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면 만화리 외할머니의 뽀얀 동치미

외할머니와의 기억 한 자락 남기려 글을 씁니다.

“으데. 그른기 어딨노.”

“무시를 잘 씨꺼가 소금 늣코 물늣코 단거 쬐끔 늣코 기달리면 되제.”

“아이고.. 니는 모한다.”

“할매가 해줄끼니까 그냥 무라..”

“니 얼라때 내가 업고 댕기따아이가...”

“버러 커가 동치미를 갈키달라꼬..하하하."


지금은 시멘트 마당에 벽돌집이지만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외갓집은 기와를 얹은 흙집이었다.

싸리나무로 만든 울다리를 아주 커다란 단감 나무 두 그루가 지켜주고 있었다.

아니 아주 커다란 단감 나무 곁에 싸리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내가 외할머니 등에 업혀 마실을 다니고 외할머니 손을 잡고 동네 어귀를 걷듯.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흙마당이 있고 제일 가까이 쟁기가 보였다.

쟁기의 짝꿍 소가 지내는 외양간에는 늘 소죽 끓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그 냄새를 쫓아가면 반드시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갱아. 왔나.”

표현 많지 않은 경상도 사나이라 그저 제일 반갑다는 뜻이다.


외양간을 지나 마당 가운데에 소담스럽게 자리를 잡은 외갓집은 내 기억 속에 흑백 필름처럼 남아있다.

외할머니가 ‘정지’라고 부르는 부뚜막이 있는 부엌을 지나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광이 나온다.

한 낮이라도 혼자 들어가긴 어쩐지 으스스 한 느낌이었다.

그 곳을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라면 으스대며 내가 주인인 듯 들어가 외할머니의 맛난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말캉한 곶감, 튼실한 감자와 고구마, 말린 대추, 잘 익은 홍시, 껍질 옷을 입고 있는 옥수수.


그리고 커다란 장독이 있었다.

장독은 내 무릎 높이부터 내 키만큼 큰 것도 있었다.

이 장독이 바로 외할머니의 손맛의 결정체들이 사는 곳이었다.

외할머니의 장독은 참으로 컸다.

너무 커서 까치발을 들어도 안이 안보일 정도였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장독이 큰지 몰랐다.


외갓집은 늘 그리운 곳이다.

7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을 온 엄마 탓에 명절에 외갓집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일년에 한번 갈까 말까한 곳인데 지금도 나는 외갓집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마 나 보다 더 그리웠을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 등의 따스함 때문일까.


중학생 쯤 되면서 그래도 명절이면 외갓집을 가게 되었고 가끔은 방학 때도 갔었다.

그 때 마다 받는 외할머니의 밥상은 참 별거 없었는데 늘 가득찼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났고 밥 안먹는 우리 삼남매의 밥 그릇을 싹 비우게 했다.

그 중 나는 외할머니의 동치미를 정말 좋아했다.

그냥 뽀얀 국물에 무가 덩그러니 있는 모양새가 입 짧은 나에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밥상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새콤하고 달큼한 향에 눈이 아닌 내 코와 혀가 반응했다.


외할머니의 동치미는 참으로 단순했다.

가끔은 배나 고추들이 보일 때도 있었는데 아주 극소량이었다.

무를 통째로 넣어 만든 동치미를 외할머니는 총각무처럼 길쭉길쭉하게 썰어 밥 상에 턱 놓으시고 옆에 집된장으로 만든 강된장을 하나 끓여내셨다.

젓가락질이 서툰 나는 그냥 동치미를 하나 집어 들고 된장에 쿡 찍어 밥과 먹었다.

새콤 달큼한 동치미와 구수한 된장의 맛은 푸근하고 정다운 외할머니 느낌이었다.

외할머니는 그냥 먹기 심심하다 싶으면 동치미를 은행나뭇잎 모양으로 썰어 국물째 떠 먹게 하셨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총총총 동치미를 채썰어 참기름 넣고 빨갛고 고운 고춧가루를 넣어 조물조물 무쳐 흰 밥에 비벼주셨다.

비빔밥의 시그니처 달걀후라이 따위는 생각도 안나는 맛이었다.

그 동치미는 엄마도 외숙모들도 모두 좋아하고 겨울이면 내내 가져다 먹는 별미였다.

장독이 큰건 다 커서 시집 장가간 자식들이지만 늘 챙겨주고 싶은 외할머니의 마음의 크기였다.


그런 동치미를 나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한날은 엄마에게 동치미를 담그자고 했다.

엄마는 물이 다르고 햇빛이 다르고 바람이 달라 안된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외할머니의 그 맛이 안난다고 했다.

레시피가 없을 만큼 평범한 외할머니의 동치미는 레시피가 없어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사진으로라도 남겨둘걸.

요즘 흔하디 흔한 것이 음식 사진인데 그 흔한 동치미 사진 한 장 남겨 놓지 못했다.

동치미가 특별한건 내 밥 상 앞에 앉아 계시던 외할머니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이 크게 한 숟갈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 기억 속 두동면 만화리 외할머니의 뽀얀 동치미의 맛과 향은 점점 또렷해지는데 아흔이 넘으신 외할머니의 기억 속의 나는 점점 하얘진다.

나를 보셔도 이젠 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니 얼라때 내가 업고 댕기따아이가...”

“버러 커가 동치미를 갈키달라꼬..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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