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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ug 07. 2021

감동의 동네 도서관

양재천 근처 동네에 명소가 하나 생겼습니다. 명소라 한 것은 일단 신상인 이곳은 외모도 예쁘지만 그 미모만큼이나 충실한 내부 기능을 갖추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재색 겸비입니다. 전 너무 좋습니다. 일단 운동 삼아 발걸음 가볍게 타박타박 걸어가도 그곳에 도착하니 말입니다. 저희 집에서 3km가 채 안 되는, 도보로는 다소 먼 거리일 수도 있지만 가는 길이 심심치 않아 걸리는 시간에 비해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양재천 수변 산보 길을 따라서 가니까요. 그리고 지자체 치고는 살림이 풍성한 지역이라 그런가 철 따라 수변에 주민들을 위한 볼거리와 편의 시설을 종종 제공해주어 심심할 겨를이 거의 없습니다.


이 동네에서 30여 년 가까이 산 주민으로서 최근 달라진 양재천 트렌드를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과거엔 강남구와 서초구가 경쟁적으로 천과 수변을 가꾸었습니다. 마치 성형 수술하듯이 돈을 붓고 갈아엎어 인공미를 잔뜩 키웠는데 최근엔 그 콘셉트가 자연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개발은 한다 해도 그 가이드라인 안에서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보면 과거보다 확실히 자연의 꽃과 나무와 풀, 맨땅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자연의 이런 자연스러움이 인간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선진국 형 공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양재천 2021. 07. 15

그런 이곳 길을 안락한 기분으로 걸으며 제가 빠지지 않고 들러서 인사드리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언제부터인가 양재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올 봄 제가 출간한 책에서 '양재천에 온 칸트'라는 타이틀로 이 대 철학자와 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해 쓴 글도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 그분 옆을 지날 때면 잠깐 좌로 돌아 문안을 드리고 갑니다. 그 정도면 좀 서서 반갑게 맞아줄 만도 한데 그는 늘 앉아서 부동의 자세로 저를 맞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든 양재천에서든 '변함없음'의 대명사 칸트이니까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도서관입니다. 풀 네임은 '서초구립양재도서관'이라 불립니다. 2019년 11월에 개관했으므로 채 2년이 되지 않은 신상 맞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위에서 제가 외모 자랑한 것이 빈 말이 아니었음을 알 것입니다. 과거 이곳엔 오랫동안 족구 하면 딱 맞을 법한 허름한 테니스장 같은 것이 방치 수준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울타리를 치고 땅을 파더니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을 하였습니다. 도서관 앞 좁은 2차선 길을 건너면 양재천 둑 위로 작은 숲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이곳은 야외 숲 도서관입니다. 이름하여 오솔숲 도서관.. 시원한 숲에서 힐링을 하면서 책도 읽고, 수다도 떨고, 차도 마실 수 있는 보너스 공간이 바로 도서관 앞마당에 있습니다.

 

양재도서관 전경
도서관 건너편 오솔숲 도서관

이 도서관에 한 달 전 처음 왔을 때 전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의 국력을 실감했습니다. 과거 2007년 집사람이 휴직을 하고 어학연수로 미국을 1년간 가있을 때의 생각이 떠올라서입니다. (집사람이란 표현을 쓸 때면 전 늘 불편함이 있습니다. 페미니즘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그분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바깥일을 하고 계신데 예나 지금이나 집에 있는 시간은 제가 더 길어서 그렇습니다.) 흔히 말하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집사람과 아이가 간 곳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한 도시였는데 그 기간 중 저도 그곳을 몇 번 방문했습니다. 땅 넓은 선진국이라 여러 가지 부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도서관도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때 아이 때문에 그 동네 도서관을 갔었는데 그런 도서관이 동네에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딜 가든 필요한 책들이 잘 갖춰져 있고 외국인에게조차 까다로운 제한 없이 무료로 이용하게 하고 있기에 그런 점들이 부러웠습니다. 제 아이는 아마도 그곳보다 아이들을 위해 밤에도 라이트를 켜고 경기를 할 수 있는 잔디 야구장이 동네마다 있는 것을 더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자리 잡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 양재도서관은 그때 본 미국의 동네 도서관들과 시설 면에선 비교도 안 되게 더 좋기에 국력까지 호출하게 된 것입니다. 검색해보니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이런 크고 작은 공공 도서관이 제가 사는 동네 주변인 강남구에는 18개, 서초구에는 11개가 있습니다. 아,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 대단한 대한민국이 된 것입니다. 제가 직접 가 본 또 한 군데 도서관인 근처 '도곡정보도서관'도 좋기로는 또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공공 도서관을 가도 이렇게 좋아졌다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일 듯합니다.


이렇듯 도서관은 우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공공 자산화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맹률이 기본적인 선진화 지표라면 도서관 보급률은 그보다 차원 높은 지표일 것입니다. 물론 도서관을 대하는 정책 입안자나 지도자의 시각에 따라서도 도서관의 질과 양은 달라질 것입니다. 의사 결정권을 가진 누군가가 "잘 지어", 또는 "많이 지어" 하면 그렇게 될 테니까요. 이런 도서관은 저 때만 해도 접근 가능성이 힘든 소수의 점유물이었습니다. 일단 양적인 면에서부터 충족이 안 되었으니까요. 학창 시절 좌석이 많이 모자라 꼭두새벽부터 길게 줄 선 도서관 앞의 전경이 떠오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Library of Alexandria)'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원정 시 주요 점령지에 본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는 도시를 여러 곳 세웠는데 현재는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이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는 알렉산더의 후예들이 멸족했음에도 이 그리스인의 도시명을 계속해서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도시의 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 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건립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학문과 도서관을 대를 이어 사랑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사람들에 의해 이 도서관은 계속 번성했습니다. 보유 장서가 무려 70만 권, 아니 100만 권도 넘었다는 설이 오갈 정도니까요. 고대 전 세계의 모든 지식과 학문의 보고였을 것입니다. 동양의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오늘날 책과는 다른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에 글을 쓴 두루마리 형태의 서적들이 차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그러나 지금 이 도서관은 방대한 서적은 물론 건물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마치 미라처럼 고대 신화 속으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로마인이 이집트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침공 시,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핍박성 화재로 다 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 땅에 그리스인이 퇴장하고 로마인이 입장하기 전 약 2백여 년의 기간만 전성기를 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항구 도시는 도서관처럼 신화 속으로 사라진 불가사의한 유물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바다를 비추던 '파로스의 등대'입니다. 100m도 넘는 큰 등대는 중세 시대에 발생한 두 번의 지진으로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 흥미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2002년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예인 무바라크 대통령은 고대와 같은 이름의 거대한 도서관을 같은 자리로 추측되는 곳에 건립하였습니다. 1500여 년 만에 땅 속에서 도서관이 솟아오르듯 신화를 재현한 것입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도서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학문과 예술에 관한 한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는 정말 오지랖 넓은 그 집안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도서관 역사는 국부라 불리는 코시모에서 시작해 그의 손자인 위대한 자 로렌초를 거쳐 그의 양자이자 조카인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와서 완성이 됩니다. 클레멘스 7세는 '파치 가의 음모' 사건 때 암살당한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입니다. 로렌초는 동생을 끔찍이 사랑해 조카인 그를 거두어 양자로 삼고 본인의 친자인 교황 레오 10세에 이어 그도 교황으로 키웠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교황이 된 것입니다. 아니 로렌초가 만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네요. 가히 메디치의 위세를 실감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완성한 메디치의 도서관, '라우렌치아나 도서관(Laurentian Library)'입니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 도서관 홈페이지

코시모와 로렌초는 고대 그리스와 동방, 그리고 중세 세계의 필사본과 인쇄본에 관심이 많아 이를 수집하고 보급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선대의 컬렉션들이 클레멘스 7세에 이르러 완성된 아름다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 붙어있는 이 도서관은 그가 당대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에게 건축 감독을 맡겨 더 의미 있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사장될 뻔했던 마키아벨리의 명저 '군주론'을 세상에 알리고, 그로 하여금 '피렌체사'까지 저술하게 한 클레멘스 7세의 학문에 대한 관심도로 볼 때 도서관에 대한 열정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피렌체 시민에게 개방을 하였습니다. 공공 도서관입니다.


과거 입시를 준비할 때 저는 대학에 도서관학과라는 것이 있는 것이 좀 신기했습니다. "아니 도서관이 무슨 학문이 되나?"라는 무식의 소치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가본 도서관 중 가장 큰 도서관이 동네에 있던 인천교육대학 도서관이었기에 나올 수도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도서관은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를 기준으로 과거와 현재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학문을 보관하고, 유지하고, 공급하는 곳이므로 수준 높은 전문성이 없으면 그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제대로 유지되기 힘든 장소일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든,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수집하고, 필사하고, 분류하고, 보관하고, 보급하는  많고 복잡한 일을 수작업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규모가 작은 학교 도서관이나 동네 도서관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선 도서관학은 1887년 미국의 석학 존 듀이에 의해 콜롬비아 대학에 처음으로 학과가 창설됩니다. 그러다가 90년대 들어 이 학문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문헌정보학이란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습니다. 양피지, 파피루스, 종이에 이어 컴퓨터라는 저장소가 생겼기에 세상의 추이에 맞추어 그렇게 변하였습니다.


양재도서관은 대학 졸업 후 국내에선 구경하러 간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을 제외하곤 처음으로 오게 된 도서관인데 이곳이 저의 기존 인식과는 다르기에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네 도서관에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의 의회도서관을 간다 해서 이런 감동을 받을까요? 동네 주민을 위한 작은 공공 도서관이고 제가 실제 이용자이기에 오는 감동이겠지요. 따지고 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전 이상한 사람입니다. 아니 한심한 건가요? 도서관을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오다니요! 쳇바퀴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샐러리맨의 인생에 도서관이 끼어들 틈이 없어서 그랬다면 핑계가 될까나요? 도서관을 겸한 자료실이라 불리는 곳은 회사에도 있으니 굳이 올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핑계 아닌 핑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도서관을 갑자기 왜 오게 되었을까요?


* 이 글을 쓴 서초구립양재도서관은 서초구에 본사가 있는 KCC 그룹의 정몽진 회장이 힘을 보탰네요. 민관합작으로 명품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KCC가 내세우는 친환경 소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훌륭한 시설을 옆 동네 구민임에도 출입 제지 없이 무상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그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양재도서관 출구에 있는 명판


위의 글은 뉴스버스  2021년 8월 7일 09시 20분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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