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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Nov 25. 2018

육식조선 肉食朝鮮 00

이야기로 남은 사람들

최정보 崔正報


“스승님... 약속해... 주세요....”

“그래... 말하거라.”

“잊히면 안돼요.... 글로 남겨... 주세요... 황이와... 난설... 그리고 제 이야기를... 써 주세요...”

“그래...”

“스승님...”

“그래.”

“살고... 싶어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죽을 것이며, 그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고 싶다 말했다. 스스로 택한 길이었고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죽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고.싶.다.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중 가장 건 죽을 때까지 육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심 달린 몽둥이로 때리고, 불로 지지고, 살점을 떼어 내고, 뼈를 부러뜨리고... 그리하여 마지막 한 점 살점에 이르기까지 도달한 고통으로 인해 영혼이 육신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가장 잔인한 형벌. 그가 그랬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지경까지 갈기갈기 찢겼는데도, 그는 살고 싶다 했다.    

  

“그래... 살거라...”

“...”

“죽지 않을 것이다... 넌...”

“...”

“내가 널... 살릴 것이다...”

“...”     


가슴 속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참으로 아름다웠던 젊은이가 그렇게 죽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육식동물처럼 그를 찢어발겼고 그는 곧 죽을 것이었다. 난 그저 그 죽음을 마주 보며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능한 어른으로서의 좌절감으로 인해 유황 불구덩이가 어울렁거리는 깊은 심연을 향해 던져진 기분이었다.  순간 알았다. 죽는 건 그가 아니라, 나라는 걸.     


“넌 영원히... 살 것이다...”     


왜 한 번도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을까? 남의 나라에 와서 고생 많이 했다고, 온갖 굴욕 다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자긍심 잘 지켰다고, 달단어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그리하여 너로 인하여 이민족의 청년으로부터 조선의 관리가 적지 않은 걸 배울 수 있었다고, 그래서 고마웠고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하다고.     


비옥택 설렁거.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여인을 사랑했고, 조선의 먹을거리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달단 청년. 나는 내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그를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 한성부 판윤 최정보는 이 글을 썼다. <육식조선>. 이 글은 육식을 일삼는 괴물의 나라 조선에서 생살을 뜯기고 피를 빨린 채 사라져 간 세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다. 황, 옥택, 그리고 난설.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괴물의 더러운 아가리가 삼켜버린 젊은 삶들의 이야기다. 부디 떨리는 이 손으로 쓴 글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다면... 나, 최정보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무엇이 나, 최정보를 홀린 것이냐고.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스무 해 동안 한성부에서 몸 담아온 고위 관리가 왜 하필이면 하층민들의 역모에 연루되어 희생을 당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역모사건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느낀 반란의 이야기를 쓴 것 뿐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사십 해를 살아온 내 인생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노라고. 육식 괴물 앞에서 당당한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이제 마치고자 한다. 조선에서 가장 가진 것 없었던, 하지만 가장 빛나는 삶을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밖에선 군졸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나를 잡으러 오는 거겠지. 그리하여 이 몸뚱이 또한 피를 뿜어내고, 짓이겨진 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훗날, 누군가가 이 책을 발견하고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이름 모를 독자에게 난 말하고 싶다. 그들을 기억해 달라고. 아, 할 수만 있다면 그 최초의 독자에게 직접 이 책을 전해주고 싶다. 이 말과 함께.  


“이 책은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이 책이야말로 거대 육식동물의 광폭함에 대항하여 그 먹이사슬의 고리를 끊고자 일어선 반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부끄러운 삶을 마감하고자 한다. 부디, 밝은 눈을 가진 누군가가 이 글을 발견해서 후세에 전해준다면, 그리 해 준다면 육식 괴물인 조선의 탐욕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련만.      


경태* 1년 무진년 이른 시월 운암 최정보           


* 景泰_ 명(明) 제7대 황제 명대종(明代宗) 주기옥(朱祁鈺)의 연호로 1450~1457의 8년간 사용되었다. 경태 1년은 1450년, 조선 세종 32년으로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조선 5대 국왕 문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비옥택 丕鈺澤


비옥택 설렁거의 시신은 그가 사망한 지 3일이 지나서야 그의 부친인 비안정에게 보내졌다. 3일 만에 되살아난 자가 근래에 있었음을 아는 군졸들이 설렁거 또한 그리 될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늑장을 부린 까닭이었다. 비안정은 이른 아침부터 자기 집 마당에 나와 초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꼼짝도 않은 채 아들을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은 몇 식경을 꼬박 그 자리에 검은 탑처럼 서 있는 비안정에게서 몽골 황야의 검은 괴물, 하르망가스의 울부짖음이 들렸다고 했다.      


달단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 아래로 설렁거를 실은 수레가 나타난 건 오시가 거의 지나 미시로 향하던 즈음이었다. 오전 내내 난폭하던 바람이 웬일인지 잦아들고 날씨는 어느새 봄날처럼 따뜻해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떠거덕 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달처럼 빛나는 비단의 하얀 반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탑같았던 비안정은 그제야 천천히 머리를 조아리고 큰 절을 아들이 아끼던 말을 향해 하고는 땅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두 손을 하늘로 뻗어 바람을 두 손 가득 쥐어 잡더니 입 속으로 집어넣는 시늉을 했고, 다시 몸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시늉을 한 뒤 손바닥을 비벼 그 기를 땅 속에 쏟아 내었다.    

  

“죽은 이의 혼령을 받아주십사 고하는 첫 의식이라더군. 달단인의 전형적인 풍장을 보시게 될 걸세.”   

  

김홍중이 내 귀에 대고 그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한 달음에 달려가 수레를 살펴보고 말을 집적거리거나 수레를 들춰봤을 그이지만. 그날만큼은 묵직하게 잘 견디고 있었다. 하긴, 누구라도 무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메마른 땅을 가르는 촉촉한 바람처럼 촉망받던 젊은이의 처참한 죽음으로 인해 달단마을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죽은 이는 달단을 대표하는 수장의 아들, 곧 그 뒤를 이어 마을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아니었던가.      


땅과 바람과 하늘에 예를 취하고 시신을 맞이하는 절차를 마친 비안정은 아들의 너덜너덜한 시신을 곱게 씻기고, 꿰매고, 닦았다. 비로소 형체가 만들어지자 그는 아들의 옷 중 가장 깨끗한 것을 입혔다. 나는 한 번도 그가 달단의 전통 의상을 입은 걸 보지 못했다. 언제나 척박하고 거친 조선의 옷만 입었던 그는 그 옷을 입자 누가 봐도 잘난 달단의 젊은이로 보였다. 그가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개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우러러 볼 만큼 잘난 그는 달단의 태왕, 태무진의 기가 서린 그들의 땅에서 말을 타고 왕자처럼 평야를 달리고 있었을까? 바람을 한 줌 한 줌 정성껏 주워 담아 설렁거의 꿰매진 육신 속으로 집어넣는 주름투성이의 비안정은 어떤 마음일까.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비안정, 설렁거의 아버지는 달단의 수장답게 묵직하고 위엄 있게 그 모든 절차를 손수 해내면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검은 바위 같은 사내였다. 그는.   

    

“나 세상 뜨면 바람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길지 않은 이승에서의 시간을 이제는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서 익어가는 열매처럼 살을 말리게 해 주십시오.“ 

    

잠시 후 비안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풍파에 파이고, 흙모래에 침식당한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맑고 우아한 소리였다. 


“그리하여 한때는 내 육신이던 것을 나의 생각과 기억들과 함께 

한 올 한 올 비단을 짜듯 바람 속으로 스며들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한 때는 이곳에 머물렀던 나의 모든 것들이 

다시 바람이 되고, 땅이 되고, 물이 되어 

이곳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이들에게 

의미 있게 작용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비안정의 목소리는 바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맑은 물줄기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부족 중 누구라도 죽으면 그가 불러주던 노래였을 것이다. 짧았거나 길었거나, 잘 살았거나 혹은 의미가 없었던 삶까지도 모두 품어 바람 속으로 돌려보내던 그였다. 그는 알았을까?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바람 속으로 떠나보내리라는 것을.       

노래를 마친 비안정은 아들의 육신을 좁고 기다란 나무판자에 올려 꽁꽁 묵은 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말, 비단에 실었다. 그러자 말은 또각또각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저렇게 죽은 이를 말에 태워 무작정 어디론가 가게 한다는군. 신기하지 않나? 달단 말들은 장례를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듯하이. 어찌 저리 착착 알아서 움직인단 말인가? 쯔쯔 저 말에 비하면 내 것은 기생집 똥개 놈보다도 못한 듯싶네.”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걷던 김홍중이 계속 속삭여댔다. 조용히 좀 해줬으면 싶다가도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설명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보게 정보! 저거 저거 좀 보게. 자네 눈엔 저 영특한 말이 지금 명당자리를 고르고 있는 것 같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린가?”

“말이 멈춰 선 곳이 설렁거의 무덤 자리가 된다쟎나. 그게 하늘이든 땅이든 물속이든.”

“...”     


그렇게 말하는 홍중에게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식으로 망자의 묘 자리를 정하는 지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으나, 그건 우리 조선인들이 따질 문제는 아니다.    결국 한참을 천천히 걷던 말이 멈춘 곳은 마을 입구 언덕 위 당산 나무 아래였다. 그곳은 그의 부족들이 십여 해 전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안녕과 무궁한 번영을 기도하며 제를 올렸던 곳이었다. 비안정과 마을 사람들은 말이 완전히 멈춰 서자 다시 한 번 바람의 의식을 치른 후 설렁거의 시신을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날래 보이는 남자 하나가 몸에 굵은 줄을 묶은 다음 나무위로 올라가더니 줄을 아래로 내렸고 사람들은 그 줄에 설렁거의 시신이 얹혀져있는 판자를 묶었다. 그렇게 죽은 이의 시신은 마을을 지켜주는 고목의 위쪽 오목한 나뭇가지 위에 올려졌다. 

     

“달단의 바람과 조선의 것은 다를진데, 저 방식을 고집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 말라비틀어지고 새들이 뜯어 먹을 텐데...”

“...”


그의 시신이 나무 꼭대기에 단단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사람들의 입에선 나지막한 바람같은 노래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참으로 바람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한 없이 맑은 사람들. 그는 이제 당산나무의 일부가 되어 조금씩 사라져 갈 것이다.      


“므지개*군. 허 참. 설렁거 저 자식... 끝까지”  


* 무지개의 옛말   


사람들이 하라 둘 씩 그곳을 떠나갈 때 김홍중이 내 팔을 잡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뒤를 돌아보니 설렁거가 누워있는 그 당산나무 위로 무지개가 솟아 있었다. 무지개라... 그건 하늘과 이승을 통하게 하는 문이라 했다. 김홍중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나는 그 눈물에서 김홍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돈과 명예, 식탐으로 똘똘 뭉친 조선의 권세가였던 그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민족 백정의 아들 따위에게 가졌던 애틋한 그 뭔가가 있었음을. 나처럼.




“소인의 이름은 비옥택입니다만, 판윤께서 괜찮으시다면 설렁거라 불러 주십시오.”

“설렁거? 허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무지개라는 뜻의 달단어입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잉태하실 때 무지개를 품 안으로 들이셨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거, 무지개라... 사내 대장부 이름치곤 너무 곱지 않느냐?”

“저희 달단인들에게 자연은 저희 자신이자 우리가 죽고 난 후 돌아갈 고향입니다. 무지개는 땅과 하늘과 물이 만들어내는 자애로운 미소입니다. 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비록 조선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방인이지만 조선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더불어 뿔뿔이 흩어진 달단인들에게 길이 기억될 수 있는 조상이 되는 것. 그래서 누구라도 어디선가 무지개를 본다면 저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옥택을 두 번째 만나던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조선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건, 나라의 골칫거리로 낙인 찍혀 있단 달단인 청년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달단이 누군가. 무례하고, 흉폭하고, 탐욕스러워 조선인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는 난봉족이 아닌가.      


“그래? 그러자꾸나. 그럼 내 이제부턴 너를 설렁거라 부르마. 허허. 설렁거라.”     


친우 김홍중이 나에게 몽골어를 배워줄 수 있는 인물로 설렁거를 추천했을 때, 난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몽골족 특유의 변발에 울뚝불뚝 솟은 근육들, 여기에 육척 장신이 풍기는 사내스러움까지. 하지만 나를 잡아끈 것은 체구와는 다른 그의 맑고 고운 눈빛이었다. 게다가 무지개라니. 김홍중을 향해 허허 하고 웃음을 보이긴 했지만 난 그 이름마저도 싫지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인가. 누군가를 지칭하는 고유한 명사가 아닌가. 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그 누구를 위한 호칭. 맑은 눈을 가진 장신의 몽골 청년에게 난 무지개라는 이 이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김홍중에게 몽골어를 배우겠다는 한 말은 달단인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을 뿐 진실로 나는 달단인이나 달단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설렁거라는, 그리고 그는 뭔가 달랐다. 뭐랄까. 바람이 불어나오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라고나 할까.     


“나리, 여쭙고 싶은 게 있사옵니다.”

“그래. 무엇이더냐?”

“제가 감히... 스승님이라 칭하기를 청하여도 괜찮겠사옵니까?” 

“나를? 허허. 네가 나에게 달단어를 가르치고 있으니 내 스승은 네가 아니더냐?”     


그 날 이후 설렁거를 나를 꼬박 스승님이라 칭했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이민족인 그에게는 조선팔도 그 어디에도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스승. 누군가를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한 경험이다.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스승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또한 고결한 기쁨이 아닌가.      


“그렇게하거라. 한데, 난 너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 것이냐?”

“스승님의 모든 언행이 제겐 빛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난 괜찮은 인물이 아니었다. 성균관을 졸업하고 한성부에 들어간 이후 십년이 넘도록 내가 한 일이라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판결을 내리고, 처벌 하고, 보고 하고, 다시 사건을 보고 받고. 그 뿐이었다. 그 속에는 무엇을, 어떻게, 라는 문제만 있었지 누가? 왜?라는 의문은 없었다. 나에게 사건들은 그저 해결해야만 하는 업무이었을 뿐, 모든 범죄행위 속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삶과 아픔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나인지라, 나라는 인간을 스승으로 부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으로 출렁이는 설렁거의 눈을 본다는 건 참으로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을까? 그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뭐어라? 대단하신 운암 최정보를 자성하게 만든 게 고작 그 설렁거라? 자네 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그 아인 그저 달단족 아이일 뿐일세. 그런 아이가 자네한테 스승이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도 있는 것임을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난 자네가 흔쾌히 그 고얀 녀석의 청을 들어준 게 더 놀라울 뿐이네. 허허 고 녀석. 앙큼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김홍중은 설렁거를 싫어하지 않았다. 눈치 빠르고 말도 잘 타는 설렁거는 김홍중이 일하는 사역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의 말 비단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와 순식간에 수습을 하곤 했다. 민첩한 데다 영민하기까지 한 그는 느려터지고 불평이나 해대는 조선인 참군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꾼이었다. 게다가 달단 수장인 아비를 둔 덕에 종종 달단 깊숙한 곳의 정보들을 자근자근 알려주기까지 하니 솔직히 설렁거의 입장에서 보면 김홍중으로 부터 심부름 값이라도 톡톡히 뜯어내어야 할 판이었다.      


“설렁거 저 자식... 속을 모르겠단 말야.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데...”

“그게 뭔 소린가? 꿍꿍이라니?”

“아, 그렇잖은가? 저 녀석이 뭐가 부족해 내 수족처럼 움직인단 말인가? 다른 달단들은 다들 뻣대고 콧구멍에 홧김만 잔뜩 담아서 미친 말들처럼 팽팽거리는데 말일세. 저 녀석은 달라도 너무 달라. 장차 뭔가 저지를 녀석임이 분명하네.”     


그리고 김홍중의 그 말은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죽었던 유황이 다시 살아난 후, 유황과 함께 있는 설렁거는 이미 예전의 그 순수하기만한 달단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그는 체제의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되어 있었다. 무엇일까 그의 육신과 정신에 강한 의지와 힘을 불어 넣은 것은.     




“지금, 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이냐?”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너는 아직 완전한 조선인이 아니다. 그 말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너에게 가해지는 처벌의 잣대가 더욱 무자비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승님. 유황은 제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유황과 난설에게... 전 무언가를 해주고 싶습니다. 제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믿습니다.”     


유황과 난설.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미 설렁거는 알고 있었다. 유백증의 집, 깊숙하고 후미진 방에서 나에게 그는 조용히 절을 올렸다. 죽음을 향해 마지막 길을 떠나는 제자의 예를 받다니, 가슴은 무너져 내렸지만 이미 그를 휘감고 있는 강한 기운은 그 어떤 말로도 주저앉힐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유황과 난설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고 설렁거의 죽음은 나에게도 큰 상처로 남았다. 태조께서 달단인들에게 정착을 명하시고 그들에게 적당한 일을 내리셨던 그 날 이후 50년이 흘렀다. 그 사이 이 땅은 초식의 나라에서 육식의 나라로 물들어갔고 가진 자들은 물론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육식에 탐닉해 갔다. 육식의 나라 조선. 그것이야말로 비옥택과 같은 젊은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니던가.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이 손에 쥔 티끌마저도 빼앗으려 그들의 목숨줄을 물어 뜯는 착취의 굴레. 이 나라가 생겨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이미 그 못된 굴레가 몇 번이고 돌아가는 걸 목격했다. 부와 권력의 대물림. 탐욕의 대물림. 육식의 대물림. 선비와 유교의 나라인 조선이 아닌 피 뭍은 주둥이로 더 많은 사냥감을 노리는 육식동물의 얼굴. 그것이 진정한 조선의 얼굴이다. 


죽은 후 더욱 선연하게 남아있는 설렁거의 형형한 눈빛 옆에 온화한 얼굴을 한 또 다른 얼굴이 보인다. 유황. 설렁거가 기꺼이 대신 죽기를 자처했던 바로 그 인물. 이제는 모두에게 전설만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진 그를 처음 본, 그 날이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다. 유황. 지옥불에서 살아 돌아온 자.  



유황 柳滉 


사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유황과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유황은 그저 거골장* 유백증의 아들이었을 뿐, 이렇다 할 의미를 부여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유백증에게서 고기를 대접받아 최상의 난로회를 즐긴 조선의 최고 권력층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유백증이야 알아두면 손해 볼 것 없으니 대충 귀에 걸어두는 이름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권력층에게 고기를 바치는 거골장의 아들? 그건 전혀 관심에 둘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 去骨匠  소•돼지 등의 짐승을 죽이고, 이들의 뼈를 골라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어 육식이 본격화되면서 늘어난 전문 직업군. 이민족이 주로 담당하던 백정과는 달리 국가의 승인을 받은 양인 출신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하지만 육식으로 인한 폐해가 심해지자 국가에서는 소를 농사짓는 근본이라 하여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금하고 거골장을 단속하여,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거골장을 변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중종 때에는 도살이 다시 성행하여 소 한 마리 값이 베 80~90필에 달할 정도로 조선은 본격적인 육식의 나라가 된다  


유황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저잣거리를 두리번거리고, 대낮에도 술 퍼 마시고 여기저기서 주정하다 군졸들에게 잡히기 일쑤였으며, 그나마도 아니면 여자들하고나 놀아나는 삼류 건달일 뿐이었다. 도대체 영양가 있는 일이라곤 한 톨도 하지 않고 책 한 권, 글 한 자 들여다보지 않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양인 건달. 만약 그에게 부친의 재산이 없었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물려받은 재산이란 종종 그렇게 후손들을 나약하고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의 아비 유백증은 알고 있었을까? 더불어 그 재산으로 인해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 심장 같은 자식을 갈기갈기 절단당해 죽이는 참혹한 범죄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그 돈 많은 양인 아비는 생각이나 했을까?      


유황은 여렸을 때 길동이라 불렸다. 吉童. 양반이 아닌 양인 주제에 악착같이 돈 긁어모으는 아비를 만나 편하게 살아가는 유백증의 둘째 아들은 누가 보기에도 운 좋은 아이, 길동이었던 것이다. 황의 형, 유백증의 큰 아들인 무와 작은 아들인 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일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무는 아버지를 돕느라 어렸을 때부터 현방에서 살았던 몸으로 실천하는 참으로 묵직한 사내였다. 소싯적부터 꽤나 묵직하던 무의 언행은 쇠약하던 어미를 잃고 얼마 안 돼 아비가 돈 주고 아내로 맞아들인 가난한 계모와 함께 살면서 그 묵직함이 더 심해졌는데. 급기야 유백증의 둘째 부인이 자기와 무려 나이 차가 열여덟 살이나 나는 어린 황을 낳자 과묵함은 광기로 치달았다. 어린 동생에 대한 질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골장 일에 대한 부담은 점차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었고 술과 도박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스무 동이나 되는 말술을 마시곤 심장이 멈춰 죽고 말았다.      


문제는 무는 죽기 전, 너무나 많은 일을 노비처럼 해냈고, 그 결과 무가 죽었을 때 유백증의 곡간은 한성의 여느 양반가 못지않은 알짜배기 재산으로 채워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유백증은 큰 아들을 잃은 후 자책감과 슬픔으로 일에 더욱 매진했지만 작은 아들에게는 거골장 일을 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황을 양반가의 자제처럼 키우기 위해 큰 아들과는 다른 정성을 황에게 쏟아 부었었다. 아버지의 그런 변심 덕분에 황은 언제나 좋은 옷을 입고, 맛난 것을 먹으며 부잣집 도령처럼 자랐다. 하나, 그는 영 철딱서니라곤 없었고 글공부에도 영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황을 보며 ‘피는 못 속인다’, ‘양인이 갓 쓴다고 양반될 리 만무하다’며 유백증 부자를 못마땅해 했다. 그러니, 이미 큰 아들을 잃으면서 팍 늙어버린 유백증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세상걱정이라곤 없이 하루일과를 온통 노는 데만 갖다 바치는 작은 아들이 그에겐 큰 근심이었지만 이미 그에게는 황을 다룰 그 어떤 기력도 남아있질 않았다. 말없이 자신의 뜻을 따르던 큰 아들의 죽음은 그를 아들에게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는 바보아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황이 길동이라 불리는 데 마을 사람 모두 이견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 많은 아버지에, 그 누구도 참견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 양인이라 과거에 대한 압박도 없으니 공부할 필요도 없고, 하는 일이라곤 무위도식 밖에 없으니. 굶주림과 강도 높은 노동으로 목숨을 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 눈에 그는 하늘이 내린 복을 껴안고 태어난 길동이가 확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양인 출신으로 이뤄진 거골장과 달단인이 대부분인 신백정 사이에서 일어난 우육전쟁(牛肉戰爭)의 한 가운데 유백증이 자리하면서 길동 유황의 엄청난 운도 끝나는 듯 보였다. 너덜너덜해지도록 난자당한 유황의 시신을 끌어안고 유황의 모친은 쓰러지고 말았고 유백증의 얼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그러길래 어렸을 때부터 엄청나니 복이 있다 했잖어.”

“그라게 말이여. 저렇게 갑자기 일을 당할지 누가 알았겄어.”

“하이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저렇게 죽느니 그냥 매일 풀죽 먹고 사는 게 낫겠네.”

“하고 유백증 좀 보게. 큰 아들에 작은 아들꺼정... 쯔쯔. 소잡고 고기 끊어 악착같이 돈 벌면 뭐 하나. 손주놈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멀쩡한 아들을 몽땅 잃었는데... 사람 팔자 참 뭐라 할 거 아녀.”     


사람들은 하나같이 팔자에도 없는 너무 누리고 살아 이런 꼴로 갔다며 쯔쯔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그가 죽은 지 사흘 째, 황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을 때 사람들은 진정으로 그가 ‘길동’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나 죽었다 살아나나? 천에 하나도 그런 일 생기긴 힘들지... 라며 황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운 좋은 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운 부활이 일어난 후 1년도 채 안되어 그는 드디어 거골장 유백증의 아들이 아닌 유황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유황. 그는 죽은 그 삼일 동안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무엇이 그를 지옥 불에서 살아 돌아오게 만든 것인가? 그의 몸과 정신에 남은 지옥 불의 유황 냄새는 이승에서 그에게 강력하게 작용하는 마법의 힘이 된 것일까?      




“황. 자네는 왜 이 길을 가려 하는 건가?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도 모질게 만들었는가?”     


좌도혹민(左道惑民). 올바르지 못한 도로 백성을 유혹했다는 것이 유황의 죄명이었다. 그는 무엇으로 백성의 마음을 현혹시켰을까? 백성은 그가 가진 무엇 때문에 그에게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는가? 그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인가? 일부 사람들이 이야기 하듯 그는 진정 옥황상제의 아들인가? 그래서 그를 따르면 가시밭길 같은 이승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갈 때 이승에서의 모든 고뇌와 짐을 벗어버리고 진정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다 믿도록 만든 것일까? 유황, 그는 진정 거짓 혀로 나라와 임금과 조정을 농락하는 역적인가?      


“모질다...하셨습니까. 그렇지요. 모질고 모질다 못해 강악해졌지요. 무엇이 저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냐구요? 하하. 판윤나리께선 이미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나라, 조선이야말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모질게 만드는 광한괴(獷悍怪)임을. 지금의 조선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 그 광폭성을 전염시키는 괴물입니다. 누가 이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 하였습니까? 가지지 못한 것이 곧 죄라구요? 어미나 아비가 가지지 못하면 그 자식도 곧 가질 수 없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리하여 가지지 못하면 천한 아래 것이 되고 그들은 사지가 갈리고 숨이 끊어져도 가진 이들의 손가락 생채기만큼도 아파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나라 조선이 아니옵니까?”

“황, 자네....”     


내가 알던 유황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놀고, 먹고, 빈둥거리고, 퍼져 지내던 가능성 포기한 양인 거골장의 아들이 아닌, 세상의 손톱만큼도 안되는 가능성에 자신의 온 삶과 기를 바치는 젊은 바위. 난 그 때 그가 양인 거골장의 아들이 아닌 양반의 아들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왜 양반의 자제들 중에는 그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 그렇게 당당하고 폭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심장 속으로 꽂아 넣을 수 있는 이런 인물이 왜 양반가의 자제 중에는 없는 것일까? 만약 그가 양인 거골장의 아들 유황이 아닌 양반가 누군가의 아들이었더라도 난 이제 막 시작하는 조선의 미래를 이리도 암울하게 느꼈을까?      


“나리.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 누구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냐는 것은 운명이 아닌 선택의 문제입니다. 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조선은, 저희와 같은 젊은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몸은 젊지만 늙은이의 탐욕과 썩은 정신을 가진 나라가 지금의 조선이 아닙니까. 피를 원한다면 피를 뿌릴 것이고, 살덩이를 원한다면 저희의 육신을 조각내어 조선의 구석구석에 바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저희가 하려는 것입니다.”     


유황은 지옥불을 보고 왔노라고 했다. 그래서 무서울 게 없다고, 이미 한 번 죽어 봤으니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의 냄새나는 돈으로 버러지같이 살던 거골장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투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조선의 하찮은, 하지만 존엄한 존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을까? 그건. 지배층만 모르는,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조선의 문제를 젊은 거골장 유황이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옥택을 부탁드립니다. 그는 제 동지이자 친구입니다. 저는 비록... 난설을 데리고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지만... 반드시 그를 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엎드려 조아립니다. 부디 옥택을...”     


유황이 떠나던 그 날 새벽. 그는 나에게 큰 절을 올렸고 한참동안 차가운 얼음 땅에 얼굴을 박고 울먹이던 그의 어깨 위엔 초겨울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었다. 그 때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울먹였을까? 신선노가 보낸 군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그 시각, 사각 사각 눈 내리는 소리가 내 귀에 한참이나 들릴 정도로 그 자리에서 그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난설과 전 반드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함께 한 일들을 남겨 미친 육식동물 같은 이 세상을 반드시 바꿀 것입니다. 옥택에게... 제 이야기를 전해주십시오....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함께 죽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 때 내린 눈은 그 후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유황의 굳은 어깨 위에 내린 그 눈. 그리고 눈 속에서 피어난 하얀 난초 같은 난설의 초연해 보이던 그 얼굴과 함께 말이다. 



허난설 許蘭雪


난설. 그녀에 대해서는 진정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난 잘 모르겠다. 뭐랄까... 난 그녀에게서 표정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란 대체로 감정 과잉인지라 기쁘거나 슬프거나 무섭거나 화가 나기라도 하면 모든 것들이 표정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난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던 유백증의 집에서도 그녀는 화첩 속 여인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세상을 바삐 돌아가는데 오직 그녀만 그 자리에 서서 모든 소용돌이를 관조하듯. 그녀에겐 나로 하여금 저절로 그녀 쪽으로 다가가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낭자가 유황을 처음 발견하셨다는 게... 사실이오?”

     

그녀는 마치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 같았다. 유백증의 아들을 입관하려는 그 찰나. 사람들은 바삐 오가고, 유황의 모친은 울부짖다 혼절하고, 구경꾼들은 죄다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 다니고... 그 와중에서 그녀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홀로 서서 그 모든 상황을 홀로 지켜보는 절대자.  

    

“죽지 않았어요. 사향이 필요해요. 진한 걸로. 나리께서 유도령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한 경전처럼 내 귀를 파고 들었다. 나는 뭔지 모를 어떤 힘에 이끌려 무조건 그녀의 말을 따랐고, 그리고 그녀는 옳았다. 사향이 유황을 살린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내가 유황을 살렸다 말들 하지만 실은 그녀가 유황을 살린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허난설. 하루아침에 왕족에서 노비로 전락한 명문가의 딸.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비단머리채만이 남은 고귀한 혈통이었지만 나는 한 눈에 그녀가 그곳, 유백증의 아들 유황의 상갓집에 모여든 여느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봤다.  

     

“양천 허씨, 문영의 죄목이 무엇이던가?” 

    

김홍중이라면 분명 가려진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난설의 아비인 허문영이 왜 갑자기 역모죄를 쓰고 참형을 당했는지, 그리하여 그 식솔들은 물론 삼대까지 멸하라는 징벌이 내려진 진짜 까닭을. 김홍중에겐 세상을 파헤쳐보겠노라는 진정한 사가(史家)적 안목이 있으니 말이다. 

     

“안타까우이... 참 좋은 분이셨는데...”

“허문영 대감?”

“그렇지. 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우리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종종 오셔서 동지사 격으로 주자학을 강의하시지 않았는가. 목소리가 너무 점잖으셔서 왜 내가 손들고 좀 크게 말씀해 주십사 청했던.”

“아...”     


그제야 나는 난설의 부친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 강의하시던 분 중 유난히 젊고 수줍음을 많이 타시던 탓에 꽃지사라 불리던 분이었다. 조용조용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조용하시던 분이 역모죄라?   

   

“그게 참 이상타 말일세. 아, 자네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어찌 그런 분이...”

“대역죄를 지으실 분이 아니라 이 말인가?”

“그게 말일세...”     


김홍중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내 귀에 입을 바싹 들이대고 조용히 말했다. 

     

“누가 봐도 모함이라 이 말일세. 선왕*께서 좀 복잡하셨나. 아마도 전하는 선왕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정치적 본보기로서 그분을 택하신 게 아닌가... 싶다네.”     


* 태종 이방원


허문영의 죄는 모반죄였다. 모반. 국가나 군주를 전복할 것을 꾀한 죄라니.      


“평생 집안 담장 밖으로 목소리조차 내보내지 않으신 분이었다네. 허문영 대감이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데 대해 그 누구도 수긍을 하는 이가 없었지만. 시대에 필요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모두들 그의 죽음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네. 어린 나라를 청년 나라로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피의 재단에 순결한 그분이 어이없이 바쳐진 것이지.”     


어머니 쪽으로 왕족이었던 난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관노가 되었다. 아버지 허문영 대감은 사약을 받았고 어머니 장 씨는 남편의 처형 직후 혼절, 식음을 끊은 지 보름 만에 끝내 절명하였다. 난설의 오라비는 거제도로 유배를 갔으며, 난설은 한성부 소속 관노로 가야할 운명이었다. 스무 살이 안 된 젊은 처녀의 경우엔 관기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난설은 그렇게 기생이 될 운명 속으로 집어 던져졌다.  하지만 난설은 자신에게 떨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

“어찌하다 유황을 발견하였느냐? 야심한 밤에 혼자서 그곳엘 간 이유를 말해 보거라.”

“...”

“사향이 유황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     


난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딘가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듯 몽롱하고 신비로웠다.   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건 유황이 죽지 않았으니 사향이 필요하다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난 그 후로도 그녀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난설에게서 내가 가장 궁금한 건 그녀가 어찌 유황의 여자가 되었는가였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단지 유황의 세계로 숨어들어가 자신을 은닉시켰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으니 정정하겠다. 그녀는 유황의 여자였지만 유황 이상이었다. 남자를 이끄는 여자의 힘. 난설의 정신력에는 유황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난설과 제가 쓰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 허허 기특하군. 그래 무슨 책을 쓰고 있나?”

“요리책입니다.”

“요리라? 무슨 요리?”

“조선의 소고기 요리에 대한 책입니다. 전국적으로 상이하고 특색도 다양한 요리법을 모아 정리하고 있습니다.”

“소고기 요리라... 왜? 그런 일을 하는 건가? 자료를 모으는 게 쉽지도 않겠거니와 그게 자네와 난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지금은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만약 저희에게 문제가 생겨 책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그 때 이 책을 나리께 드릴 예정이니까요.”     


그 때는 몰랐다. 그들이 왜 그 책을 쓰는지, 그리고 그 책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소고기 요리책이라는 지극히 규방적인 성격의 책자 속에 감춰진 분명하고 힘 있는 목소리의 정체를.      


유황과 난설은 한성을 떠나면서 그 책을 내게 남겼다. 그제야 난 비로소 세상에서 소외된 두 젊은이가 왜 그토록 책 쓰기에 열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투쟁사이자 권력층을 향한 분노의 항거였던 것이다.      


대저 백성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먼저 항민(恒民)이 그것이다항민이란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애미고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은 원민(怨民)이다그들은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도 끝없는 요구에 지쳐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백성은 호민(豪民)이다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가 있다면 자신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두려워할 바는 다름 아닌 백성이다세상에는 여러 백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난설과 유황이 함께 쓴 책 첫 장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나는 그 글의 의미를 처음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가 몇 번을 읽어본 후 비로소 그 참의를 알고 두려움으로 부르르 몸을 떨기에 이르렀다. 호민이라. 이들은 역모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아닌가. 혹은 역모의 당위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동조자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을, 호민을 난설과 유황이 ‘가장 두려워해야할 백성’이라고 쓰고 있다.      


‘두려워하다... 두려워할 백성이라니... 백성을 두려워하다니...’     


그 말은 이제껏 그 누구도 한 적이 없는 민본적 발언이자 자칫 나라의 지배구조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파급효과가 있는 사상이 아닌가. 그러한 사상을 난설이, 모든 것을 잃고 술 따르고 노래하는 기생이 될 뻔한 스무 살 처녀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는 그녀를 사모하는 유황의 생각이 되고 동시에 그녀를 사모하는 또 다른 남자 설렁거의 생각이 되어 지금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자의 생각이, 이토록 강하고 무섭게 파급된 적이 또 있던가.    

  

난 생각해 본다. 문제는 난설이 아니다. 지어미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현모양처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을 그녀가. 어떻게 그런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었을까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이 나라, 조선이라고. 아니 이 나라 조선의 권력층이라고. 육식동물처럼 무시무시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층의 가리라고. 그리고 지금, 그녀의 모든 것을 꿀꺽 삼킨 이 동물은 또 다른 희생자를 삼키기 위해 조만간 그 가리*를 다시 벌릴 것이고... 그 끝없는 먹이사슬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 나라가 끝나는 그 날까지.   

   

“그러니 스승님께서 저희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난설과 제가 소고기 요리법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문제가 생겨 책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그 때 이 책을 나리께 드릴 예정입니다.”     


설렁거와 유황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닌, 난설이 쓴 이 책을.  난설. 그녀야말로 이 나라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여인이었던 것이다. 


*동물의 주둥이



허균 許筠


“허난설을 아는가?”     


신문관의 질문이 들려온다.      


“오래 적 제 고모 할머님이라 들었습니다.”     


내가 대답한다.      


“유황을 아는가?”

“그를 알지 못합니다”

“비옥택을 아는가?”

“그를 알지 못합니다.      


질문이 다시 들려온다.      


“허난설이 쓴 책이 <홍길동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홍길동전>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잠시 후, 질문이 다시 들려온다.      


“난설이 쓴 그 책의 제목을 알고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육식조선>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육식조선>이란 조선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소고기 조리법에 대한 정리를 한 책입니다.”  

   

침착하고 일목요연하게 답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순간, 조금의 망설임이나 조리에 맞지 않도록 답을 할 시엔. 그걸로 끝이라는 걸. 저들은 이미 나의 죄목을 정해 놓고 답을 유도해내고 있잖은가. 걸려들면 안 된다. 잘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 허난설. 당당하고 용감한 그분의 후손이 아닌가. 난 잘 이겨낼 것이다. 그분이 그리한 것처럼...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거늘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쓴 글이 맞는가?”   

  

드디어 나올 것이 나왔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저들은 분명 칠서 지옥*으로 나를 엮어 들려하는 것이다.      

*  七庶之獄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서자들의 반란을 일컫는 말이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 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심전의 서자 심우영, 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상산군 박충간의 서자인 박치인과 박치의, 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구도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허균은 이 중 심우영의 스승으로 사건과 연루되어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 그러합니다. 제가 쓴 것입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저들은 이미 <홍길동전>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시간을 너무 길게 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내겐 호흡, 호흡이 필요하다.      


“단지 출신성분이 서얼이라고 해서, 또는 어머니가 개가를 했다고 해서 인재를 저버리는 것은 나라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건국이념에 이미 서얼 차별과 재가 금지 조항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나라와 주상을 어버이로 섬기고 모든 신념을 바쳐야 할 사대부가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토록 불경한 책자로 민심을 현혹시켰단 말인가?”     


할 말이 없다. 내가 쓴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리고...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난 나의 사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출신성분으로 인해 인재를 걸러내는 것은 조선에 해만 끼칠 뿐이다.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가 누구의 아들이건, 누구의 딸이건 인재를 널리 등용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식동물만이 계속해서 탐식을 행하는 오랜 육식의 굴레를 벗어던져야만이 비로소 이 나라가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청, 왜.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 신분은 버려야 할 가장 큰 짐덩이인 것을.   

   

“<홍길동전>은 소설입니다. 소설은 허구로 써진 이야기가 아닙니까. 홍길동은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고, 그러니 그의 사상은 더더욱 거짓이옵니다. 이를 가지고 주상에 대한 충성을 의심하신다면... 이는 결국 저의 잘못이옵니다. 부디 홍길동의 모든 말들을 그저 한 문인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치부하시고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지으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죄인의 방자함이 도를 넘는구나. 소설이라 하더라도 무릇 사대부가 글을 통해 나타내는 모든 것은 그의 생각이자 그의 목소리라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거늘. 어찌하여 그러한 얄팍한 말재주로 주상과 조정을 능멸하려 하는 것인가. 거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도다. 여봐라. 죄인에게 다시 30대의 태형을 가하라. 그런 후에도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인두와 철곤으로 다시 태형을 가하도록 하라.”   

  

사람을 죽이는 데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은 죽을 때까지 육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날카로운 철심이 달린 몽둥이로 때리고, 불로 지지고, 살점을 떼어 내고, 뼈를 부러뜨리고... 그리하여 마지막 한 점 살점에 이르기까지 도달한 고통으로 인해 그만 영혼이 육신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가장 잔인한 형벌. 조선의 사대부로 태어난 나 허균은 그들과 같은 편에 서지 않았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지금 이렇게 나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      


나는... 죽을 것이다... 모진 고신으로 인해 주상의 사형 언도조차 없이 이렇게 죽을 것이다. 오래전 옥택이 그랬던 것처럼, 또 최정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친우들은 이렇게 말할 테지... 


“예로부터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고 단지 죄인의 범죄사실에 대한 심증만으로 그를 고신 하다 죽게 만드는 것은 그 어느 나라에도 없던 일입니다. 이 일에 대해선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하하. 하지만 벗의 우정 어린 그 상소조차 내 죽음을 뒤바꿀 수는 없는 법. 나는 이렇게 내가 꿈꾸던 이상향으로 떠나간다... 이 땅을 바람처럼 살다가 떠난 수많은 이름 없는 그들이 있는 그곳... 그리고 허난설과 유황이 떠난 그곳... 허난설과 길동이 떠난 그곳으로... 나, 교산* 허균은 이제 떠나간다.... 꾸불꾸불하고 야트막한 그곳, 나처럼 이 나라 조선에서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서 생을 마친 그들이 있는 곳.... 교산으로.... 이 피비린내 나는 육식조선을 떠나.... 


* 蛟山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사는 산. 허균의 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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