. 책에서 푸코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쳤던 공리주의자 벤담이 개발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감옥을 인용합니다. 그 감옥은 죄수는 감시자를 볼 수 없으나 감시자는 모든 죄수를 볼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되었습니다. 죄수는 감시받는다는 사실보다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더 두려울 것입니다. 감시를 안 하는 순간도 늘 긴장하며 생활해야 하니까요.


50여 년 전 정보화 사회 전 정보화 기기가 원시적이던 시절에 이런 사회를 예견한 푸코의 혜안이 놀랍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훔쳐보기가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국가를 위시해서 공공기관이든 사기업이든,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유령과 같은 회사들은 개인정보 동의라는 미명 하에 얼마든지 개인의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습니다. 아니, 때론 동의를 안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00는 어젯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시대입니다. 00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신을 훔쳐볼 수 있으니까요.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훔쳐보기입니다.


제레미 벤담(1748~1832) & 판옵티콘 설계도


그런데 세상엔 이렇게 나쁜 훔쳐보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훔쳐보기도 있다는 것이지요. 때론 가슴 아픈 훔쳐보기도, 때론 개인은 물론 세상의 운명까지도 바꾸게 하는, 그래서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훔쳐보기도 있습니다. 제가 지나온 삶의 어떤 순간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훔쳐보기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는 아주 인상적이라 아래의 기억으로 남아있지요. 이 글 꼭대기에 오마주한 엔니오 모리꼬네와도 관련 있는 훔쳐보기는 가히 그것들의 정점으로 제게 박혀 있습니다.


Living next door to Alice


스모키(Smokie)라는 밴드가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영국의 록 밴드입니다. 그들의 노래가 우리의 정서에 맞아서인가 본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큰 인기를 끈다고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 그들의 리즈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히트 친 스모키의 노래가 많았는데 그중 대표로 한 곡을 뽑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Mexican Girl'을 뽑습니다. 인트로의 타악기를 때리는 듯한 어쿠스틱 기타의 리듬과 읊조리는 리드 싱어 크리스 노먼의 멜로디, 그리고 코러스로 다 같이 멕시칸 걸을 외쳐대며 떠나가는 그녀를 잡으려는 절규성 하이라이트 등 모든 부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이건 그냥 제 개인 취향이고 누가 뭐라 해도 스모키의 대표곡은 우리나라에서 역대급 팝송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Living next door to Alice'라는 곡입니다. 이 노래의 노랫말에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아름다운 훔쳐보기가 등장합니다.


스모키를 세상에 알린 Living next door to Alice, 1976년


제목 그대로 옆집에 앨리스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화자는 그녀를 짝사랑해 몰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며 자랍니다. 무려 24년간 말입니다. 24년째에 그의 훔쳐보기가 끝난 것은 그해 어느 날 그녀가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샐리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후다닥 창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리무진이 그녀 집 앞에 서있었고 그녀는 그 차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결혼식장으로 간 것이겠지요. 그 창문은 24년간 그가 그녀를 훔쳐본 미디어였습니다. 그간 창밖의 여자를 보며 호시탐탐 고백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창밖으로 떠나가는 그녀와 마지막 눈 맞춤을 하며 그는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만 훔쳐보고 진작 이렇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고백을 할 것을 하고 말입니다. 앨리스도 그가 창으로 자기를 훔쳐보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용기 있는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어렸을 땐 소꿉놀이를 함께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습니다. 그가 아무리 그 창문을 내다봐도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Interstellar


2014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독특한 훔쳐보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매튜 맥커너히)가 딸(제시카 차스테인)을 훔쳐보는 장면입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하면 그것은 같은 세계에서의 훔쳐보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의 훔쳐보기였습니다. 영화에서 전직 우주 비행사인 아버지는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기 직전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 미래로 가게 되는데 그곳 5차원의 세계에서 현재 세계의 딸과 지구의 운명을 구하는 절체절명의 커뮤니케이션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른 세계에 있던 아버지와 딸은 서로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만이 딸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딸의 방 책장 뒤에서 책과 책 사이의 작은 틈을 통해서였습니다.


5차원의 세계에서 딸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아버지, 인터스텔라, 2014년


아버지는 그 틈새로 현재 세계의 딸을 안타깝게 훔쳐보게 됩니다. 비범한 딸은 아버지를 보지는 못하지만 어느 순간 그 방에 그가 있다는 것은 깨닫지요. 마치 유령과 같은 존재로 말입니다. 결국 모스 부호의 떨림으로 메시지가 전달이 되어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지구인을 살릴 방정식이 풀린 것입니다. 유레카! 그때 아버지가 딸을 훔쳐본 그 책장의 틈새는 미래와 현재를 연결해준 미디어였습니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지구의 운명을 구했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훔쳐보기라 할 것입니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


또 영화입니다. 저는 이 훔쳐보기가 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적인 장면도 대단했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있어 더 대단해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한 장면입니다. 1984년 국내에 처음 개봉 시 러닝 타임 139분이었던 이 영화는 비디오로는 229분으로 출시되더니 2015년 재개봉한 디렉터스 컷은 거기에 22분이 더 추가된 251분이나 되었습니다. 스토리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 정도면 1차 개봉 때 그 영화를 본 관객은 돈 내고 헛 것을 봤다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헛 것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 것이지요. 그 시대의 룰에 의해, 또는 너무 길어 흥행이 안 될까 싶어 왕창 가위질을 당했던 것이겠지요.


그 완결판 영화를 아니 볼 수 없었던 저는 쪼르륵 영화관에 달려갔습니다. 워낙 길어선가 낮에는 상영을 하지 않아 밤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심야 영화를 봐야 했습니다. 4시간 11분, 영화가 길다 보니 중간에 공연처럼 인터미션까지 있어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야 끝이 났습니다. 늦은 밤, 아니 이른 새벽 귀갓길, 기나 긴 숙제를 마친 듯한 포만감을 안고 집에 왔던 기억이 납니다.


늙어서 돌아온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는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데보라(제니퍼 코넬리)를 회상하며 그녀의 집에서 운영했던 식당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러했듯 그 식당 식재 창고의 벽돌 구멍 틈새로 안을 쳐다보게 됩니다. 과거엔 그렇게 데보라를 훔쳐보았었으니까요. 그때 놀랍게도 시간은 과거로 달려가 장면은 그들의 어린 시절로 바뀝니다. 춤추는 어린 데보라와 그녀를 훔쳐보는 어린 누들스, 그리고 데보라에게 들켜 깜짝 놀라는 누들스, 그리고 그가 자기를 훔쳐보는 것을 알면서도 도발적으로 옷을 벗는 어린 데보라.. 그 장면을 본 누들스의 심장 뛰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이 훔쳐보기를 통해 연결된 둘은 평생 서로를 사랑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둘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들스가 데보라를 쟁취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로스쿨을 가든 MBA를 해서 출세를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지하 세계의 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데보라를 훔쳐보기로 회상하는 현재의 누들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년  


이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와 유사한 훔쳐보기의 경험이 제 어린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입니다. 당시 미술을 하던 저의 형님이 다니던 화실이 인천 제물포역 뒤쪽에 있었는데 그곳에 예쁜 여중생이 한 명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을 아꼈던 형이 중요한 정보를 동생에게 전달해준 것이지요. 호기심이 가득했던 사춘기의 저는 눈 내리는 겨울밤 몰래 그곳에 가 투명한 통창 너머로 다소곳이 앉아 목탄 데생을 하는 단발머리에 교복 코트만 보이는 소녀의 뒷모습을 훔쳐보았습니다. 차마 들어가서 앞모습을 볼 용기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혹시나 그녀가 확 뒤돌아서 저를 볼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시작한 훔쳐보기로 그녀는 훗날 저의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소녀를 처음 훔쳐본 그날의 통창은 두 사람을 연결한 미디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첫사랑이 시작은 되었지만, 그리고 잘 가는 듯싶더니만 둘은 끝내, 아니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개의 첫사랑이 그러하듯 기승전 결론은 실패라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저는 가왕 조용필 씨가 부른 명곡 '킬리만자로의 표범' 중반부의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이란 가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장 잘 정의한 카피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문학가나 예술가가 사랑을 이보다 정확하고 실감 나게 표현했을까요? 물론 남녀간의 에로스적 사랑에 한정해서 겠지요. 숱한 사랑의 글(lyric)을 써댄 작사가 양인자 씨의 사랑에 대한 사자후로 들립니다.


제가 그때 소녀를 처음 본 그 화실과 그 안 통창은 이후 제물포역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과연 과거의 추억을 누릴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부동산 개발 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꼭 사랑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사라진 과거의 장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파리에선 2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돌아와도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 로버트 드니로와는 달리 저는 더 늙어서도 딱히 그곳에 갈 일도 없지만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이 든 로버트 드니로가 어린 제니퍼 코넬리를 훔쳐본 그 벽돌 틈새 구멍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미디어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그 틈에서 가장 아름다운 훔쳐보기가 일어났습니다. 영상 속 어린 데보라도 아름답지만 그녀의 발레를 둥실 띄워주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서정적인 데보라 송은 또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라모폰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클라리넷의 주 저음과 그 멜로디를 방해하지 않고 다소곳이 뒤에 조용히 따라만 가는 트롬본 소리.. 춤추는 데보라가 클라리넷이라면 훔쳐보는 누들스는 트롬본입니다. 보고 듣는 우리도 따라서 같이 과거로 갑니다. 잊고 있었을지 모를 훔쳐보기의 과거로.. 우리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딘가로..


일명 데보라 송에 맞춰 춤을 추는 데보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년


(위의 데보라 송의 OST와 장면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유튜브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라고 입력하면 곧바로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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