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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l 08. 2018

격정적인 시대 속을 고요하게 흘러가는

<모스크바의 신사>

의외의 책을 만났다.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를 찾았다. 아무런 정보없이 처음 <모스크바의 신사>를 받아 들었을때, 무척 난감했다. 먼저 7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부담스러웠다. 러시아에 관한 소설은 이름부터 배경까지 모든 것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과연 내가 <모스크바의 신사>를 잘 읽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다음 장이 궁금했고 잠잘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더더더 읽고 싶어지는 책이 되었다.

그냥 소설일 뿐일까.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수감이 시작된 1922년, 러시아에 진짜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 궁금해 책을 읽다 멈추고 검색을 했다. 1917년 10월에 혁명이 일어났고 1922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졌다.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사회주의 사회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를 쓴 백작은 자신이 머물던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평생 갇혀 지내게 된다.

당시의 러시아는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힌 시대였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토록 혼란스럽고 격정적인 시대를 이토록 평온하게 표현하다니. 책을 읽을수록 깊은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라앉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자꾸만 빠져들었다. 오래만에 묘하게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1922년 호텔 연금이 시작된 해부터 1954년까지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인간의 32년간 삶을 고스런히 보여준다. 백작 또는 당시에 백작과 함께 지냈던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소설화 시킨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스크바의 신사>의 묘사와 감정들은 무척 디테일하다. 러시아 혁명후의 이야기지만 이 책은 혁명 후 러시아의 상황이나 혁명을 돌파해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백작은 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현실에 적응해 간다. 과연 이런 인물이 있을까.

부유하고 고귀한 백작은 하루아침에 스위트룸에서 작은 골방으로 쫒겨난다. 그것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평생을 메트로폴 호텔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죽음만이 그를 자유롭게 할뿐. 그에게 주어진 자유는 호텔 안이 전부였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호텔이라는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머무는 곳은 호텔 안이지만 그의 삶은 러시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런 변화 과정들이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만드는 작가의 글솜씨가 놀라웠다.


긍정적이고 지적이며 겸손한 백작의 성격은 예전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호텔 안의 직원, 호텔 투숙객들과 또 다른 관계를 맺어가는 백작의 행동은 흥미로웠다. 백작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킨 니나 쿨리코바라는 아홉 살 배기 여자아이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러시아 여배우 안나와의 관계, 32년간 좋은 친구이자 직장동료로 함께 지낸 에밀, 안드레이, 마리아등 <모스크바의 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백작처럼 따뜻하고 독특하고 즐거웠다. 하물며 백작을 감시하고 미워하는 악역인 비숍의 행동조차 '각자 자기만의 이유가 있으니까'라고 납득하게 된다. 제목처럼 책 속의 모든 인물이 각자 나름대로의 신사였다.

백작의 삶은 크게 소피야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니나가 잠시 맡아달라는 그녀의 딸 소피야는 어느새 백작의 딸, 소피야 로스토프로 살아간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똑똑한 백작의 전부인 소피야. 아마 백작에게 소피야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감금된 장소가 호텔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었다면 그는 32년간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스크바의 신사>는 단순하게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의 인생을 읊조리는 책이 아니다. 결코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서는 알수 없는 이유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 행운가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가 말했다. 

지독한 불운이 나중에는 행운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백작에게 평생 연금형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아마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도 어떤 부분에서는 혼란스러운 러시아에서 벗어난 호텔에서의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노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글 뒤에 숨겨진 백작의 좌절과 혼돈을 느낄 수 있었던 구절에서는 과연 이런 삶을, 산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살아낸다고 말해야 할까. 끊임없이 질문했다. 글과 주인공은 평온한데 책을 읽는 내 머릿속만 혼란으로 가득찼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잔잔한 호수에서 갑자기 꽤 큰 물고기가 뭍으로 펄떡 뛰어나와서 놀래키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흐름보다 상황에 대처하는 백작의 우아함에 빠져있었다. 32년간 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 백작은 그 엄청난 일을 준비했을까.

읽을수록 책의 두께가 상관 없어지는 책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의 격정적인 시대를 담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러시아를 살아온 열정적인 투사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역사의 변화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만의 삶을 고요하게 이끌어가는 백작의 이야기이다. 급변하는 사건들이 많지만 <모스크바의 신사>는 그 모든 굴곡을 당연한 듯 꿀꺽 삼켜 버린다. 신기한 책이다. 미국 작가가 쓴 볼셰비키 혁명 이후를 사는 러시아 인의 이야기. 32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도록 이끌어가는 작가의 힘. 흥미로운 책이다. 흥미로운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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