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May 27. 2021

알프스에서 한니발을

4년 전 이맘때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당시 우리에겐 눈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저를 포함한 포스코 광고대행사의 담당자들이고 눈은 당시 광고에 꼭 필요한 소품이자 배경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공장 이야기로 오늘 글을 시작합니다. 저의 본업이 광고이니까요.


 2018년 2월에 개막한 평창 동계올림픽을 주제로 하는 포스코 TV 광고의 시안이 결결정된 것은 전년도 10월 말이었습니다. 철(Fe)이 거의 다 들어가있는 동계올림픽의 21개 종목을 광고에서 표현하려니 응당 눈과 얼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중 눈, 그것도 많은 눈이 있는 설원은 스키, 바이애슬론 등의 경기 종목을 표현함에 필요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많은 눈이 있는 대자연을 찾아야 했습니다. 스케이트, 봅슬레이 등의 경기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얼음은 인공으로 얼려 실내 세트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시월 하순 지구촌에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처럼 그렇게 눈이 있는 곳을 뒤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그 계절에 그 어떤 기우제, 아니 기설제를 지내도 불가능한 자연의 현상이기에 전 세계의 모든 설원이 후보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주어진 자원으로 해결 가능한 최적의 여건의 장소가 최종 촬영 로케이션이 될 것입니다. 펭귄이 있는 남극이나 하얀 곰이 있는 북극은 눈이 쌓여 있어도 가기 힘드니 말입니다.


이런 와중에 들린 희소식, 알프스 산맥에 눈이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4개국이 공유한 유럽 최고봉 알프스 중 이탈리아  알프스상당량의 눈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장소는 이렇게 해결되었습니다. 근접 공항은 이탈리아의 북부 상공업의 중심지 밀라노였습니다.


포스코 동계올림픽 촬영 현장인 북이탈리아 알프스


밀라노 공항에 착륙하여 자동차를 타고 더 북으로 북으로 알프스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사실 산길을 달린다면 모를까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달린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우린 무의식적으로 지도상 북쪽이 위에 표기되어 있어선가 북으로 가면 으레 올라간다고 말하곤 합니다. 경의선 종점인 신의주에서 서울로 북에서 남으로 와도 상경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알프스 산악지대로 가는 것이니 딱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올라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5시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지정된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도착한 광고대행사와 프로덕션의 제작 스탭이 저와 동행한 광고주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탈리아 현지 스탭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프로젝트에 동원된 모든 인력들은 등산을 하러 알프스에 온 것이 아니기에 설원 위의 텐트가 아닌 산 아래 형성된 보르미오라는 아름다운 소도시에 베이스캠프를 차렸습니다.


아마 보르미오 이곳은 먼 옛날 고대로부터 거산이요 악산인 알프스를 넘나드는 상인들이 이 마을에서 넘기 전 쉬거나, 넘어와서 쉬며 발전한 중간 기착지일 것입니다. 배정 받은 방에 들어와 여장을 풀고 호텔 창문을 여니 저 멀리 위로 알프스 설산의 비경이 보였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의 과거 상인들도 이곳에서 이렇게 산을 바라보며 쉬었겠죠. 로마를 출발해 밀라노나 베로나를 거쳐 이곳 알프스를 넘어 독일의 메르헨 가도 위 브레멘, 뤼벡, 함부르크 등 한자동맹 도시들로 오갔던 그들이었습니다.


멀리 알프스가 보이는 북이탈리아 산악 도시 보르미오(Bormio)


다음날 아침 우리는 촬영지인 고지대 설원을 향해 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리산의 말티고개는 거의 레고 수준의 장난감으로 만들어 버리는 꼬불꼬불한 길이 하염없이 이어져 이번엔 진짜 위로 위로, 과장 좀 더하면 느낌으론 거의 수직 길을 옆으로 옆으로 돌아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산 밑 도시 보르미오에서 직선거리로는 불과 4km 남짓한 거리를 30분 넘게 구비구비 올라가니 비로소 촬영지인 알프스의 하얀 눈이 시원하게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방금 전 올라온 이 길의 이름은 스텔비오 패쓰라 불립니다. 해발 2,757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갯길로 전 세계 바이시클 라이더들의 꿈의 코스로 알려진 고개입니다. 우리나라 최고봉인 백두산의 높이가 2,744m니 고갯길 정상이 딱 그 정도의 높이입니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은 4,807m, 그날은 날씨 때문인가, 거리 때문인가 그곳에선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이탈리아 알프스의 험준한 스텔비오 패쓰(Stelvio pass)


그곳에 오르자마자 제가 떠올린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제목에서 보듯 역사 속 그 사람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4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그 생각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미뤄놨던 숙제를 하듯이 말입니다.     


한니발.. 이름부터 아우라가 풍기는 그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 패권을 두고 3차에 걸쳐 벌린 포에니전쟁의 2차전 영웅입니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그 한니발 아닙니다. 아버지에 이어 27세 젊은 나이에 카르타고 군의 실권을 장악한 한니발은 BC 218년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기 위해 50여 년 전 발발한 1차 포에니전쟁 때와는 달리 지중해가 아닌 알프스를 넘는, 당시로서는 무지막지한 작전을 감행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이름은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2천 년 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2, 181)


그때 그가 제가 오른 스텔비오 고갯길을 통해 로마로 진입했는지는 기록상 찾아보기 힘드나 제 판단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간이 뚫는 길이란 것은 시대와 상관없이 여러 대안 중 가장 편하고 빠른 코스로 개발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으므로 험로이긴 하지만 스텔비오 이 길도 예로부터 알프스에서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하는 그나마 최선의 길로 열렸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록상 한니발의 군대는 16일에 걸쳐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알프스와 함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캐릭터인 그 무거운 코끼리들을 어르다 못해 지고, 이고 매달고 하며 넘었을 것입니다. 등산 중에 당시 알프스에 기거하던 갈리아족과 두 차례의 예상 못한 전투도 펼쳤습니다. 계절은 가을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하였으니 당시 제가 있었던 촬영일인 11월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고개도 험난했지만 산 아래와는 급이 다른 매서운 추위가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경험했지만 서있기 조차 힘들게 한 그 바람의 세기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알프스에서 로마인을 만나기도 전에 한니발은 많은 병력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의 군대>, 하인리히 로이테만, 19세기


사실 제가 이 고대 영웅을 떠올린 포인트는 이렇게 험준한 알프스를 넘었다는 알려진 사실보다는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어긋난 지식이 떠올라서입니다. 흔히 한니발은 2차 포에니전쟁 시 알프스를 넘는 누구도 예상 못한 기습을 감행하여 로마에 승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긋남의 포인트는 ‘기습’이란 표현에 있습니다. 흔히 기습이라 함은 예측불가성이 우선이지만 상대가 준비할 틈이 없는 전광석화 같은 신속성도 갖춰야 비로소 완전한 기습이라 할 것입니다.     


한니발은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 본토가 아닌, 카르타고 기준으로 보면 변방 지배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라 불린 오늘날 스페인에서 활동했고 로마 출정도 그곳에서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오늘날 프랑스인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과 전투를 벌이며 동진을 한 끝에 드디어 로마에 이른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실을 숙지한 로마는 당시 점령지인 프로방스의 마르세이유에 군대를 출정시켜 한니발과의 한 판 대전을 위해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니발은 로마의 예상과는 달리 이곳을 쓰윽 지나쳐 돌아서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도달한 것입니다.     


유럽의 서쪽 끝 스페인에서 코끼리를 끌고, 느린 코끼리와 발 맞추며 이런저런 전투를 하면서 중부 알프스까지 오고, 알프스를 넘는데 16일, 넘어서도 거기서 밀라노까지 오늘날 자동차로 약 5시간, 밀라노에서 고속철로 로마까지는 약 3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니 그 정도의 시간이면 왠지 기습이란 용어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니발 전기를 읽었을 때는 마치 알프스가 로마의 뒷산인양 질풍노도와 같이 침공한 것처럼 묘사하며 한니발을 띄운 것으로 기억됩니다. 즉, 로마는 한니발에게 기습을 당해 반도 이곳저곳이 초토화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전술과 군사력에 의해 피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2차 포에니전쟁도 최종적으로는 로마가 승리하게 됩니다. 한니발이 로마의 칸나에(Cannae) 전투에서는 절정의 대승을 거두지만, 그가 비운 사이 본국 카르타고를 기습적으로 침공한 로마의 맞수 명장 스코피오와의 자마(Zama) 전투에선 결정적 패배를 당함으로써 BC 201년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후대의 사가들은 한니발이 칸나에로 가지 않고 곧바로 로마로 침공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은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아쉬움 속에 그렇게 했더라면 하며 행복한 결과를 상상하는 후손들에게 허무함만을 안겨주곤 합니다.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교훈은 되겠지요.


<칸나에 전투에서의 한니발>, 하인리히 로이테만, 19세기


이후 50여 년 후 3차 포에니전쟁이 발발은 하지만 카르타고는 이전 두 차례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으로 시작하고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 해서는 안 될 무모한 전쟁을 또 일으켜 화를 재촉한 것입니다. 2차 전쟁 후 로마는 한니발 같은 영웅이 또 출현할까봐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로마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대가로 채찍과 당근, 강온정책을 병행하던 로마의 많은 속주들과는 달리 카르타고에는 강한 채찍만 휘둘렀습니다. 로마의 허락 없이는 숨도 쉬기조차 힘들어진 카르타고가 된 것입니다.   

  

그런 탄압의 결과로 역설적으로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경으로 군사력이 안 됨에도 카르타고는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독일에 대한 승전국의 강력한 배상 요구와 적대적 대응이 히틀러 같은 괴물을 출현케 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은 이와 같은 역사의 회전성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과거 지중해를 장악했던 페니키아와 한니발의 후예답게 카르타고는 3년에 걸친 공방 끝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완전 정복 후 카르타고라면 넌더리가 난 로마인들은 도시를 전소시켰으며 그 땅에 생명체가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까지 뿌렸다고 합니다.   


앞선 2차 포에니전쟁은 한니발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만큼 그가 탁월했고 그의 독무대 같은 전쟁이어서 그럴 것입니다. 로마 역사상 이렇게 장화 모양의 본토 반도 전체를 휘젓고 다니며 로마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한 장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한니발 한 사람에 의존했고 로마는 시스템에 의존하는 국가라 최종 명암은 거기에서 갈렸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주요 장수들은 단 한 번의 전투만 빼곤 다 패배하였습니다. 한니발만이 로마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는 국가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귀족들이 앞장 서 전쟁에 참여하고 물자 징발 시 재산을 기부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였습니다. 제국 로마의 힘입니다.     


2차 포에니전쟁의 전황도 (출처. 미상)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와 히스파니아를 로마가 차지함으로써 이제 지중해는 거의 다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육군이 강했던 로마가 포에니전쟁으로 해군까지 강해진 것입니다. 1차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해 카르타고가 전진해있던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은 이미 확보된 터였습니다. 이후 100여 년 후 어떤 로마인이 나타나 역사에서 사라진 요충지 카르타고를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사에서 왠지 그다 싶으면 꼭 나타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이미 갈리아를 정복한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이어서 카르타고 재건을 완료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이집트까지 정복함으로써 이제 지중해는 한 바퀴 빙 둘러 완벽한 로마의 내해가 됩니다.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은 단일 이름을 가진 전쟁 중 역사상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기원 전 264년에서 146년까지 약 12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난 전쟁이니까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포에니전쟁은 1985년이 돼서야 완전한 종전이 되었습니다. 아, 이게 무슨..? 그해 1월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과 지금은 튀니지가 된 옛 카르타고의 수도 튀니스의 시장이 공식적으로 함께 포에니전쟁의 종전을 선언했으니까요.  

    

요즘 우리도 6.25 전쟁에 대한 종전 이슈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로마와 카르타고는 나라의 이름까지 바뀐 후대에 이렇게 종전 선언을 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의 본질이 팩트와 기록이기에 연대기적인 의미 부여를 위해 이런 이벤트 성 종전을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포에니전쟁은 기원전에 시작해 기원후까지 2,131년 동안이나 벌인 디즈니의 마블 유니버스에서나 볼 법한 범 우주적인 긴 전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완성된 포스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TV-CF

          

험지에서 진행한 포스코 동계올림픽 CF는 무사히 잘 촬영을 마치었습니다. 참여한 제작 스탭의 수고와 그 옛날 한니발이 넘었을지도 모를 알프스의 비경으로 걸작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올림픽 기간 내내 그 광고는 설원과 빙상을 달리며 안방과 거실의 TV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저는 촬영이나 연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스탭이 아니었으므로 그곳에서 이렇게 딴생각도 하고 있었네요.ㅎ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