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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작가 Dec 27. 2023

밤 마실 / 권분자

짧은 산문


밤 마실  

   

권분자


     

늦가을 밤,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은행나무는 마치 한 동의 아파트 같다. 

제아무리 덩치 큰 아파트라 해도 쓸쓸함이 깊어져서 까매지고 보니 

내 눈에 보이는 건 아파트가 아니라 유리창에 불을 당긴 보름달 창문이다. 

은행나무는 마치 우주 같아, 103동 창문 칸칸마다 별꽃을 튕긴다.   

  

더 어두워져서야 잘 보이는 담쟁이넝쿨도 

별빛을 밟으며 창문 위로 재잘재잘 잘도 번진다. 

     

귓바퀴 도톰한 이웃여자가 건물 외벽에 담쟁이 잎 불을 환하게 켜 놓아서 

맞은 편 아파트 104동 8층 베란다에 서 있던 나도 덩달아 담쟁이 잎 불을 켰다. 

불이 켜진 단풍 창에 가만히 귀를 대본다.  

     

그 어떤 벽도 뚫지 못하는 바람이 수많은 창문을 흔들어 댄다. 

담쟁이의 검붉은 안구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쏠린다. 

나를 보는 달과 별의 눈이 노란 것도 아마 많이 덜커덩 거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랫동안 주거지 반경만을 살피는 내 창문을 

밤 마실 나온 이웃 여자가 자꾸만 흔들어 댄다.     

"조팝꽃처럼 터지는 허공의 별을 헤아리다가 마을 한바퀴 돌아보는 거지."  

   

마음 가득 깃든 평화를 서로 나누던 이웃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음으로 

나는 1990년대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골목으로 나선다. 

     

보신탕, 방앗간, 이용원, 다방을 지나 골목 안을 기웃 거린다. 

허름한 슈퍼 안에서 먼지 쌓인 음료와 라면, 과자 봉지를 무릎 담요로 덮고 앉아 

‘어서 와’ 하며 하얗게 웃어주는 할머니가 있다면 얼마나 정겨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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