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내 안에서 잠길 때
빈 화면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커서는 묵묵히 깜빡이는데,
단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글을 쓰는 건 늘 나를 숨 쉬게 했는데,
오늘은 숨이 트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말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 말들이 너무 무겁고 축축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쓸 기운도 없네.”
그 좌절감은 단단한 돌이 되어
내 안 깊숙이 가라앉았다.
글이 쓰이지 않는 날도,
그것마저도 나라는 걸.
섬에서의 하루도 그렇다.
늘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늘 파도가 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날은
썰물처럼 다 드러났던 마음들이
밀물처럼 깊숙이 숨어버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럴 땐 바다처럼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는 단어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다.
단어는 파도와 같아서,
제때가 아니면 붙잡을 수 없으니까.
대신 기다린다.
바람이 다시 방향을 바꾸고,
물결이 천천히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어느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단어가 부드럽게 밀려온다.
그때 나는
놓치지 않으려 손끝을 재빨리 움직인다.
글은, 기다림 끝에 돌아온다.
오늘은 그저 고요한 날이다.
하지만 이 고요마저 언젠가
나를 살게 하는 문장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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