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나는 '옥수수수염차'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려 애쓴다. 맛이 있어서도, 효능이 있어서도 아니다. 마음이 열리면 입이 열리는 나. 모든 의지를 총동원해 입으로 부어 넣는다. 그렇게 나는 편의점에 갈 때마다, 물보다는 옥수수수염차를, 둥굴레차보다는 옥수수수염차를 선택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불편한 편의점'의 한 인물이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 손에 늘 들려 있던 '옥수수수염차', 제품을 보고 마실 때마다 나는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옥수수수염차'는 그 소설과 나를 연결해준다.
정확히 1년 전 출간된 나름 신간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 딱지를 못 떼고 있는 책
서재를 찾는 분들이 가장 즐겨 찾는 소설
소설을 자주 읽지 않는다. 한쪽이면 충분한 이야기를 수백 쪽으로 늘려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사실, 문학 속에 담긴 생각의 확장들, 그 세계 속에서 연결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아직은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 읽어볼까? 하고 집어 든 책이 '불편한 편의점'이었다. 빠르게 읽고 책을 닫았지만, 그 여운은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닫히지 않고 있다.
뭔가 불편해 보이는데, 뭔가 편해 보인다. 감동은 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말이 쉽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뭔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게 맞잖아' 맞다. 그게 맞다. 근데 어쩌라고.
불편한데 자꾸 가고 싶은 편의점이 있다
이런 모순적인 문구가 있을까? 왜 불편한 데 가냐고. 갈 거면 불편하다고 말하지나 말든가. 어쩌면 그 불편함은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한 채찍인 거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러나 가고 싶은 거다.
모든 것이 그렇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누군가에게 편함을 안겨 준다. 누군가의 편함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떠안게 한다. 몸도 편하고 맘도 편한 건 없다. 다만 어느 한편의 편함이 다른 한편의 불편함을 압도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불편한 편의점'을 찾는 이유. 그것은 불편함이 주는 끌림이 있기 때문 아닐까? 시대가 제시하는 '편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그게 사실 불편한 거다. 아닌 거 알면서 대안이 없으니 살아가는 거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불편한 인생을 살아가는 거다. 그걸 알아주니 찾는 것이다.
세상은 불편한 사람을 찾고 있다. 죽어가는 세상을 살릴 유일한 대안, '불편함'. 서로 눈치 보며 '네가 먼저...' 하는 사이, 세상은 죽어가고 있다. 나의 편함을 누군가의 불편함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편함이 나의 편함으로 다가오는 따뜻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도, 우리 서재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한 불편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편함이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이 삶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내 삶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도.
사람들은 불편함을 원한다. 진짜 그렇다. 나는 믿으련다. 그래서 내가 '불편한데 자꾸 가고 싶은 곳'이 되련다. 한번 해보련다.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