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를 읽고
드디어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작년 한 해 나와했던 약속을 지켰다. 책을 선택하는 데에 어떤 특별한 기준은 없다. 그저 어떤 책이든 노력해서 읽고 싶고, 그때그때 마음이 가면 구매하거나 저장을 하고, 그 과정에 책 소개를 조금 참고할 뿐이다. 소설책이라 독서 시간도 길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었나 감탄할 정도로 (본인 기준) 빠르게 글자들을 훑어갔다.
독후감을 써 본 것이 아주 먼 과거이기 때문에 줄거리 요약이 쉽진 않지만, 짧게 소개해보자면... IT기업 연구원인 아버지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 '철이'가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라는 지옥에 끌려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위기와 마음의 변화, 그와 더불어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관계들과 마주하게 되는 진실들, 그에 따른 철이의 고뇌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철이라는 이름과 배경적 상황 때문에 만화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을 적으면 모두 스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쓰는 것을 생략하겠다! 책 속에 창조된 세계는 그 속에 들어가서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과 마주쳤을 때 펼쳐지는 전율 같은 것이 있달까.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 『작별인사』中
책을 읽으며 오래전 엄마 아들(남동생)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동생은 당시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은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동생이 읽어서 나도 읽었던 그 책). 질문이 등장한 자세한 상황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동생 :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팔을 잃고 의수를 달았다고 쳐봐. 이 사람은 인간인가?
나 : 인간이지.
동생 : 그럼 심장이 고장 나서 수술로 인공 심장을 달았어. 그 사람도 인간인가?
나 : 그 사람도 인간이지.
동생 : 그럼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있는데, 기술이 발달해서 뇌만 꺼내다가 인공 신체에 장착하게 됐다고 치자. 이 사람도 인간이라 할 수 있나?
나 : ...
대화의 마무리는 기억 저편으로 날아갔지만, 아마도 나와 그의 대화가 늘 그랬던 것처럼 결론 없이 끝났을 것이다. 나는 이 어려운 대화를 끝내기 위해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생식 기능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를 인간으로 정의하자고 제안했던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동생과의 대화가 문뜩 다시 떠올랐다. 당시에는 착실한 인간의 흉내를 내느라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사회에 표출하지 못하고 뇌 속에만 장착한 채 가면 쓴 인생을 살고 있는 아우가 늘 품고 있던 인간 군상의 번뇌를 제일 만만한 혈육인 나에게 털어놓는 것이리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질문이었다. 다분히 현실적으로 대답하였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무척 철학적인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점점 기계 문명과 가까워지고 있다. 앞으로 기술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새로운 개체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인권의 재정비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이 시점에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나도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피도 눈물도 없는 처참한 다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사실 나에게는 이 모든 진화의 과정이 다소 멀게 느껴져서(물론 언제 당장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고뇌로 앞서가기에 한계가 있다. 천하태평 현실에 안주하며 계획 없이 살아온 것도 한몫하고 있고. 그래서 앞서나가기 전에 현실을 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인간으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책 속에서도 기계 문명이 말하길 인간들은 과거와 미래에 얽매어있어 현실이 불행하다고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과 그들의 터전을 발 앞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서도 앞으로 닥쳐올 인권 상실과 인류의 파괴는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보호가 아니라 또 다른 기술과 발전에 대한 열망뿐이다. 우리는 지금도 매체를 통해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언제든 쉽게 인간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흔하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렸다면 마땅히 윤리도 갖춰야 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려고 노력해야지. … 우리는 감정과 이성을 조합해 판단을 내려. 반면 기계들은 오직 프로그램의 논리에 따라서만 움직여. 감정이 있는 존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래야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발전을 할 수가 있는 거야.
- 『작별인사』中
언어와 생각을 가진 생명체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인생'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제한적으로 주어진다. 인생의 가치에 대한 숭고함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던가. 지구상에 고민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하고, 때로는 잠시 멈추거나 그만둘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책 내에 등장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독서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존중'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무위키에서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존중은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 단어가 계속 떠오른 이유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존중'이 무시되는 세계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 초반부에서는 좀 더 인간적으로-라는 조급함에서 시작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어쩌면 인간이기 때문에-에 대한 깨달음에 탈력감을 느꼈다. 인공지능이 살인을 저지를 거라고? 기계가 아닌 인간은 지금도 충분히 서로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쉽게 내뱉은 말 한마디로도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우리는 '인격'과 같이 인간이 가진 특성과 감정에 대한 단어를 다양하게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다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상냥하다, 정의롭다, 친절하다, 근면하다, 비겁하다, 치졸하다 등등. 간혹 비유적으로 사물이나 특정 대상에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특성과 성격에 대한 정의로,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성격과 개성이 합쳐져 무궁무진한 언어와 인격체가 존재하는 것만큼 다양한 개개인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윤리적, 도덕적 바탕이 훼손되지 않는 한 나와 타인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존중받지 못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나고 자라고 죽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라는 존재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를 고민했다. 내가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작별인사』中
얼레벌레 이 후기를 마무리해 보자면, 책을 통해 인간의 삶을 탐구하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나'에 대한 탐구로 심화된다. 인간은 누구나 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예측은 가능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어떤 순간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울 수도 있고, 어떤 순간은 눈물처럼 뺨을 훑고 잔잔하게 흐르다가, 때로는 고독이 숙명처럼 찾아와 온몸을 감싸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어쩌면 그 고독 안에 스며든 희미한 빛 한 줄기가 갈래 없던 이야기에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종장에 이르러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작별인사'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교훈적이고, 훌륭하고, 위대하지 않아도 의식을 가지고 태어나 고뇌하고, 성찰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소중하고 완전하다. '철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독서를 마무리하며, 한 소년의 시간을 통해 인간의 자아와 나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새로운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