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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04. 2021

올댓 아비뇽 유수 - 3

All That Avignonese Captivity

<3> 메디치의 출현 / 아비뇽의 와인 / 아비뇽의 오늘



역사는 재미있습니다. 때론 신기할 정도로 말입니다. 시간이라는 줄 위에서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듯 줄과 함께 이어지며 그 연속 선상에서 어느 시점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사건과 인물을 출현시키니까요. 아비뇽 유수에 이어진 서방교회 대분열 시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앞의 내용 중 끼어들기가 마땅치 않아 이렇게 따로 끌어내어 소개드립니다.


다시 대립교황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대립교황 중 피사의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는 적통의 교황을 새로 선출한 콘스탄츠 공의회 결과에 불복하여 감금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때 그는 역사에 홀연히 등장한 피렌체의 거상 조반니란 인물에 의해 석방이 됩니다. 그가 영어의 몸이 되어 볼장 다 본 그 교황을 위해 자그만치 3만 8천 플로린을 지불해서 풀려난 것입니다. 돈은 지금으로 치면 150여 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라고 합니. 사업이 흔들릴 만큼 큰돈인 그 돈을 조반니는 요즘으로 치면 상환이 막막한 무담보 무신용으로 대출해준 것입니다. 끈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끈이 아예 없어진 전임 대립교황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대체 누구이길래, 그리고 왜 이런 모험적인 일을 벌인 것일까요?


그의 성, 라스트 네임은 메디치입니다. 아, 메디치.. 그러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조반니 메디치, 그가 누구입니까? 르네상스의 대문을 열어 피렌체를 역사의 중심지로 만든 메디치 가문의 350여 년 역사 족보의 맨 꼭대기에 등장하는 메디치의 시조 아닙니까? 그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메디치 시대를 연 조반니 메디치 (1360-1429)


그의 아들은 국부라 불리는 코시모 메디치이고 증손자는 위대한 자라 불리는 로렌초 메디치입니다. 우리 역사 이씨 조선으로 치면 조반니는 태조 성계이고, 코시모는 태종 방원이며 로렌초는 세종 입니다. 르네상스를 휘어잡은 메디치가의 역사는 이렇게 중세 아비뇽 유수의 끝자락에서 대립교황과 연결되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그 가문의 이야기가 자자손손 또 한 보따리 서양사에서 펼쳐지게 되겠지요. 그로 인해 서구 역사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메디치 시대의 개막,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조반니의 이 과감한 선택, 통 큰 투자였습니다. 대립교황 석방 사건으로 그 신용과 의리에 감동받은 로마의 교황은 메디치가를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삼아 그 가문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니까요. 메디치가는 한 술 더 떠 교황의 명부에서도 삭제된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영묘까지도 큰돈을 들여 화려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시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겉으론 그것을 반대했지만 속내는 달랐을 것입니다. 가재는 게 편,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아비뇽 유수 시 이렇게 종교와 연계된 정치적인 사건들만 발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사람 사는 세상엔 그런 일들만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들만 기록되는 것이지요. 그렇듯 아비뇽 유수 시 후세의 우리까지도 즐겁게 해주는 어떤 것이 하나 탄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와인입니다.


교황청이 들어섰으니 주변에 와인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와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를 상징해 미사주로 쓰이지만 파티와 축제의 술로도 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뿐만 아니라 디오니소스 신의 축복도 그 땅, 아비뇽에 내려진 것입니다. 일단 아비뇽의 첫 교황인 클레멘스 5세부터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 마니아였습니다. 그는 보르도 대주교 시절 지금까지도 '샤토 파프 클레망(Chateau Pape Clement)'이라 불리는 유명 포도밭과 와인 브랜드를 소유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전 아비뇽에서는 그가 원하는 와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비뇽 2대 교황인 요하네스 22세는 아비뇽 북부 론강 남부의 조그만 마을에서 드디어 교황청이 원하던 퀄리티 있는 와인을 찾게 됩니다. 주요 포도 품종이 그르나슈(grenache)인 와인으로 그것이 오늘날 론 와인의 대명사이자 교황의 와인이라 불리는 '샤또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의 시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와인이지요.


멀리 론강이 내려다 보이는 샤또네프 뒤 파프 와이너리 (Chateau de la Gardine)
수확기 탐스러운 포도송이들
까브에서 고이 잠자고 있는 미래의 샤또네프 뒤 파프


말 그대로 교황을 위한 와인인데 이름에 들어간 네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불어 네프(neuf)의 뜻이 하필이면 새롭다(new)와 9(nine) 두 가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황을 위한 새로운 와인도 되지만 9명의 교황을 위한 와인이란 설도 내려옵니다. 그런데 위에서 보듯 아비뇽 유수 기간 근무한 교황은 7명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 2명의 교황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대립교황입니다. 아비뇽 유수가 끝나고 교황이 로마 바티칸의 제자리로 원복했음에도 그것에 불응하고 아비뇽 교황청에서 여전히 선출하고 임무를 본 프랑스인 교황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비뇽엔 총 9명의 교황이 있었기에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이제 아비뇽 유수는 도시를 관통하는 론강의 유수처럼 시간에 밀려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득한 옛 일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시는 유수도, 분열도 없는 화합과 자유로움만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축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1947년 연극으로 시작한 아비뇽 페스티벌은 세계적인 종합예술 축제로 자리 잡아 해마다 7월이면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관객들을 이 도시로 몰려들게 합니다. 저는 추석 연휴 기간을 끼고 휴가를 내어 프로방스를 여행했던 터라 이 축제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축제의 원조가 된 주요 무대는 아비뇽 교황청의 안 뜰입니다. 제가 본 어둡고 답답하게 막힌 그 공간이 축제의 스포트 라이트가 비치는 메인 무대라니요! 화려한 축제의 기간에 다시 또 갈 날을 기대해봅니다. 그땐 아비뇽에 대한 제 인식도 확실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때 교황청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이미 제 인식은 어느 정도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를 변심하게 한 것은 교황청 앞 좁고 붐비는 시장통의 라벤더였습니다. 다양한 라벤더 상품이 온통 그곳을 채우고 있어 그 향에 아니 취할 수 없었으니까요. 과연 프로방스.. 그곳에서 저는 조그마한 라벤더 꽃자루를 몇 개 샀습니다. 그 라벤더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아직도 제게 있습니다. 제가 어딘가로 달려갈 때 아직까지 살아있는 그 향은 늘 저와 함께 동행합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제 차 안 4개의 문짝 아래 홈엔 그 라벤더 꽃자루가 사방 하나씩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아비뇽의 향입니다. 참으로 예쁘고 전원적이며 낭만적인 동시에 우아하고 담백하면서 고상하게, 때론 동화처럼 때론 그림처럼 아련하게 들리고 보이는 그곳의..


아비뇽의 향, 라벤더 꽃자루


아비뇽 다리 위에서 우리는 춤을 춘다 춤을 춰

아비뇽 다리 위에서 우리는 춤을 춘다 둥글게

멋진 남성들은 이렇게 인~사, 또 한 번 더 이렇게 인~사

(아름다운 여성들 / 군인들 / 농부들 / 세탁하는 사람들 / 와인 재배자들 / 제빵사들 / 정원사들..)


아비뇽의 유명세를 더하는 프랑스의 흥겨운 전래 동요입니다. 론강 위에 놓인 아비뇽 다리는 앞에서 설명드린 끊어진 성 베네제 다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 노래를 거의 다 안다고 합니다. 얼마나 유명하면 요즘 우리나라 초등학교 2학년 음악 교과서에 개사한 이 노래가 나올 정도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려운 아비뇽 유수보다 쉬운 아비뇽 다리로 그 도시를 먼저 알게 되겠네요. 위의 원곡의 가사는 아비뇽에 사는 시민들이 모두 다리 위로 나와 돌아가며 인사하는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렴만 다르게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같은 멜로디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겠지요. 들어보니 꽤나 중독성이 있습니다. 왠지 노래하며 "난 이런 사람이야"를 표현하는 인사 율동도 하면서 부를 듯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화합과 자유로움이 충만한 축제의 도시 아비뇽입니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 동명의 노래와 춤을 즐기는 아비뇽 시민들

※ 윗 글은 뉴스버스에 2021. 0904. 1532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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