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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Dec 29. 2023

떠오르는 생각 001

아빠의 잔

시내 중심에 세워진 큰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조경이 아주 멋지고 단지 내 라운지와 카페가 운영되는 소위 '좋은' 아파트다.


우리가 그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을 걱정하고 고대하던 부모님이 며칠 전에 다녀가셨다. 여느 때처럼 김치와 반찬을 가득 가지고 오셨다.


그 무거운 짐을 다 옮기고 나니 아빠가 선물이라며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조악한 컵 두 잔이 들어 있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장인이 만든 것 같지도 않은, 딱 봐도 보잘것없는 잔이었다. 아빠는 이 잔이 마치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선물하며 남편에게 자랑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우리 엄마는 마트 구경을 좋아한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각종 마트에 다니는 걸 좋아한다. 물론 현대인답게 모든 대형 마트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매번 휴대폰 번호 혹은 어플로 포인트를 적립한다. 난 당연히 엄마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의 회원이 아니었다. 가입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내가 나고 자란 시골 동네에는 농협 하나로 마트나 저렴한 식자재 마트만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어릴 땐 부모가 가장 큰 세상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지식인이었고 아빠는 무슨 일이든 해결해 주는 든든한 보호자였다. 부모가 두렵고 원망스럽고 미웠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한 번도 그들이 만들어준 세상이, 그리고 그들의 세상이 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세상은 서로 다를 뿐 무엇이 더 좁고, 더 넓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지면이 내 부모의 것과 다르고, 그 차이는 '자식에게 더 나은 것을 주려는(실제로 과연 더 나은 것일까에 대한 대답은 차치하고)'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빠의 잔은 너무 예쁘지 않지만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울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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