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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공작 Dec 29. 2023

운명

몇 년전, 일일 드라마 보조작가를 한 적이 있었다.


보조작가가 캐스팅 오디션에 갈 일은 없는데,

당시 감독님은 같이 으싸으싸 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었고, 오디션날 감독님이 작가님과 먼저 미팅을하면서, 왜 보조작가들은 안오냐고 하셨다고 한다.

작가님 연락을 받고 집에 있다가 총알같이 나갔다.


재택근무를 하던 때였고, 갑작스런 연락이 짜증날 법도 한데 오디션 참여가 흥미로와 전혀 짜증없이 여의도로 갔다.


남,녀 주인공을 먼저 진행했는데, 정말 초신인들이었다.

현장에서 준 대본을 즉흥적으로 연기를 하는데, 못하지는 않는데 잘하지도 않고..

다 비슷비슷해서 누가 더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다하다 지루해서 몸이 베베꼬이는데...


감독님은 누구도 딱히 내켜하지 않았고,

당시 설명을 들으니 곧 젊은 남녀가 많이 나오는 미니시니즈 오디션이 있는데 대부분 그걸 하려고 해서 그나마 일일드라마에 의지를 보인 배우들이라 했다.


알다시피, 일일드라마에 나오는 나름 일일드라마 전용 배우들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일일드라마로 시작을 하면, 일일드라마에 고정이 되어가는 분위기라..

(물론 돋보이는 스타성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일일드라마를 선호하진 않지만, 이것이라도 하겠다고 오디션을 보는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그들의 간절함이 보여,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뭉클함은 뭉클함이었고,  지루한 연기에 지루함이 극에 달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중년의 여배우가 왔다.


여주인공 엄마역으로 일일드라마에 종종출연하는 배우를 확정은 아니지만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캐스팅 업체(팀?)에서 갑자기 방문한 여배우를 한번 넌지시 언급을 했었고, 감독님은 딱히 답을 주지 않았었다. 그 여배우는 볼 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연락받고 바로 왔다고 했고,

즉석에서 대본을 받고 연기를 했는데, 감정을 잘 살렸고 즉석에서 바로 눈물까지 흘렸다.

감독님은 사전에 대본 유출한 것 아니냐고까지 했고...


신인배우들의 연기가 잘하는 건지 판단이 안되는 와중에,  ‘연기란 이런 것이구나’를 비로소 봤다. 물론 이여배우도 연기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시 경력직은 달랐다. (극상 주인공 엄마가 20대의 젊은 시절까지 직접 연기해야 하는데, 실제 드라마가 시작되고 나서 연기 어색하다고 욕 좀 먹었었다.)


며칠전, 그 여배우의 인스타에서,

그 드라마가 본인이 다시 배우로 설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드라마라는 말에.. 오디션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그 날의 오디션 현장이 이 배우의 운명의 한 갈림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에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걸음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2023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나도  2024년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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