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할 땐 '우리', 사고 나면 '너'?

소설 『누운 배』 특집 1

by 업스트리머

부제 :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비겁한 공식, 이혁진 『누운 배』



'우리'라는 달콤한 마취제


​회의실의 공기는 언제나 끈적하다.

팀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묻는다.

“이건 우리 팀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해서 결정한 거야. 그렇지?”


‘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유대감에 취해, 우리는 가슴속에 일렁이는 불안한 경고음을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안도감, 그 마취제가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삐걱거리는 순간, 그 끈끈했던 '우리'는 신기루처럼 증발한다.

사고의 원인을 찾는 화살은 정교하게 궤적을 틀어 실무자인 우리의 목소리를 겨냥한다.

어제의 동료들은 "나는 그때 좀 위험해 보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라며 슬그머니 발을 뺀다.


분명 같이 노를 저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만 침몰하는 배 위에 홀로 남겨져 있다.

조직이 말하는 ‘협력’은 위기의 순간 책임을 n분의 1로 쪼개 기어이 개인을 제물 삼는 잔인한 연극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소설 『누운 배』 속 기시감


​거대 조선소에서 수천억짜리 배가 옆으로 누워버린 전대미문의 사고를 다룬 소설 『누운 배』는 이 비릿한 오피스 라이프의 민낯을 비춘다.


침몰해가는 배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금 우리의 사무실과 소름 끼치게 닮아 있다.

​소설 속 경영진은 누워서 썩어가는 배를 앞에 두고 '합의'라는 명분 아래 책임의 화살을 공중에 흩뿌린다.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


​조직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책임의 무게를 무한히 분산시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를 만든다.

우리가 회의실에서 보낸 긴 시간은 아이디어를 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배가 누웠을 때 누구 하나 총대 메지 않아도 될 ‘집단적 면죄부’를 만드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임 분산'의 알고리즘


​AI는 왜 조직이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를 해체하는지 그 구조를 분석한다.


리더에게 '합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 공학적 '보험'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다 같이 결정했잖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실책을 세탁하는 방어막이다.


​이런 '책임 분산'의 시스템이 고착된 조직일수록 실질적인 해결사는 사라지고, 책임의 그물을 피하는 '기록 기술자'들만 살아남는다.


AI 데이터는 경고한다.

책임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곳에선 혁신이 아니라 '비겁함의 경쟁'만이 살아남는다고.

결국 조직이라는 배는 계속 기울고, 그 무게는 가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실무자들에게 쏠린다.




침몰하는 배의 1등 항해사가 되지 마라


이제 '우리'라는 마취제에서 깨어나야 한다.

배가 기울 때 나만 밀려나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


​결정의 로그를 남겨라 : 회의록에는 담기지 않는 '진짜 논의 과정'을 사적으로 기록하라. 누가 어떤 반대를 묵살했고, 어떤 근거로 무리하게 추진되었는지 남기는 메모가 훗날 당신의 유일한 구명정이 된다.


'합의'의 함정을 경계하라 : “우리가 정한 거다”라는 모호한 결론이 나올 때, 자신의 역할과 권한 범위를 명확히 질문하라. 질문하는 자는 피곤해 보이지만, 질문하지 않는 자는 독박을 쓴다.


​조직 밖의 '내 배'를 건조하라 : 소설 속 주인공이 결국 조직이라는 가짜 성벽을 나와 자신의 길을 갔듯, 회사 밖에서도 통할 당신만의 실력을 증명할 포트폴리오를 매일 갱신하라. 조직의 부조리에 신음하면서도 발을 떼지 못하는 건 내 배가 없기 때문이다.


회의실의 ‘우리’는 환상이다.

배가 기우는 순간 그 환상은 우리의 등을 떠밀 것이다.

남들이 책임을 흩뿌리는 기술을 연마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키는 기록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조직의 선의가 아니라, 우리가 쥔 차가운 팩트뿐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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