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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Dec 27. 2018

육식조선 肉食朝鮮 05

片肉편육

편육에 좋은 부위는 양지머리·사태·우설·우랑·업진·쇠머리·콩팥·족 등이다. 
고기를 끓는 물에 넣고 표면이 익은 다음 다시 끓기 시작하면 불을 약간 줄여
푹 삶는다. 고기를 젓가락으로 찔러서 잘 들어갈 정도가 되면 건져서 잠깐 찬물에 담갔다가 꺼낸다. 고기가 뜨거울 때 삼베보자기에 싸서 무거운 돌로 눌러놓았다가 고기가 굳으면 꺼내 썬다.  

    



관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최정보가 말을 타고 달단 거주지 정촌에 도착한 것은 신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겨울 해는 이미 그 생명을 다해 땅 속 깊이 사그라들고 있었고, 나지막한 지붕을 이고 있는 작은 집들이 띄엄띄엄 보이는 마을에는 어느새 저녁밥 짓는 냄새가 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성을 중심으로 몇 군데 흩어져 있는 달단 거주지 중 한 곳인 이곳은 마을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곳이었다. 군데군데 있는 집들은 나지막하다 못해 주저앉은듯한 꼴로 땅바닥과 맞닿아 있고, 높이가 일정치 않은 돌담 사이에 난 휑한 구멍이 겨우 그곳이 대문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 보이는 굴뚝들에선 하나둘씩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솟아 그나마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마을임을 알려줄 뿐이었다.      


달단 두목 비안정이 살고 있는 집도 그런 집들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초라한 오두막이었다.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집 앞마당에 특이한 문양이 있는 작은 천막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정보가 비안정의 집인 듯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 마당에는 잘 생긴 두 마리 말을 돌보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돌보는 말들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들로 누가 봐도 날렵하고 바람처럼 달릴 것 같은 준마였다. 두 마리의 말들은 뱃살이 늘어지지도, 뼈마디가 드러나지도 않은 적당한 몸집으로 한가롭게 식후경을 즐기는 듯 보였다. 두 마리의 말 주위에는 마치 말들의 대리인인양 말 주면을 뱅뱅 도는 온순하고 충직해 보이는 개가 세 마리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자신들의 말에 위협이 가해질 경우엔 가차 없이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는 듯 최정보를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게르입니다. 작은 천막일 뿐이지만 저곳에는 몽골인들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생을 마감하는 모든 삶이 담겨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게르를 가지고 다닙니다. 게르가 있는 곳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니까요.”     

청년은 머뭇거리거나 겁먹은 표정 없이 곧바로 최정보에게로 다가와 단정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와 함께 게르를 유심히 살펴본 최정보를 위해 몽골족의 천막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그의 행동은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는 적당함 그 자체였다. 조정에서 나온 관헌에게 이렇듯 당당하면서도 딱 적당하게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며 최정보는 그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눈치챘다.   

   

“난 한성부 좌윤 최정보네. 여기가 달단 수장 비안정의 집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자네는 누구인가?”

“저는 비안정의 아들 비옥택입니다”

“옥택? 설렁거가 아니고?”

“설렁거는 제 몽골식 이름이고 조선에서는 옥택이라고 부르고 씁니다.”  

   

옥택은 훤칠한 키에 구릿빛 피부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었다. 처음 보는 손님을 맞는 태도나 자신을 소개할 때 최정보보다 조금 낮게 시선을 잡고 단정하게 말하는 그는 조선 여느 양반가의 자제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기품과 당당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 청년이 무지하고 잔인한 달단의 수장 비안정의 아들이란 말인가? 허허. 이건 기대 밖이군.’     

준행의 발가벗은 몸과 유황의 난자당한 몸이 겹쳐 보이는 곳에 맑은 표정으로 서 있는 옥택을 보며 최정보는 순간 이번 사건에 달단이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맑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이 그러한 범행에 관여했을 리가⋯ 나라가 망하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큰 인물이 되었을 법한데, 이제는 움막 같은 곳에서 말이나 돌보며 지내는 달단 청년을 보며 최정보는 새삼 나라 없는 백성들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희망 없는 것인지를 실감했다.      


“아버지는 계신가?”

“마을 회의에 가셔서 지금 안 계십니다.”

“그러한가?”

“나리를 모시기엔 너무 누추한 곳입니다. 제 아비께 추후에 나리를 찾아뵙도록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둘 중 하나였다. 처세에 능한 고수이거나 타고나길 반듯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최정보는 비안정이 비록 무지하고 난폭하기는 하나 아들 교육만은 참으로 잘 시켰다고 믿고 싶어졌다. 이런 청년을 만난다는 건 쉽지가 않다. 왕족부터 천민까지, 갓난아기부터 송장에 가까운 노인까지 하루에도 수십 명의 다양한 인간들을 만나는 최정보였다. 얼굴과 표정, 말하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됨됨이와 속마음, 심지어 살아온 이력까지 훤히 들여다볼 줄 아는 그가 지금은 알 듯 말 듯한 한 젊은이에게 무조건 후한 점수를 주며 그에게 끌리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몽골 이름이 설렁거라고 했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그때 최정보는 옥택의 눈에서 뭔가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뭘까? 빛일까? 소리일까? 아우성? 혹은 바람? 

     

“제 이름, 설렁거는 무지개라는 뜻입니다. 어머님이 저를 가지실 때 무지개 꿈을 꾸셨답니다.”

“그래? 그 꿈이 어떤 내용이더냐?”

“물어보시니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초원에서 어머님이 서 계셨는데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어머니를 삼키셨답니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회오리바람 속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계셨는데 그 안에는 사람도 있고, 가축들도 있고, 칼이랑 마구 등 온갖 물건들도 함께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듯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회오리는 사라지고 저만치에 둥글게 무지개가 떠 있었다 합니다.”

“허허. 거 참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꿈이로구나.”     


설렁거가 돌보던 말은 한눈에 보기에도 훌륭해 보였다. 너무 크지도 또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잘 발달된 근육, 거기에 암적색에 가까운 털에는 반지르르하도록 윤기가 돌아 돌보는 이의 정성과 솜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최정보가 타고 온 말도 최상품은 아니더라도 썩 괜찮은 등급인데도 그 말 옆에서는 대단히 궁색해 보였다.      

“말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감사합니다. 이 녀석은 누뜨입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비단입니다.”

“누뜨라⋯.”

“눈이라는 뜻의 몽골어입니다.”

“그런데 왜 비단은 조선식 이름인가?”

“하하. 아버지는 몽골어로 토르고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전 그냥 비단이라 부릅니다.”

“왜 그런 건가?”

“조선에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조선말을 사랑해야죠.”

“저 개들은?”

“몽골 전통 개인 탄마스티프입니다. 가축을 돌보는 일을 도맡아 하죠.”

“가축지기 개라⋯ 이 또한 기특하구나.”

“네. 오드와 버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과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몽골말은 참으로 자연을 닮았구나.”      


누뜨와 비단은 탐나도록 훌륭한 말이었고, 오드와 버러 또한 충직함이 넘쳐나는 개들이었다. 김홍중이 지나가는 말로 “설렁거 그 자식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니까⋯”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면서 최정보는 속 웃음이 났다. 

     

“자네, 나에게 몽골어를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예?”

“허허. 너무 부담 갖진 말게나. 그저 간단하게 쓰이는 말만 좀 알아뒀으면 해서 말이네.”

“왜⋯. 아, 예. 물론입니다. 미천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야 기꺼이 하겠습니다.”

“잘 됐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둘 사이의 비밀로 해둬야겠네. 자네 부친도 그렇고 자네에게도 나와 자주 만나는 게 알려진다면 썩 좋을 일은 아닐 테니 말이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나리.”

“응? 왜 그런가?”

“왜 제게 몽골어를 배우려 하시는 겁니까? 다른 훌륭한 통사들도 많은 텐데요.”

“글세⋯ 그들은 하나같이 가짜가 아닌가. 난 말일세. 진짜가 좋단 말일세.”

“진짜⋯요?”

“그렇지. 자네 같은 진짜 몽골인으로부터 그 민족의 언어를 배우고 싶은 걸세. 게다가 자네는 젊기까지 하니 여러 가지로 나 같은 중년에겐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날 최정보는 굳이 비안정을 기다리지 않고 정촌을 떠나왔다. 한성부 좌윤이 자신의 아들 설렁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비안정이 본다면 또 어떤 거치고 투박한 일이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설렁거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최정보는 설렁거가 오늘의 만남을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몽골 청년 설렁거는, 그렇게 신뢰감 가득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들이닥치는 잇단 사건 보고로 최정보는 정신이 없었다.  

    

“도성 밖 민가에서 외양간을 부수고 소를 끌고 간 도난 사건이 지난밤에만 세 건 발생했습니다”

“우시장 동구에 있던 현방 다섯 곳이 지난밤 몽땅 털렸습니다”

“살곶이* 목장에서 소 세 마리와 말 한 필이 도둑맞았습니다.”    


*지금의 뚝섬. 조정에서 운영하는 국영 농장이 있었던 곳


갑자기 늘어난 우마 관련 사건만 수십 건이었다. 최정보는 정신없이 사건 처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백정과 거골장이라는 두 무리들이 떠나질 않았다.    

  

“유황과 옥택이라⋯ 급증하는 우마 도난사건에⋯ 난로회의 전국적 확산? 그렇다면 결국⋯.”    

 

거골장이 가진 권리와 특혜를 시기하는 건 결국 백정층이다. 하지만 백정들에겐 하급이긴 하나 나라의 관리인 거골장들을 드러내 놓고 해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백정들 입장에선 거골장들을 건드린다고 해서 그들이 가진 권리와 특혜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을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이민족으로부터 출발한 이 나라의 변방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백정이 거골장을 해하려 했을까? 아니, 누군가가 백정들로 하여금 거골장에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거골장들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거골장들은 독립적이고 폐쇄적으로 움직이는 대표적 직인*들이 아닌가. 즉, 대표적인 인물 하나만 쓰러뜨리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들의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거골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내세울만한 자는? 물론 유백증이다. 그의 부와 권력은 거골장을 이미 한참이나 넘어선 것이었다. 이는 단지 백정들의 눈엣가시만은 아니었다. 양반들 중에서 유백증을 미워하고 욕하는 이들이라면 한양에만 해도 수백이 나올 것이었다. 그가 차려주는 화롯가에서 고기를 구워 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백증을 꼬꾸라트릴 생각을 하는 게 양반들 아닌가.    


*職人 특정한 직종에 속하는 사람

  

“가만⋯ 유백증의 큰아들이 급사했다 했겠다?”  

   

어쩌면 이 전쟁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최정보의 머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없는 일과를 마치고 최정보는 김홍중과 약주를 곁들인 조촐한 상을 마주한 채 앉았다. 김홍중은 그런 친구였다. 살아가는 방식이나 기호는 달라도 왠지 바라보는 곳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머리가 복잡하고 뭔가 풀리지 않는 날, 그와의 대화는 늘 최정보의 막힌 곳을 뚫어주곤 했다.     

 

“이거야 원, 이게 술상인가? 술 한 잔에 생선전이라? 크⋯ 유백증의 난로회가 그립구만, 그리워.”

“허허 이 사람. 정성껏 차려준 부인이 들으면 어찌하라고 그리 큰 소리를.”

“헹? 나의 부인 말인가? 저 사람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하는 게 난로회일세.”
 “뭐라? 여인들은 난로회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어찌?”

“이런, 쯧쯧. 이렇게 사고에 융통성이 없어서야 원. 자네 한성부 좌윤자리 어떻게 유지하시나?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그 안목으로?”

“허허 이 사람. 또 시작이구먼.”     


김홍중은 청주를 단숨에 털어 넣은 후 젓가락을 들어 전유어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고는 최정보의 코앞에 디밀었다.      


“자네도 입이 있으면 말해보게. 지난번 먹게 해 준 유백증의 고기. 그게 낫나? 이게 낫나?”

“허허 그거야 당연.”

“저 안채에 계신 저분의 혀는 자네와 크게 다를 것 같나? 흐흐흐흐흐 그렇지가 않아. 사역원 제조 입이나, 한성부 좌윤 입이나, 또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화첩이나 읽으며 뒹굴거리는 안채 여자들 입이나 똑같단 말일세.”

“한성부 좌윤의 입이나, 참군의 입이나, 포도청 사령의 입이나, 몽골 통사의 입이나, 소금을 굽는 염간의 입이나⋯ 그렇지. 맞는 말일세.”

“그러니 말이네. 난로회가 끝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저 부인님은 가져온 고기를 몽땅 썰어 갖은 양념하여 내리 사흘을 구워 드신단 말일세. 괜스레 둥실 풍만해진 게 아닐세. 그리고 나선 뭐라는 줄 아나? 호호 서방님. 다음번 난로회는 또 언제 열리나요? 이런다네. 이러니 내 부인이야말로 조선 팔도에서 난로회를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고 또 뭐이겠나.”     


김홍중의 말이 맞았다. 소고기는 어느덧 조선 팔도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그 맛과 향은 신분과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골고루 퍼졌다. 소고기에 의해 길들여진 입들은 곧 소고기의 수요로 이어지고, 가진 자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조금 가진 자들은 그보다도 더 가진 것 없는 이들을 후려치고, 그리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것을 훔치고, 그 와중에서 소고기를 이용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급기야는 이를 뺏기 위한 살인이 벌어지고⋯ 한성부 좌윤으로서 줄곧 머리 아픈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소고기 전쟁 때문이 아닌가. 전유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소고기 타령을 줄기차게 뿜어대고 있는 김홍중을 보며 최정보는 씁쓸하게 술잔을 들었다. 어느새, 조선은 이렇듯 육식의 나라가 되었구나⋯.     


“그런데 좌윤.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자네 요즘 엄청 바쁘지 않나? 사건이 줄줄이잖아? 그러기에 나처럼 할랑한 기관으로 빠지라니까 그 말을 안 듣고⋯ 자고로 백성이 있는 곳에 범죄가 있게 마련이고, 그곳에는 치안을 필요로 하는 가진 자들이 있다 이걸세. 이 구조는 이 나라가 망하고 다시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말일세. 난 다시 태어나도 한성부나 사헌부, 포도청 같은 데는 얼굴도 디밀지 않을 거란 말일세. 아, 그건 그렇고 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자네, 유백증의 큰 아들을 잘 아는가?”

“죽은 그 아이 말인가? 잘 알지. 무. 그 아이 이름은 무였네. 텅 비고 아무것도 없다⋯ 흐흐 물론 없을 무(無)가 아닌 힘쓸 무(務)자를 썼지. 하지만 말일세.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그 아이를 보고 내가 느낀 건 참 가엾다, 안됐다⋯ 그런 걸 떠나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무’라는 거였네. 어찌나 그 죽은 얼굴이 공허해 보이던지⋯ 그런데 그 아이 일은 왜 묻는 건가?”

“자네 무의 죽은 얼굴을 보았는가?”

“암, 봤지. 유월 보름께였으니까 무척 더운 날이었네. 사실 말일세, 난 동짓달의 난로회 말고도 종종 유백증네 집에 가서 고기를 얻어먹고는 한다네. 삼십 년지기 친우한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응큼한 비밀이지만 말일세. 크크. 아무튼 그 더운 날, 내가 유백증을 졸라 근사한 부위로 고기를 좀 받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내 요놈을 어떻게 조리해 먹을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말일세. 아, 평소 말 한마디 않던 무 녀석이 냉큼 다가와서는 자기랑 같이 물가로 가서 구워 먹자고 하는 게 아니겠나. 뭐 좀 놀라긴 했지만 나야 얼씨구나 였지. 무 녀석은 고기 다루는 귀신이니까 사박사박 좀 잘 썰겠는가. 거기다 자네도 알겠지만 유백증네 안사람 손맛이 또 장난 아니게 좋다네. 무 녀석은 큼지막한 단지에 양념을 가득 담아 와서는 앞장서더란 말이지. 물론 술도 넉넉하게 챙겼지. 그래서 우리 둘이 실컷 마셨단 말일세. 그날은 정말 좋았다네. 흠~”

“둘이 마셨나?”

“그렇지. 무는 원래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이 없는 아이라 유백증네 집을 닳도록 드나들던 나조차도 그 날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네. 그러니 딱히 같이 갈 동행이 어디 있었겠는가. 늘 아비네 현방에서 소처럼 일만 하는 녀석이 안쓰럽기도 하고, 오죽이나 말동무가 그리우면 저럴까 싶은 마음에 우리 둘이 의지가 맞은 것이었지.”

“그 날 사고가 난 것인가?”

“아이고, 그런 눈으로 날 보지는 말아주게. 난 무하고 딱 두 동이만 마셨네. 그것도 녀석이 어찌나 통사 일을 배우고 싶다고 요것조것 캐물어대는지 고기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단 말일세. 그런데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통사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중국어든 몽골어든 제대로 해서 녹봉이라도 받아먹으려면 시험을 잘 보아야 하지 않는가. 문자를 익히고 소학을 통달하고 나면 이서(耳書)*에 번역까지⋯ 휴 나도 말일세 통사들 공부하는 거 보면 숨이 콱 막힐 지경이라네. 그런데 무가 그 일을?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


* 말하는 것을 듣고 글로 옮기기 


“왜? 무는 영특하지 못했던가?”

“뭐 그것도 그렇지만. 크크. 유백증네 아들이 영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비어미가 모두 일자무식인데 그 아래에서 어찌 영특한⋯ 뭐 그렇더라고 주야장천 글을 읽게 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무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현방에서 살았다네. 휴⋯ 가엾은 것. 단 하루도 손에서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을 걸세. 자신의 뜻이 아닌 아비의 직업을 어쩔 수 없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난 그 아이를 보며 알았네.”

“거골장 일을 힘들어했나?”

“그 아인 거골장이라기보다는 유백증의 수많은 일군들 중 하나였다네. 난 말일세⋯ 유백증이 참 싫으이. 실컷 고기 얻어먹고 이런 말 하는 건 좀 아니지만 어찌 사람이 아들에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왜? 모질게라도 대했나?”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유백증은 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적이 없다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는 입 닫고 일만 했지. 일꾼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무는 아비 곁에서 꼿꼿하게 서서 기다려야 했고, 아침엔 그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현방을 정돈하고 일꾼들 기강을 잡았지. 무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유백증은 아마도 없었을 걸세.”

“그 말은⋯ 무는 명백한 유백증의 후계자였던 거로군.”

“그렇지. 누가 봐도 유백증의 현방과 재산은 무의 것이었지.”

“즉, 무만 없어지면 유백증도 무너진다?”

“자네 지금 무슨 말 하는 건가? 왜 무너져? 황이 있는데⋯ 휴. 하긴 황은 누가 봐도 유백증의 후계자 감은 아니지⋯ 그러게. 솔직히 그 날 무가 갑자기 죽은 게 사고가 아니라 다른 게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네. 하나, 내가 뭔 힘이 있어야지. 다들 서둘러 사고사라 매듭을 짓는 바람에 결국⋯. 무튼 내가 좀 더 그 녀석 이야기를 들어줄 걸 그랬나보이.”

“자네와 함께 있을 때 죽은 게 아니었나?”

“아닐세. 난 고기도 배불리 먹었겠다, 술도 얼큰하게 올랐겠다 사역원으로 돌아와 한 숨 잤지. 그런데 유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유백증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나. 무가 죽었다고.”

“어디서 죽은 것인가?”

“그게 말일세. 집 앞 개울에 빠져 있더라 그 말이지.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서 죽은 거더군.”

“넘어져? 술을 과하게 먹어서?”

“무가? 에이 무는 타고난 말술이었네. 어릴 때부터 소 잡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란 놈일세. 그 지긋지긋한 냄새 때문에라도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을 걸세. 자네, 현방 냄새 맡아봤나? 휴⋯ 그건 말일세⋯ 지옥의 냄새일세. 그걸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런데 왜 넘어지나?”

“무가 넘어지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 개울을 건너던 무가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지더란 거지. 멀쩡히 잘 걷다가 말이지. 그 바람에 머리가 깨지긴 했는데 말이야⋯. 내가 본 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더란 말이지. 얼굴에 드문드문 얼룩도 있고. 뭣보다도 입가에 거품이 있었어. 그건 말이지⋯ 그냥 죽은 게 아니라는 거 아닌가?”     

최정보는 굳이 아무 말하지 않았다. 김홍중의 말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유무의 죽음이 살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죽은 자와 직전까지 함께 있었고 죽은 자의 얼굴을 직접 본 당사자가 살인을 의심하는 데야.      

“암튼 말일세⋯ 유백증은 무를 잃고 사람이 확 달라졌다네. 그때 황이 다섯 살이던가 여섯 살이던가 그랬는데. 글쎄 유백증 이 자가 갑자기 황이를 양반가 자제처럼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그 전에는 무를 머슴처럼 대하던 자가 말일세. 사람들은 역시 젊은 마누라를 얻더니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건 마누라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의 죽음으로 너무 큰 걸 배운 거였다네.”

“큰아들에게 못해준 것까지 황에게 간 거로군.”

“그런 것도 있고⋯ 유백증은 그즈음 이 나라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돈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네.”

“돈 이상의 것이라⋯ 그게 뭔가?”

“지위. 거골장으로 번 돈으로 황의 지위를 만들어 주는 데 쓴 거지. 황은 결코 거골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처럼 피비린내 속에서 살게 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통사 이상은 되어야 한다⋯. 뭐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네.”

“음⋯ 그런데 유백증이 그렇게 황을 무와 다르게 키웠다면 왜⋯.”

“왜 황은 그렇게 한량 건달이었냐고?”

“그렇지. 자네 말대로라면 황은 좀 더 반듯해야 하지 않겠나?”     


김홍중의 집을 나오면서 최정보는 잠시 잊었던 황과 옥택의 얼굴로 마음이 가득 차오름을 느꼈다. 아버지의 돈과 지원으로 양반 자제 못지않게 배우고 생활할 수 있었던 황은 장터에서 술 마시고 오입질이나 하는 한량이 되어 어느 날 능지에 가까운 공격을 당했다. 반면 미개하고 잔인 포악하다 생각하는 달단인 옥택은 글도 못 배우고 돈도 없지만 양반 자제 이상의 격조를 갖춘 젊은이로 성장해 있다. 과연 부를 기반으로 한 부모의 지원을 능가하는 그 어떤 요인이 있는가? 게다가 옥택이야말로 황을 그렇게 만든 가장 확실한 용의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정보는 피해를 입은 황보다도 용의자에 올라있는 옥택이 더 걱정됐다. 왜 돈 많고 고기 잔치를 잘 베푸는 인심 좋은 거골장의 아들보다도 포악 무도하기로 이름난 달단 수장의 아들에게 더 애착이 가는 걸까?      

김홍중의 말에 의하면 황의 행동은 그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형의 죽음을 지켜본 황은 자신을 위장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젊디 젊은 어머니가 나이 든 아버지 밑에서 하녀처럼 혹사당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드는 반감까지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돈 많고 사지 멀쩡한 자신이 결국은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거골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극에 달했다는 것.      


“결국 황은 알았던 거지. 형이 죽은 건 거골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고. 또 자신이 죽도록 글 읽고 반듯하게 살아봤자 결국은 도살장이 유백증의 아들, 유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걸 깨닫고 일부러 비뚤게 행동하는 황이 녀석이야말로 참으로 영특한 불운아가 아니겠는가.”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밤새 잠 못 이루던 최정보는 새벽 닭이 울 때 즈음이야 잠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사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부리나케 의관을 차려입고 한성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성부 판윤 이상덕의 지침이 담긴 판결문이 도착해 있었다.      


지난 동짓달청계천 장통교 아래에서 발견한 소년의 살인사건에 대한 범인으로 인근 주민 두 명을 한성부 산하 어령*에 가두었으니 이를 엄하게 문책하고 이에 합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한성부 판윤 이상덕   


*圄囹 감옥   


“말도 안 된다. 범인이 인근 주민이라니⋯ 범인은 백정 아니면 거골장인데⋯ 게다가 준행은 수원 아이인데⋯ 그 누구도 타지에서 납치한 희생자를 자기 영역 안에서 죽인 후 드러내진 않아.”     


하지만 이상덕이 누군가. 왕실의 종친에다가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조선 땅이 없다는 자칭 타칭 왕의 남자가 아닌가. 최정보는 온몸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유황과 옥택으로 인해 잠시 소홀했던 사이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일단 판결된 사안에 대해 재수사를 하려면 왕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낱 양인 남자아이의 살인사건을 두고 이상덕이건 조정의 그 누구 건 눈썹도 까닥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최정보였다.      

잠시 숯댕이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면서 최정보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모든 사건은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이 모이면 자칫 큰 사건으로 모인다는 것을 이상덕은 모르는 걸까? 아님⋯ 그런데 왜 이상덕이 이 사건에 대해 이토록 급하게 판결을 내렸을까. 기껏해야 사내아이 하나 죽은 걸 가지고 왜 좌윤인 자신에게 한 마디도 없이 이렇게 급한 판결문을 보내온 걸까.      


“소년 준행을 살해하고 준행의 소를 훔친 박가와 송가에게 각각 장 일백 대의 태형에 처하고 犯자를 크게 얼굴에 낙인하고 3년간의 노역형에 처한다. 더불어 그들의 모든 가족은 변방으로 이주할 것이며 향후 십 년 동안 도성 안 출입을 금한다.”     


판결문을 읽는 서윤 김훈의 목소리엔 유난히 힘이 없었다. 하긴, 최정보와 함께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한 그가 아닌가. 게다가 누가 봐도 박가와 송가는 재수 없이 걸려든 게 확연한데. 이미 모진 고신으로 다 죽어가는 그들의 앞에서 처벌조항을 읽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저희들은⋯ 소의 힘으로 먹고사는 인생들이옵니다요. 그런데⋯ 어찌 저희가⋯ 그 소를 잡아먹겠습니까요⋯ 안 그래도 달단 놈들이 하도 소를 훔쳐가는 바람에 죽을 지경입니다요⋯ ”

“그 소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요⋯ 저희는 무녀 백지가⋯. 뭔가 흉측한 걸 발견했다고 하길래⋯ 먼발치에서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습니다요⋯ 그런데 저희가 죽이다니요⋯ 천부당 만부당하옵니다요⋯ 나으리⋯ 저희는 억울하옵니다요⋯ 저희는 사람을 죽이는 그런⋯ 천벌 받을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요⋯ 저희가 왜⋯.”     


준행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무고한 사람 둘이 병신이 되고 그 가족들이 몽땅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곧 한양 전역으로 퍼져갔다.      


“이게 말이 돼? 박가랑 송가는 절대로 그럴 사람들이 아니여.”

“아이고! 워디 이런 게 한두 번이어야재. 없는 것도 설운데 워디서 죽인 놈은 배부르게 소 고기 처먹고 있고 소 껍데기도 구경 못하는 불쌍한 것들만 죽어나누나!”

“한두 번도 아니고 이건 아니야. 나라님도 아시나? 아니, 안 그래도 농사짓던 소들까지 없어지고 난린데, 진짜 범인은 안 잡고 왜 엄한 백성들만 괴롭히는 거냐고?”     


그 날 이후 최정보의 주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름은 단지 준행의 죽음에 엄한 책임을 진 박가와 송가가 측은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미 한성부에 몸담은 지 이십여 년 만에 최정보에게 백성들에게 쏟아지는 억울한 처벌은 익숙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눈썹에 진하디 진한 주름이 잡힌 건 지속되는 의문. 누가? 왜?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행의 한가운데 달단이 있다.

거골장이 희생 목표 중 하나다. 

젊은 소년들이 죽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한 섣부른 결론으로 양인들이 희생되고 있다. 

이 사건의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의외로 거물인지 모른다⋯.    

 

“휴⋯ 파고들수록 미궁이군.”     


그랬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건 그 미궁 속으로 들어갈수록 최정보 자신조차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진실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대로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고 사지가 잘리는 사례를 숱하게 보아온 그였다.      


“겁나나?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소름이 끼친다. 뭔지 모를 이 사건의 실체를 직접 봐야 한다는 그 사실이⋯ 모든 걸 알아내지 않아도 되는 직책으로 옮겨갈까? 사역원 제조같이⋯ 아,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난 한성부 좌윤이다. 이 나라 조선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고 모든 범죄를 소탕할 책임이 있는⋯ 그리고 그 범죄는 양반을 대상으로 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대상할 범죄는 모든 범죄인 것이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는 이 말들은 최정보의 양심의 소리였다. 준행을 죽인 범인은 따로 있다. 그들은 백정이다. 그들을 시킨 자가 따로 있다. 준행은 단지 소를 끌고 있어서 죽었다기보다는 뭔가 더 큰 음모를 위해 희생된 재물이다. 십사 세의 순진무구한 소년의 천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명한 피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한⋯.      

“나리. 유백증이 보낸 하인이 도착해 있습니다요.”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 최정보에게 서윤 김훈이 들어와 아뢰었다. 우백증이 하인을 보냈다? 혹 유황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래 무슨 일이냐.”

“예 나리. 황 도령이 뵙기를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요.”

“황이? 나를”

“예. 직접 찾아뵙고자 하오나 지금 당장은 이곳까지 움직이는 것이 불가하다 하시며 혹 시간을 내어 누추한 집을 찾아주신다면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하셨습니다요.”     


그 날은 잠시 깨어난 황이 난설을 거꾸로 매달라, 그래야 자신이 살고 그 아이가 산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혼절한 지 보름이 지난 후였다. 최정보는 업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남촌으로 향했다. 황이라⋯ 그 아이는 이제 깨어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난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아이는 유백증의 집에 있을까⋯ 혹 그 사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일까⋯ 그렇지 벌써 보름인데⋯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썼구나⋯.”     


유백증의 집이 보이고 나지막한 담장이 그 끝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최정보의 머릿속은 다시 그날의 처녀 아이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누구일까? 왜 그 날 현방에 있던 것일까? 그 아이가 본 진실은 무엇일까? 유황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범인들의 얼굴 또한 분명 보았을 터. 그렇다면?      


“난설에게 직접 묻자. 분명 범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상덕 대감의 판결이 그릇된 것임을 나는 끝까지 밝혀낼 것이다.”   




대문이 열리고 드러난 유백증의 집 안채는 기존의 활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일꾼들은 부지런히 오가고 부엌에선 저녁밥 짓는 연기로 흰 연무로 가득했다. 보름 전, 아들을 장사 치르려던 유백증의 까맣게 탄 얼굴에도 조금의 화색이 돌아와 있었다.      


“나리. 오셨습니까요.”

“그래, 무탈하게 잘 지냈는가. 자네 얼굴이 십 년은 젊어 보이는 걸 보니 황이가 정신을 추스른 것인가?”

“예. 상처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화농도 줄고 통증도 완화된 듯 오늘부터 흰 죽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 참 잘 되었네. 그래 황이는 어디에 있는가?”

“안채에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아닐세. 네 그전에 잠시 만나볼 사람이 있네.”

“누구?”

“그 아이 말일세. 황이를 처음 발견했다던 처녀 아이. 어디에 있는가?”

“그 아이를 나리께서⋯ 아, 예.”

“설마 그 사이 그 아이에게 다른 못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당치 않으신 염려이십니다. 그 날 이후 아무도 그 아이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난설은 하인들이 지내는 사랑채 가장 깊숙한 방에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진한 먹 향기가 쏴 하게 최정보의 코를 찔렀다. 분 냄새가 아닌 먹향이라⋯.  

   

“잘 지냈느냐.”

“예. 어서 오십시오.”

“무엇이냐?”

“예. 그저 심심해서 몇 자 적는 것이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냐?”

“예.”     


최정보는 잠시 난설이 적은 글들을 보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잘 쓴 글씨가 종이 위를 차분하게 걷고 있었다.      

“잘 쓰는구나.”

“⋯.”

“내 오늘은 너에게 긴히 물어볼 것이 있다.”     


최정보는 밖에 서 있던 하인을 물리고 문을 닫아걸었다. 그런 행동이 자칫 난설을 겁나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난설은 미동도 않은 채 최정보를 응시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너와 나만이 알아야 할 것이다.”

“예.”

“그 날 유백증의 현방에서 본 자들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느냐?”

“예.”

“내가 누군가를 네 앞에 데리고 오면 그 자가 그중에 있던 것을 증언할 수 있겠느냐?”

“예.”

“그래, 알았다. 내 조만간 그를 데리고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순간, 오늘 나에게 한 약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자신의 눈앞에서 가만히 끄덕여지는 난설의 작은 얼굴을 보며 최정보는 자신이 난설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해했다고 증명한다는 것. 이미 악몽 같은 현장에서 모든 것을 잃은 어린 처녀 아이에게 그것을 다시금 기억해 내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황의 방으로 향하면서 최정보는 그 어떤 잔인무도한 운명이 저 어린 여자의 삶을 저토록 모질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난설은 분명 양반가의 자식이었을 거다. 길게 땋아 내려진 머리 하며, 특히 조금 전 엿본 저 글씨는 글 꽤나 읽었을 양반가 자제들에게서나 간혹 발견되는 훌륭하고 힘 넘치는 글씨체였다. 단정하고, 지조 있으며, 의식이 있는 글씨. 그런 글씨는 흔치 않고 그런 글씨를 쓴다는 것은.      


“최근 희생당한 가문을 좀 알아봐야겠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황의 방문을 열던 최정보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황이, 일어나 반듯하게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갔던 황이었다. 하지만 최정보의 눈앞에 앉아 있는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가 넘쳐나는 도인의 기상이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최정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 황은 늘 쭈뼛쭈뼛했으며, 매사에 자신이 없고, 종종 불만을 담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에선 그러한 기운들이 모두 사라졌다. 뭐랄까. 분명 같은 얼굴인데 전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지닌 다른 얼굴? 최정보는 방금 전까지 마음을 가득 채우던 난설의 얼굴을 일시에 날려버릴 정도로 놀랐다.      


“황⋯ 자네⋯?”

“어서 오십시오. 귀하신 분께 이토록 무례한 청을 드려 죄송합니다.”     


황은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자리에 앉아 깍듯하게 절까지 올렸다. 말투 또한 뭔가 예전과는 달랐다. 진중하면서도 무게감이 실려 있는 것이 마치 지난 보름 동안 아주 먼 곳으로 가서 도를 닦고 온 듯했다.  

    

“아, 아니⋯ 자네 괜찮은가? 이렇게 일어서 있어도 되는 것인가?”
 “예.”

“허허. 거 참. 천지신명이 도우셨구먼. 다행이야 다행.”

“나리.”

“그래.”

“저를 살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허 그건 말일세⋯ 내가 아니라⋯ 아, 아닐세.”

“나리는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실은 그에 대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렇게 뵙고자 청을 넣었습니다.”

“자네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예.”

“그게⋯ 무엇인가?”

“전,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왔습니다.”

“뭐라? 지옥?”

“믿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전 지옥불 속에 던져졌고, 제 몸과 영혼이 거의 유황 속으로 사라져 갔을 즈음. 갑자기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는 건가?”

“그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제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섯 개의 영혼이 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투지 않고 미리 순서를 정한 듯 차례차례 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건 마치 하루 일을 마치고 산속 작은 움막으로 들어가 편히 쉬려 하는 화전민들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아늑하고 조용한 휴식을 취하려는.”

“그럼 자네는 그들이 자네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말인가?”

“예.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전 그다지 제 몸에 애착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명이 제 몸속으로 막 들어가는 순간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 어떻게?”

“반 정도 제 속으로 들어간 그가 저를 쳐다보았고, 그리고 한참 동안 저를 보더니 손을 내밀었습니다. 잡으라는 듯. 그리고 전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았습니다. 그 후 얼마 동안 미칠듯한 뜨거움과 공포, 메스꺼움 등을 느꼈고 그들과 저, 이렇게 우리 모두는 손을 잡고 몸을 동그랗게 만든 채 고통을 함께 견뎌냈습니다. 그다음.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나리께서 저를 붙잡고 계셨습니다.”

“다섯 영혼이라.”
 “예. 허무맹랑하다 생각하실 터지만 사실입니다.”

“그래, 그들의 얼굴을 보았는가?”

“예. 열네 살 먹은 소년 둘과 일흔아홉 살 먹은 노인, 그리고 서른아홉 먹은 사내와 서른 살 먹은 여자였습니다.”

“뭐라? 그렇게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예.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서로가 알고 있습니다. 전 지금 여섯 사람의 생각과 지혜와 힘을 가진 것이지요.”

“자, 잠깐. 자네 혹시 열네 살 먹은 소년⋯ 둘이라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혹 그들이⋯ 누구인지 좀 더 소상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준행과 동구라는 아이들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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