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이 발표한 직장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49.3세.
반면 우리의 기대 수명은 83세를 훌쩍 넘는다.
끔찍한 계산식이 나온다. 회사 밖으로 떠밀려 나온 뒤에도 무려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지갑 속 회사 명함을 꺼내보자.
'A기업 마케팅팀 김 팀장'. 여기서 'A기업'과 '팀장'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나면 내 이름 석 자 앞에는 무엇이 남는가.
회사의 자본과 시스템이라는 날개가 꺾인 후에도 나를 증명할 무기가 나에게 있는가?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의 부속품으로 평생을 달리다 속도가 떨어지면 폐기되는 것, 그것이 명함 뒤에 숨겨진 우리의 서늘한 미래다.
쓸모를 다해 폐기될 위기에 처한 경주마 투데이와, 설계상 '오류'로 감정을 느끼게 된 로봇 콜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천 개의 파랑』.
오직 속도와 효율성만 따지는 세상에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는 은퇴를 앞둔 직장인의 처지와 서글프게 겹친다.
회사는 결함 없는 '정상'적인 직원만을 원하지만, 로봇 콜리는 자신을 폐기품으로 만든 그 '오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 저를 결정하는 제 안의 칩 하나가 다른 휴머노이드와 다르다고 했어요."
우리가 명함 없는 삶을 준비하기 위해 찾아야 할 것은 완벽함이 아니다.
조직의 규격에 맞추느라 억눌러왔던 나만의 '다른 칩 하나', 즉 나만의 고유성이다.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회사를 떠난 뒤 나를 증명할 유일한 무기가 된다.
효율성만 따지는 세상에서 40대 직장인이 고유성을 지키며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을 AI에게 물었다.
AI의 답변은 명쾌하다.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방향 경쟁(퍼스널 브랜딩)으로 전환하고, 당신만의 스토리를 아카이빙 하라."
퇴사 후의 막막함 때문에 마음만 급해지는 우리에게, 소설 속 콜리는 이렇게 조언한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회사 밖의 생존은 하루아침에 자격증을 따고 거창한 사업을 벌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하루 30분이라도 나만의 시선이 담긴 글을 쓰고, 나의 취향과 전문성을 텍스트로, 영상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그 느린 기록의 축적이 멈춰버린 명함 이후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다.
쓸모를 다한 경주마 투데이가 관절이 부서질지언정 다시 주로를 달리고 싶어 했던 이유는 남의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회사 밖에서 나만의 고유성으로 달리기 위해서는 타인의 인정(고과)이 아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에 나를 던져야 한다.
지금 내가 출근길에 책을 읽고, AI와 토론하며 써 내려가는 이 글들이 바로 나의 미래다.
조직의 언어가 아닌 나의 언어로 쓰인 이 기록들이, 나를 지탱해 줄 가장 강력한 스펙이자 가장 든든한 퇴직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