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신발'

미국에서 운전하기

by 화면 뒤의 작가

한국에서의 나는 철저한 ‘뚜벅이’ 였다.

대중교통이 거미줄처럼 얽힌 서울에서 자동차는 사치였고, 내 발에 익숙한 건 가속 페달이 아니라 닳고 닳은 신발 밑창이었다. 하지만 오스틴에 발을 내딛는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서 자동차는 선택이 아니라, 내 몸에 이식해야 할 ‘또 하나의 신발’이라는 것을.


뚜벅이의 처절한 변신


가까운 마트 조차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이 땅에서 나의 보직 중 하나는 ‘딸 전담 드라이버’다.

아침이면 잠이 덜 깬 아이를 태우고 학교 카라인(Car Line)에 합류하고,

방과 후면 다시 시작되는 픽업의 굴레.

한국에선 학원 버스가 해결해 주던 일들이, 이제는 오롯이 내 운전대 끝에 달린 숙제가 되었다.

아이의 일과에 맞춰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나의 하루는 조각나기 일쑤였다.

운전석은 어느덧 아이와 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낯선 도로 위에서의 긴장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양 방향으로 길게 늘어선 학교 앞 카라인(car line). 학부모들이 하교시간에 맞춰 아이를 픽업하려고 대기중이다.




남편의 은근한 눈치, 그리고 홀로서기


아직 나의 운전 영역은 ‘아이의 동선’에 국한되어 있다. 마트나 주유소 같은 미지의 영역은 여전히 남편이 핸들을 잡는 주말의 몫이다. 하지만 요즘 남편은 슬쩍슬쩍 내게 운전대를 밀어 넣는다.


“자기가 직접 주유도 해봐야 늘지 않겠어?”

“이제 마트 정도는 혼자 다녀와도 되겠는데?”


부드러운 권유의 탈을 쓴 그 은근한 눈치를 모를 리 없다.

매일 왕복 2시간을 출퇴근하는 그가 주말만큼은 운전석에서 해방되고 싶겠지.

하지만 운전도, 주유도 여전히 무섭고 서툴기에 나는 작아진다.

셀프 주유기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방인이 될 줄이야.


신발을 길들이는 시간


새 구두를 신으면 뒷꿈치가 까지듯, 나에게 자동차라는 신발도 아직은 곳곳이 쓸리고 아프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결국 제대로 신어내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미국의 광활한 도로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집 앞 마당처럼 주유소에 들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날이 올까. 그때쯤이면 이 낯선 도시도, 내 몸에 맞지 않던 이 거대한 신발도 비로소 내 것 같아질지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어색한 신발 끈을 묶듯, 자동차 키를 챙겨 들고 운전석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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