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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30. 2021

미국의 주인이 된 사람들 <상>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청교도들은 천신만고 끝에 북미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1565년 그 땅엔 이미 유럽인이 세운 백인들의 도시까지 있었습니다.



세계화(Globalization)


시간은 1996년 1월로 기억되는 일입니다. 장소는 과거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12층에 있던 상의클럽으로 기억됩니다. 현재 남대문 옆 동명의 건물은 당시 건물을 헐고 현대적으로 확장 증축한 것입니다. 꼭대기 식당 상의클럽의 상의는 상공회의소의 약자입니다. 클럽은 요즘과 달리 그때엔 유명 식당의 이름을 보증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인지되었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이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모임의 성격도 강한 곳이다 보니 클럽엔 그런 사교적 기능을 더 추가했습니다. 운영도 소수의 멤버십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생각나는 유명한 클럽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위의 상공인들을 위한 상의클럽과 옛 한국일보 건물에 있었던 송현클럽, 그리고 아직도 유명세를 가지고 운영되는 남산의 서울클럽과 언론회관 내 프레스클럽 등이 있습니다. 이런 클럽들은 더 옛날엔 구락부란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지금은 클럽 하면 젊은이들의 음악과 춤을 즐기는 곳으로 연상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일개 대리 신분의 제가 그날 어울리지 않게 상의클럽을 간 이유는 그해 영어 어학연수로 선발된 두산그룹 직원들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상견례를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임의 호스트는 그룹 내에서 YS로 불리는 당시 오비맥주 회장이셨습니다. 그룹 오너로 상공회의소 일도 보던 그분이 소속 기업의 젊은 직원들이 이역만리를 간다 해서 격려차 근사한 점심을 사주기 위해 소집한 것이었습니다.


1993년 역시 또 YS라 불린 대통령이 문민정부의 수장으로 취임하며 내건 일성 중의 하나는 '세계화'였습니다. 1988년 올림픽을 무사히 마친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매해 두 자릿 수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급속히 선진국의 문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올림픽 슬로건이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던 만큼 이미 세계화의 기운은 그전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올림픽을 마치자마자 이듬해 곧바로 세계여행 자유화를 허용한 터였습니다. 이제 기업이나 관공서들은 세계화 교육을 실시하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세계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 임직원들을 세계로 내보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광고회사 오리콤이 속한 두산그룹에서도 연수원에 직원들을 모아놓고 순차적으로 세계화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이전에 없던 교육이니, 그리고 우물 안에서만 살아왔던 우리이기에 세계화에 대한 교육 매뉴얼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세계화란 용어부터 세계화이니 만국 공통어인 영어로 써야 하는데 이것을 seigeihwa로 써야 할지 worldization, globalization, 또는 globality로 써야 할지 이런 기초적인 것부터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조직에 속한 직원들은 신이 났습니다. 나라 전체가 호황인 상태에서 해외 연수나 출장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니까요. 배낭여행, ELS, MBA, AMP, 지역 전문가 프로그램 등 각 기업체에서 기업 돈으로 많은 연수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진행되었습니다. 위의 상의클럽 모임도 그 일환으로 영어 기초 교육 프로램인 ELS 연수 대상자들을 위한 모임이었고, 저 포함해서 각 계열사에서 온 수십 명의 직원들은 그 해 미국 전역에 있는 각 대학에서 2달여간 영어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매우 잘 사는 나라가 됐다고 생각했으며 해마다 이렇게 해외로 기업 연수든 여행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샴페인이 터진 것입니다. 위의 연수는 1996년의 일이니 대한민국이 대폭발한 IMF까지는 이제 고작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플로리다(Florida)


플로리다 중북부 지도, 멜버른 & 세인트오거스틴 (출처. 구글)


저의 연수 목적지는 플로리다주의 플로리다공대(FIT, Florida Institute of Technology) 부설 ELS(English Language School)였습니다. 그 학교는 디즈니랜드로 유명한 올랜도에서 동남부로 차로 1시간 거리 해안 소도시인 멜버른에 있는데 플로리다 닮은꼴인 우리나라로 치면 강릉이나 속초 정도에 위치합니다. 사실 처음 연수 지역을 통보받았을 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시골로 배정받았기에 그랬었습니다. 뉴욕이나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 익히 들어본 미국의 대도시 학교로 가는 동료들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난생처음 미국을 가는 것이라 그런 들어본 큰 도시들을 가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사실 여기서 영어라는 어학 교육은 부차적으로 밀립니다. 가서 2개월 배운다고 해서 평생 해도 안 느는 영어가 과연 얼마나 늘겠습니까? ELS가 핵심 교육 프로그램이지만 그보단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현지 적응력을 키우는 것이 세계화 교육의 더 큰 목적이고 기대효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내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리프레쉬를 겸한 출국..


그런데 플로리다에서 도착해 생활하며 저는 그곳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매우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살면서 언제 미국인들도 이국적이고 팬시한 지역으로 여기는 플로리다를 가보겠습니까? 이런 기업 연수 기회가 아니면 그곳에 제가 갈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후 25년여를 더 직장 생활을 하였지만 예상대로 제가 플로리다에 갈 일은 없었습니다. 업무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가기엔 너무 멀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들기에 엄두조차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후 미국의 대도시들은 비즈니스 출장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해서 갈 일들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1996년 플로리다로 배정받은 것은 저에겐 아주 잘 된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계화 정책으로 국가와 기업은 IMF를 맞아 어려움에 처했지만 개인적으론 글로벌화되는 여러 혜택을 받았기에 이와 연관한 두 YS 분께 이 글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마이애미와 최남단 섬 키웨스트를 잇는 교량 중 가장 긴 세븐 마일 브릿지. 옆은 사용 않는 과거의 기차 철교


2개월 ELS 커리큘럼은 지역과 학교가 어디든 다 동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과 후와 휴일은 달랐습니다. 제사는 같아도 잿밥은 지역마다 달랐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곳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방과 후엔 근처 그림 같은 바다인 코코아 비치를 수시로 나갔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골프도 입문하였습니다. 물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뿐만 아니라 당시 해외로 나간 거의 모든 기업의 연수생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만만치 않지만 그 당시 골프는 국내에서는 시작하기가 비용과 부킹 등의 여건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 때였으니까요. 당시 그곳 시영 골프장의 그린피는 카트 포함 15불에 불과했습니다. 과연 골프천국  플로리다, 국내 가격의 1/10도 안 되는 가격이었습니다.


주말에는 지근거리인 올랜도나 케네디 우주센터, 그리고 플로리다의 가장 큰 도시인 마이애미와 미국 최남단 섬인 키웨스트도 다녀왔습니다. 중간 방학 때는 고교 친구가 유학 와있던 조지아의 애틀란타와 테네시의 낙시빌까지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입국할 때와 출국할 때는 뉴욕과 로체스터에서 유학하는 대학 친구에게 들러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 캐나다의 토론토, 몬트리올, 퀘벡까지 다녀왔습니다. 촌놈의 첫 번째 미국 방문치곤 화려한 여행이었습니다. 미국 동부의 남쪽과 북쪽을 다 훑었으니까요. 똑같이 주어진 비용으로 국가 시책인 세계화 교육 취지에 십분 호응하는 연수를 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세인트오거스틴(St. Augustine)


1513년 플로리다에 최초로 상륙한 스페인 탐험가 폰세 데 레온이 찾고자 했던 세인트오거스틴의 젊음의 샘


이때 가본 플로리다의 도시 중 제가 특히 주목한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세인트오거스틴이라는 곳입니다. 제가 있던 멜버른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20km, 2시간여 거리에 잭슨빌과 카 레이싱으로 유명한 데이토나 사이에 있는 오래된 도시입니다. 저는 그 도시가 그냥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플로리다주에서, 아니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막상 가서야 알았습니다. 미국스럽지 않은 고색창연한 스페인풍의 아름다운 그 도시는 스페인 초기 정착민들이 건설한 도시였습니다. 1513년 스페인 사람들이 플로리다에 처음 들어왔고 이후 이주민들이 늘면서 1565년 세인트오거스틴이라는 최초의 유럽형 백인 도시가 북아메리카에 건설된 것입니다.


당시 거기에서 저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저의 그간 배움과 지식과 상식이 다 동원된 인식은 최초 미국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영국의 청교도(Puritan)들이고, 종교의 박해를 피해 그들 102명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북미 신대륙에 와서 갖은 고생 끝에 오늘날 미국을 있게 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럼 이들은 누구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보다 무려 100년도 넘게 일찍 미국에 왔고 이렇게 멋진 도시까지 세웠으니 말입니다. 미국사에 대해 지금보다 더 무식했던 당시에 들었던 저의 의구심이었습니다. 성공회로부터 박해받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으로 온 유럽 문명인들로 그때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신세계(New World)


아메리카 신대륙에 최초로 상륙하는 콜럼버스, 디오스코로 테오필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1862


1492년 이탈리아인 콜럼버스는 에스파니아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공식적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둥그므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도 인도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가서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오늘날 카리브해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들어선 한 섬에 도착했는데 그는 그 섬을 물주인 에스파니아 국가 이름을 따서 히스파니올라라 불렀습니다. 1497년 이탈리아계 영국인 존 캐벗은 오늘날 캐나다 땅인 신대륙 북부인 뉴펀들랜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499년 피렌체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에 도착해서 브라질까지 탐험하고 돌아와 그곳이 아시아가 아니고 신대륙이라고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때부터 신대륙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의 아메리카가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그 땅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그곳을 끝까지 아시아라 주장하여 그가 발견한 신대륙의 이름을 애먼 사람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이 초래한 막심한 손해였습니다. 거리 계산을 잘못한 결과였습니다. 하필이면 그가 인도가 나타날 거리라고 생각한 지점에 아메리카가 나타나서 그는 끝까지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은 오늘날 서인도제도가 되었습니다. 만약 콜럼버스가 그곳을 미지의 신대륙이라 공표했다면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은 콤럼버카, 또는 콜럼버시아라고 불릴지도 모릅니다.


1605년 프랑스인 샹플랭은 후에 플리머스라 불릴 북미의 항구를 탐사했습니다. 이전 16세기 100년 간에도 위에서 기술한 플로리다를 비롯한 미국 동남부에 숱한 유럽인들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1607년엔 영국 최초의 미국 이주민이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주에 정착촌을 건설했습니다. 후사가 없던 그녀의 왕위를 물려받은 숙적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아들인 통합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이 바로 그곳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배경이 되는 미국 내 최초의 영국인 정착촌입니다.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Plymouth Rock,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이 목적지인 플리머스 하선 시 최초로 밟았다고 하는 바위


그리고 1620년, 드디어 그들이 옵니다. 목적지는 위 프랑스인이 개척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였습니다.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떠난 메이플라워호는 66일 항해 후 항로 이탈로 근처 케이프 코드 곶(프로빈스 타운)에 11월에 도착해 거기서 겨울을 난 후 이듬해 1621년 3월 종착지인 플리머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신대륙 그 땅에서 그해 가을 첫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미국의 뿌리 필그림 파더스와 함께 미국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1630년엔 거주지를 옮겨 지금도 미국의 오랜 전통이 살아 숨쉬는 보스턴을 건설해 당시 그들이 뉴잉글랜드라 불렀던 그 지역의 수도로 삼습니다. 미국 본류 역사의 정통성이 세워지는 과정으로 남쪽 플로리다에 세인트오거스틴이 세워진 후 65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102명 중 실제 청교도 신자는 3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중 선원도 약 30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일반 이주를 희망하는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절반은 불행히도 도착 첫 해 겨울에 한파와 기아로 사망합니다. 남은 50여 명이 미국의 첫 주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3억 3천만 인구 미국 국민 족보의 최상단에 위치한 유대인의 아브라함과 같은 선조가 된 그들입니다. 이후 1776년 필그림 파더스의 후예인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 다윗이 사울왕의 박해를 피해 유대왕국으로 독립하였듯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아메리카합중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그 땅 신대륙에 세우게 됩니다.


제 상식으론 다소 의아한 사실입니다. 1620년 그때엔 이미 위의 세인트오거스틴 사례에서 보듯 유럽 여러 국가의 많은 정착민들이 신대륙에 들어와 있었을 텐데 뒤늦게 들어와 불과 50여 명으로 시작한 이들이 미국이라는 대국의 뿌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디든 사람과 세력이 모이는 곳이면 그곳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쟁탈전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먼저 선점한 기득권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반발합니다.



※ 윗 글은 뉴스버스  2021. 1030. 0952에 게재된 칼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편은 1주 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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