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회사는 다 그래" 꼰대의 말, 이제 내가 하다니

소설 『누운 배』 특집 6

by 업스트리머

부제 : 기울어진 바닥을 '수평'이라 믿게 된 슬픈 적응력, 이혁진 『누운 배』



괴물이 되어버린 나를 마주한 순간


​입사 초기, "이거 완전 비효율적이고 말도 안 되는데?"라며 매일같이 동기들과 씹어대던 기형적인 사내 문화와 보고 프로세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 미친 프로세스에 맞춰 칼같이 문서를 뽑아내고 있다.

심지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후배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내뱉는다.

"원래 회사는 다 이런 거니까 토 달지 말고 그냥 해."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내 안의 상식이 무너지고,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부조리'가 어느새 나의 '일상'이자 '생존 규칙'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시스템의 모순에 분노하던 뜨거운 신입사원은 온데간데없고, 조직의 논리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서늘한 꼰대 한 만 거울 속에 서 있다.




​구린 것을 구리다고 말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거대 조선소가 붕괴해 가는 과정을 서늘하게 파헤친 소설 『누운 배』는 우리가 어쩌다 이런 괴물이 되었는지 그 뼈아픈 진실을 폭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썩어가는 배를 앞에 두고도 순응하는 선배들을 보며 이렇게 독백한다.


​"높은 곳에서 질금질금 떨어지는 쾌락과 평안을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대가라고 여겼기 때문에 구린 것을 구리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지켜야 할 가족과 체면이라는 것이 생긴 사람들이었다. 서른하나, 나 역시 곧 그 대열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조직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족과 체면'을 볼모로 잡는다.

위에서 질금질금 떨어지는 월급과 직함이라는 '작은 안락함'에 취해, 우리는 부조리를 보고도 분노하는 법을 서서히 잊어버린다.


심지어 누워서 썩어가던 배를 멀쩡한 배라고 믿는 소설 속 경영진들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자기기만에 빠져든다.




​안락함과 맞바꾼 '정당화된 인지 부조화'


​AI는 이 서글픈 체념의 과정을 '정당화된 인지 부조화'라는 심리학적 기제로 진단한다.


'이 시스템은 구리다'는 이성적 판단과 '그럼에도 시키는 대로 순응한다'는 행동 사이의 끔찍한 괴리를 견디기 위해, 우리의 뇌는 '가족을 위한 희생'이나 '원래 다 그런 것'이라는 강력한 면죄부를 끌어온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양심의 눈을 감는 행위가 반복되면, 내면 깊은 곳에는 처리되지 못한 자기혐오가 쌓인다.


직장생활이 갈수록 공허하고 무기력해지는 진짜 이유는 일이 고돼서가 아니다.

남들의 욕망(직함, 연봉)을 내 것이라 착각하며 부조리에 타협해 온 내 모습에 스스로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가짜 성벽을 넘어, 나를 위한 고생을 시작할 때


독성 있는 시스템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을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남의 피를 빨아 젊음을 유지하는 '괴물'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듯, 우리도 조직이라는 가짜 성벽 안에서 굳어가는 이성에 균열을 내야 한다.


​'원래 그래'라는 마취제 버리기 : 후배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원래 회사는 다 그래"라는 체념의 문장을 쓰지 마라. 바꿀 권력이 당장 내게 없더라도, 최소한 내면의 센서만큼은 "이건 구린 것이 맞다"라고 정직하게 작동시켜야 한다.


남들의 욕망에서 로그아웃하기 : 내가 그토록 지키려 하는 사내 평판과 직함이 정말 '나'라는 사람이 바라는 것인지 의심하라. 그것이 남들의 욕망이라면, 헛된 다툼에 영혼을 갈아 넣는 짓을 멈춰야 한다.


​스스로 말미암는 자유 연습하기 : "내가 내 목적이자 결과가 된다는 것"은 막막한 불안과 현기증을 동반한다. 하지만 남이 지시한 안락한 부조리에 숨어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한 고생을 기꺼이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삶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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