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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09. 2021

역(逆) 귀소본능

남자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초반부에 러셀 크로가 열연한 막시무스 장군은 전장을 방문한 로마의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간청을 합니다. 2년 264일간 집에 못 가고 야전을 누볐으니 이제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당시 그가 맡고 있던 전장은 게르마니아 지역 로마의 북동부 국경선인 다뉴브강 유역 국경 도시 빈도보나 지역으로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그가 나중에 검투사로 팔리며 스페냐드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그의 집은 로마 제국의 영토 중 오늘날 스페인 지역인 히스파니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집에 가고픈 것은 귀소본능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름다운 부인과 그를 닮은 아들은 그의 그런 본능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정작 그가 그토록 가고팠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불에 타 재가 되어 있었고 그토록 보고팠던 가족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뒤였습니다.


저 멀리 집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귀소본능(歸巢本能)은 본래 동물에 한정합니다. 새가 새집에 돌아온다는 이 본능으로 인해 집을 떠나 멀리 나갔던 꿀벌과 개미도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오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언덕배기 쪽을 향하고 죽습니다. 이런 귀소본능의 대명사로 불리는 동물 중에 우리는 연어를 꼽고 있습니다.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지만 넓은 바다로 나가 4년을 보낸 후 다시 그가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란을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태어난 집에 돌아와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무서운 귀소본능입니다. 연어의 몸은 산란을 위해 마지막 용을 쓰고 죽느라 망신창이가 되어도 그래도 귀소해서 죽는 것이 편안하다 여길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고 자연의 순리일 테니까요.


인간도 동물이니 귀소본능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멀리 여행을 떠나도, 비즈니스 출장을 가도, 타 지역 근무를 해도, 유학을 가도,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해도, 그리고 매일매일 해가 질 때도 인간은 집에 돌아오거나 돌아오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귀소할 곳이 없는 인간은 불행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때론 그 사람이 강하게 잡아당겨서 그 본능이 더욱 세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겠습니다. 단지 장소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서두에 등장하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 장군은 집이라는 물성도 작용했겠지만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인성이 더 크게 작용한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에서 그는 상황이 긴박하게 변해 귀소의 목적이 보고픈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 죽음에서 구해내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집으로 달려갑니다. 오늘날로 치면 오스트리아에서 게르마니아인 독일, 갈리아인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까지 한달음에 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그를 미워하는 신의 방해로 10년에 걸친 표류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고국인 이타카로 돌아왔습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소설 '이노크 아덴'에서 주인공인 동명의 그도 항해를 나가 난파를 당해 죽을 고생 끝에 초췌하게 변한 모습으로 영국의 해안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집을 떠났던 히스클리프는 미우나 고우나 그가 자랐던 폭풍의 언덕 언쇼가로 다시 돌아옵니다. 모두 다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물론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가 그러하듯 이들에게도 귀소본능을 더 촉발시키는 동기들은 다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겐 후대에 에게해의 진주라 불리는 정절의 왕비 페넬로페가 있었고, 이노크 아덴에겐 그 사이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와 재혼한 애니가 있었으며, 히스클리프에겐 그녀의 결혼 유무와 상관없는 불멸의 사랑 캐서린이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돌아가고픈 곳이 태어난 고향이나 애인과 가족이 있는 곳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인생을 살면서 여러 곳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거친 곳 중에서도 잊지 못하고 돌아가고픈 곳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곳들은 과거의 장소이고 대개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된 곳이기에 '한 번쯤'이라는 단서를 붙이며 그곳을 가고파 합니다.


그중 학교는 그러한 곳들의 대표적인 장소일 것입니다. 일단 정규 대학 교육까지라면 15년 이상을 보낸 곳이기도 하거니와 졸업한 학교는 초중고대 모두 모교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강한 유착과 끌림을 가진 곳이니 말입니다. 신체가 성장했던 유년기, 사고까지 성장했던 청소년기의 상당한 시간을 보낸 곳이기에 그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는 공부도 공부지만 평생을 함께 갈 교우관계가 형성된 곳이기도 해 부가적인 의미도 큰 곳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고픈 곳이 또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요?


거의 남자에게 한정되겠지만 저는 그런 곳으로 군대를 뽑습니다. 아, 아재는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그곳은 가장  혈기왕성한 젊은 날 집 떠나 2년 이상을 보낸 곳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곳이지요. 참 이상하지요? 꿈을 꾸어도 군대꿈은 악몽으로 치부되고 소변을 봐도 과거 군생활을 했던 부대 방향으로는 안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시절을 미워하면서 그곳을 궁금해하니 말입니다. 군대가 체질이란 소리를 듣던 남자도 "다시 군대 갈래?"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손사래를 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제대 후 남자들은 한 번쯤은 그곳에 가고 싶어 하고 실제 많은 남자들이 그곳에 다녀오곤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치 죽기 전 꼭 가야 할 곳 버킷리스트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실제 일반인들의 글이 올라있는 카페나 블로그엔 많은 남자(아저씨, 할아버지)들이 아들이나 손주 등 가족을 동반하여 그곳으로 소풍이든, 여행이든 바람을 쐬고 왔다는 글들이 심심찮게 발견됩니다. 제 주변에서도 다녀온 친구들이 많이 있고요. 가히 역(逆) 귀소본능이라 할 만큼 이상한 귀소본능입니다.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곳인데 가고 싶다 하니 말입니다. 요즘은 육군의 경우 18개월로 복무 기간이 단축되어 제 시절과 정서가 많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부대 정문. 백골 두상이 그때보다 작고 귀여워졌습니다.


저도 비로소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과거 편지 겉봉에 숱하게 썼던 강원도 철원군 서면 자등3리 사서함000... 지난 주말을 낀 연휴에 20대 초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던 그곳을 다녀온 것입니다. 정확히는 부대를 들어갈 수 없기에 정문 앞에서 담장 따라 부대 외경을 보고, 부대 주변 당시 익숙했던, 흔히 면회촌이라 불린 동네들을 둘러보고 온 것입니다. 개별로 모교를 가더라도 알던 선생님들이 학교에 안 계시면 교정과 담장 주변만 돌고 오듯이 말입니다.


그곳은 그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주목할만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전방 지역이므로 개발이 활성화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겠지요. 시간을 단축하게 해주는 넓은 도로만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혹시 다음에 한 번 더 갈 일이 있다면 그땐 근무일에 정식으로 면회를 신청하여 부대 안까지 들어가 현역병들을 격려하고 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엔 바람을 타고 부리나케 다녀왔습니다. 이 부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TV 뉴스까지 나온지라 혹여 사라지기 전에 그곳으로의 귀소를 서둘러야만 했으니까요.


폭양이 내리쬐는, 백설이 휘날리는

아아아아 울고 넘던 성동고개..


트로트의 가사에나 어울릴 법한 이 묘한 라임은 제가 근무했던 부대의 군가 도입부입니다. 실제 노래도 트로트의 리듬과 멜로디를 차용하여 다소 흥 있게 전개됩니다. 소대 규모의 부대가라지만 군악대라서인가 좀 다르게, 흔히 얘기하는 뽕 필을 넣어서 만든 그 노래를 저는 그곳에서 복무했던 27개월 내내 불러댔습니다. 강산이 네 번여 바뀌었지만 지금도 이 노래의 멜로디는 제 귀에 선합니다. 물론 그 시절 장면도 제 눈에 선합니다.


백골공원에 세워진 백골부대 창설 60주년 기념비와 부대 심벌, 부대 마크


사진에서 보듯 제가 복무했던 부대는 백골부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보병 제3사단입니다. 부대 창설 60주년 기념비와 부대 마크와 심벌인 백골 상징물이 있는 저곳은 위 군가에도 등장하는 강원도 철원의 성동고개 중턱에 조성된 백골공원입니다. 과거 지명으로 신수리에서 와수리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위치한 고개인데 이 성동고개는 미아리고개나 추풍령처럼 철원, 김화 지역에선 뭔가 사연이 많이 서린 고개 같습니다. 기념비가 있는 것은 물론 노래에 나오듯 제가 속한 부대원들이 그 고개를 탄식하며 울고 넘었다니 말입니다.


하긴 전쟁이 없던 제가 복무했던 시절에도 여름엔 찌는 듯한 더위와 잦은 빗속에 내내 제초와 마사토 작업으로, 겨울엔 살을 에이는 한파와 폭설로 내내 석탄에 흙을 개어 때는 빼치카 난방과 제설 작업으로 긴 날을 보내야만 했으니 그럴만했습니다. 바깥 세상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고도 할 수 없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작곡뿐만이 아닌 사단의 일개 소대급 단위의 부대가의 가사치곤 대단한 작사입니다. 그 옛날 부대원들의 사연 서린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된 듯합니다.


제가 그곳을 방문했던 날은 10월 1일 국군의 날 이틀 후였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나름 의미도 연결되었네요. 사실 백골부대는 그 의미에 딱 부합하는 대단한 부대입니다. 바로 우리나라 국군의 날을 제정하게 한 부대이니 말입니다. 통상 국경일이라면 그 주체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여 제정하지만 국군의 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1950년 6.25 동란 때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이 반등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으로 치고 올라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게 되는데 그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부대가 백골부대였습니다. 건군일이 아닌 전쟁의 역전이 시작된 10월 1일 그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 된 것이지요. 그런 전통으로 인해 백골사단은 대대로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이 부대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파랗고 공활한 하늘 아래 널찍하게 잘 빠진 새 길로 서울에서 광릉, 일동, 이동을 거쳐 철원으로,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오는 길의 좌우 수려한 낙엽 전 가을 풍광은 보너스였습니다. 그땐 오가는 교통수단이 먼지 풀풀 나는 흙길의 시외버스라 그런 시원한 여유는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통도 교통이거니와 휴가 때는 집에 가는 귀소의 즐거움으로, 복귀 때는 부대 들어가는 귀대의 슬픔으로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부대 갈 땐 설렘 속에 즐거웠으며 집에 올 땐 마치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속이 개운하고 후련하였습니다. 이렇게 귀소본능의 해소는 이래저래 즐거운 일인가 봅니다. 그래서 "다시 군대 갈래?"하면.. 아, 그건 저 역시도 아니올시다지요.


이 글을 빌어 학창 시절 국군 장병 아저씨께 보낸 위문편지에나 쓰고 이후 한 번도 한 적 없는 글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상 국군의 날 특집이었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국군 장병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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