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 싫지만,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집에 있다.
드디어 도착했다, IKEA의 새 카탈로그가.
IKEA의 카탈로그를 감상하는 것은 어찌나 즐거운 일인지.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가고 싶을 정도다. 보통 화장실에서는 좀 더 희망적이고 좀 더 덧없는 책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변기 위에 앉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같은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IKEA의 카탈로그는 희망적이고 덧없다. 그래서 『죄와 벌』처럼 표지만 봐도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다. 보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에서 읽기에 적절한 책이다.
이 카탈로그의 볼거리는 근사한 인테리어만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걸 사면 너희 집이 궁궐처럼 변할 것이다’라는 빠져 나갈 데 없는 광고 공세를 펼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준다. 좁은 집에는 이런 식으로 가구를 배치하는 건 어때? 거실에서는 가족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면 어때? 베란다나 옥상에서 이런 식으로 저녁을 먹어보는 건 어때? 그러면 당신 인생이 달라질 거야.
그들은 좀 더 친밀하게, 좀 더 유혹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렇다. 이들은 물건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세계로 초대한다. 멋지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합리적인 IKEA의 세계. 심지어 이들은 메일에서도 ‘수희 씨’라고 나를 부른다. 그들이 부르는 ‘수희 씨’는 나보다 더 능력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여자인 것만 같다. IKEA의 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설렌다. 매일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수희’가 아니라, ‘수희 씨’라니.
IKEA의 카탈로그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상의 존재 ‘수희 씨’처럼 다들 근사해 보인다.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살 것 같은 사람들이다. 자기 일이 있고, 그게 무슨 일이든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차 있는 사람들. 아니면 집에서 일을 하는 예술가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서 가족을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도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 피곤에 절은 얼굴로 소파에 퍼져 있지 않는 사람들. 나와는 다른 사람들. 아니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스웨덴의 직장 문화나 가정 문화가 우리보다 합리적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아이들도 다들 사랑스럽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들은 없다. 남편들은 기꺼이 앞치마를 두른 채로 요리를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알아서 내다버린다. 부부는 밤이 되면 거실의 불을 어둡게 하고 나란히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 이상적인 인생.
이 사람들은 사는 게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미국 사람들보다는 낫다. 미국 사람들처럼 이를 드러내고 치약 모델처럼 가식적으로 웃지는 않으니까. 이 스웨덴 사람들은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들일 것 같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사람들일 것 같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일 것 같다. “인생을 구질구질하게도, 반짝거리게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야.”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지.”라고 그들이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부끄러워진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선택하고 그 사실에 당당해하는 사람들. 다른 인종끼리, 다른 나이끼리도 서슴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 거추장스러운 것들, 지저분한 것들, 촌스러운 것들은 치워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 필요한 것들로 자신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 집에 돌아오면 바깥에서의 일은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
결국 이 스웨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말라는 얘기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집에 있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이다.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집을 아늑하게 꾸밀 줄 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것이 집을 꾸미고 가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그러려면 최소한 스웨덴처럼 오후 네 시면 칼퇴근을 해야 한다. 부모가 모두 충분한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일보다는 가정이 중요하다는 개념이 모두에게 부연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해져야 한다. 교육비와 집세와 의료비라는 엄청난 짐을 개인이 모두 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더 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정보다 일이 중요할 때, 어느 누가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사회가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불안 속에서 내몰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시간당 임금이 높아지면 자연히 여러 가지 물가나 외식비도 높아질 것이다. 사람들은 외식이나 밖에서의 술자리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집에서 소박하게 요리해 먹는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고장 나면 버리고 다시 사는 대신,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랫동안 소중히 아끼고 고쳐서 쓰는, 전에는 당연했던 문화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런저런 체험형 놀이공간에서 시키는 대로 ‘미친 듯이’ 놀면서 돈을 뿌리고 파김치가 되는 주말 대신, 공원이든 산이든 강가든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 시간을 보낼 줄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쓰거나 최소한 IKEA의 가구를 직접 조립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가구회사의 카탈로그 하나가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거기에도 자기 나라를 지긋지긋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울며 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삶이 지독하게도 권태로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럼에도 내게는 한 권의 책이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IKEA의 카탈로그 이야기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