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그때의 책 03화

당신에게도 눈부신 친구가 있나요?

<나의 눈부신 친구-나폴리 4부작>

by 은수

이탈리아 여행 때 남부 일일투어를 했다. 위험하지만 그 위험을 뛰어넘을 만큼 멋진 풍경을 선물해 준다는 이탈리아 남부는 나처럼 짧은 연차를 이용해서 가는 여행자들에게는 꿈의 도시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하루 동안 빡세게 돌아보는 남부 투어였는데 역시나 다시 이탈리아를 간다면 다른 곳은 제쳐두고 남부부터 달려가고 싶을 만큼 그곳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남부로 가는 내내 버스에서는 가이드의 긴 설명이 계속되었다. 새벽부터 일찍 서두른 탓에 졸다가 듣다가를 반복했는데 <나의 눈부신 친구>를 받아들고 가이드의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 걸 보면 그때는 제대로 들었나 보다. 가이드가 말했다. 나폴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있다.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폴리 출신이라는 것만 알지, 현재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덮을 수 없는 책이라고 했다. 한국에 출판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하니 언젠가는 한국어로 번역이 될 테니까 꼭 찾아서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남부지역에 대해 설명하던 중 가이드가 열의에 넘쳐 이야기하던 책이 바로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었다. 접하기 쉽지 않은 이탈리아, 그것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는 얼굴 없는 작가의 소설. 처음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으며 어디선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바로 남부 투어를 할 때 가이드가 꼭 읽어보라고 했던 그 책이었던 것이다. 하. 나도 몰래 감탄이 흘러나왔다. 당시에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국에 가면 꼭 읽어봐야지 생각했지만 생소한 저자의 이름과 한국어로 어떤 제목인지도 모르는 책은 곧 잊혀졌다. 그런데 나폴리 4부작의 1권 <나의 눈부신 친구>가 이렇게 나에게 왔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무척 특별한 책이 되었다. 기대감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곧 그 가이드가 그렇게 꼭 읽어보라고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굉장한 흡입력으로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는 책이었다. 이탈리아 언론에서 밝히기 위해 숱하게 노력했지만 여성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본명을 비롯한 모든 신상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엘레나 페란테라는 작가에 대한 소개부터 이 책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책은 두껍다. 1권도 44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고 2권은 그것보다 더 두껍다. 세계 43개국에서 번역돼 500만 부 이상이 팔린 이탈리아 문학의 돌풍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폴리 4부작 <나의 눈부신 친구>지만 두꺼운 책의 두께에 잠시 멈칫하게 될 것이다. 나도 이해한다. 나도 책에 대해 이미 들었고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쉽게 첫 장을 들추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나폴리 4부작 중에 3권까지가 출간되었는데 3권을 모두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의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어보길 권한다. 아마 당신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당장 2권과 3권을 읽고 싶은 테니까 말이다. 책의 두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와락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 첫 장에는 4부작을 함께 할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인물이라기보다는 등장하는 가족들이라고 해야 맞겠지. 낯선 이탈리아 이름과 수많은 집안의 소개는 보기만 해도 복잡하고 책에 대한 두려움만 안겨준다. 하지만 등장인물은 읽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 나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각 집안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리 4부작은 릴라와 레누의 평생에 걸친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릴라와 레누, 두 여인의 단편적인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우정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변화하는 이탈리아의 모습과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까지 아주 긴 호흡을 가진 대하드라마와 같은 책이다. 4부작 중에 <나의 눈부신 친구>는 릴라와 레누의 인생 중에서 아이부터 소녀에 이르는 시간을 보여준다.

릴라가 사라진 현재의 어느 날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그녀들의 유년기로 돌아간다. 자신만의 생각이 뚜렷하고 단단해서 고약해 보이는 릴라는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였고 그런 릴라는 레누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레누에게 릴라는 평생에 걸쳐 넘고 싶은 존재가 되었고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는 그녀들의 관계의 시작과 사춘기를 거치면서 릴라에 대해 레누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들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설마 그런 걸까? 릴라는 부모님이 벌로 내 중학교 진학을 취소하게 하려고 나를 꼬드긴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중학교에 가지 못할까 봐 그렇게 서둘러서 나를 다시 데려온 걸까? 세월이 흘러 오늘에 와서야 나는 생각해본다. 사실 릴라는 때에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 릴라, 레누와 비슷한 관계를 가져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으면서 우정과 질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여자들만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아마 당신도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에 릴라와 같았거나 아니면 레누처럼 누군가를 선망하고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또래 친구가 이 세상의 전부인 때가 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럽고 뛰어난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나도 그 친구와 같아진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 <나의 눈부신 친구> 속의 그녀들은 바로 그런 시간 속에 있다. 물론 레누의 시각으로 쓰인 이야기라 릴라는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책 속에는 가끔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생각해 보는 구절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봤다. 레누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과연 릴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는 아직 릴라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이 더 기대가 된다. 다음 책에서는 릴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읽어볼 수 있을까.

책을 읽을수록 그녀들이 살고 있는 나폴리의 마을 위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책 속의 모든 인물들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미니어처처럼 그녀들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물 흘러가듯 거침이 없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궁금해 자꾸 읽고 읽고 읽었다.

릴라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가? 나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여름 방학 동안에 혼자서 공부했단 말인가?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보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레누가 릴라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들을 읽다 보면 릴라는 분명 뛰어난 아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치열하게 노력하는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식구들 이름으로 대출증을 만들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바람에 그녀 집안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는 상을 모두 휩쓸었다는 부분은 그녀의 치열한 노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레누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릴라의 마음을 알고 싶어졌다. 특히 처음에는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표현이 레누가 릴라를 생각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라의 대답을 들어보면 레누에게 릴라뿐 아니라, 릴라에게도 레누는 선망과 질투의 사이에 서 있는 친구가 아니었을까.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나의 눈부신 친구>의 속 페이지에는 릴라와 레누의 어린 시절이듯한 그림이 표현되어 있고 겉에는 소녀 두 명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은 아이가 소녀가 되고, 곧 어른이 될 두 주인공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에 대한 수많은 극찬이 가득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해도 내가 재미없으면 그것은 재미없는 책일 뿐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 역시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멋진 소설로 읽힐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냥 길고 디테일한 여자 두 명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우선 소설을 읽는 즐거움, 잘 쓰여진 이야기에 빠져드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도 있다.

나폴리 4부작 중에서 이제 막 1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를 마쳤다. <나의 눈부신 친구>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릴라의 결혼식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터질 것만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어른이 되어가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2권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는 어떤 사건과 미묘한 감정들의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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