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의 사생활
최악의 결말을 선택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손에 쥔 것을 고쳐 잡았다. 202호의 녹슨 문패가 홍채에 반사된다. 뜯어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다시 한번 더. 그제야 두꺼운 철문 너머로 인기척이 났다. 서서히 줄어드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세요?” 대답을 망설이던 그때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미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잘것없는 나의 평화를 파괴한 세계. 선과 룰을 국밥처럼 시원하게 말아먹은 환장의 세계.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만 했던 타인의 세계. 흥분과 분노를 끌어안고 발을 내디뎠다. 나의 흉흉한 기세에 놀란 대상이 뒷걸음질 친다. 뜻밖의 침입자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여성은 언젠가 내가 보았던 모습보다 더 세월에 휩쓸린 얼굴을 하고있었다. 순식간에 장르를 뒤바꾼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범람했다. 그녀가 뒤로 나자빠졌다. 의식을 밀어낸 나의 중추신경계가 본능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뇌를 마비시키는 음악과 함께 여성이 애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박자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이성이 두 동강 났다.
아아— 실로 유쾌한 비극이었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시선을 돌리자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물건이 알짱거린다. 어깨를 때리는 이 단단한 물체는 내가 쥔 것과 같은 대기업의 제품이다. 시가 백오십만 원으로, 꽤 비싼 값을 치렀다. 다만 상대방의 것은 내 것보다 최신식이다. 그렇다면 대략 오십만 원 정도의 가격 차이가 날 것이다. 지금 자랑하시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내 신체를 두드리는 현대 문명의 산물을 흘기다 몸을 슬쩍 피했다. 그러나 어깨만 털었을 뿐 이동 반경은 거기서 거기였다. 상대방은 아직 자랑이 덜 끝났는지 이번엔 내 어깨를 거치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150cm가 조금 넘는 작은 키를 가진 여성이다. 누군가는 무거운 손을 거치할 만큼 내 어깨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정작 내 손과 발이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은 여간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 겨울이 되면 나는 덤으로 털모자에 달린 털까지 먹어야 한다. 자유를 침해했으니 돈으로 보상하라. 자본주의 사회인데 이 정도 보상은 요구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차까지는 아직 두 정거장이 더 남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상대방과 나의 밀당은 계속되었다. 지하철 노선표를 바라보며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던 자아를 간신히 불러들였다. 주변을 돌아보며 작은 공감이나마 얻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동공 가운데 시선 한 자락 던져주는 이가 없다. 대체로 누군가의 어깨를 짓누른 채 저 작은 바보상자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숨이 막힌 나는 차마 시선까지 처박을 수 없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다섯. 오십견이 올 것만 같았다.
제1차 퇴근대전이 종전을 선언하면 2차 대전이 포문을 연다. 마을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동네 주민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나도 앞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 뒤에 줄을 섰다. 내 순번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탑승이 쉽지 않다. 모든 어르신들이 탑승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젊은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비좁은 실내를 미로처럼 탐험한 끝에 겨우 설 자리를 마련했다. 눈앞에 내 몫의 손잡이가 있어 안도했다. 그러나 방심한 나를 질책하듯 옆구리를 밀치고 들어서는 아저씨께 조용히 내어드려야만 했다. 승객들과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탄력 없는 허리를 불행할 정도로 휘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면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다. 결국 까치발을 들고 곡예를 하듯 천장의 봉에 매달려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와일드한 운전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팔에 힘이 가득 실렸다. 무기력에 젖어있을 때마다 운동을 좀 해보라던 엄마 아들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매일 봉춤을 추고 있는데 굳이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해야 할까? 그는 내 고충을 헤아릴 처지가 못된다. 좋은 유전자를 독식해 나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크기 때문이다.
집이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머물러도 매일 애틋하고 그립다. 종점에 거의 이르러서야 사람이 거진 빠져나간 버스에서 하차했다. 그와 동시에 오토 시스템으로 처리되어 있는 한숨 버튼이 눌린다. 오십견 직전의 너덜너덜한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골목을 거닐었다.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재개발 구역에서 밀려나 아파트들에게 포위된 채 버텨온 작은 주택가다. 내 또래쯤 되는 다세대 주택들이 골목 곳곳을 빼곡히 메꾸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협소 주택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인근에 작은 중학교가 우뚝 솟아있고, 간이슈퍼 외의 인프라는 전무하다. 중학교 앞, 마을버스가 정차하는 높은 언덕길이 마을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 길은 곧장 동네를 둘러싼 뒷산과 아파트 단지로 이어진다. 동네 주민들의 높은 평균 연령에 맞춰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퇴근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집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골목 앞에 도착했다. 이 오르막길 초입은 주민들이 쓰레기를 유기하는 장소다. 그곳에 어느 날부터 푸른색의 작은 소파가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다. 버려졌다기엔 이만한 폐기물에 붙어있어야 할 폐기물 발급 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내놨다기엔 전날 내린 비를 전부 뒤집어쓴 채 축축이 젖어있다. 이건 뭐 어쩌자는 거야. 언젠가 그렇게 구시렁대며 소파 다리를 툭 걷어찬 적이 있다. 오늘 다시 보니 과태료 부과 경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이 동네는 골목길마다 비슷한 류의 경고 문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국고에 보탬이 되고자 무진 애들을 쓰는 모양.
“다녀왔습니다.”
식탁 위에 엄마표 나물 반찬이 가득 올라왔다. 거짓된 나를 내려놓고 가장 편한 모습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요즘은 어떠니?”
“똑같지, 뭐.”
엄마가 씩 미소 지었다.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지레 겁이 났다.
“그래? 엄마가 한 소리 해줄까?”
“아냐, 됐어. 문 닫아놔서 좀 나아.”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닥에 눌어붙어 고양이와 눈의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소통을 하는 것인지, 잠에 취한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고양이는 하루 24시간 중에 16시간을 잠으로 때운다고 한다. 손 끝으로 미간을 쓸어주자 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들어가서 쉬어. 내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엄마의 배려로 빠듯하지만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곧바로 침대 위에 영역을 전개했다. 오로지 나에게만 필중 효과가 적용되는 나만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자, 집안 식구들 모두를 괄시하던 고양이가 뒤따라 들어왔다. 고양이. 이름을 부르며 침대 위를 팡팡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펄쩍 뛰어올라 배를 깔고 쭉 뻗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보자. 눈을 꿈뻑이며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번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몸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쳇. 알다가도 모르겠다. 애틋한 침대를 잠시 떠나 습관처럼 창문을 굳게 닫았다. 하나, 둘, 셋. 삼중 창을 모조리 닫고 나서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가 몰고 온 이 시원한 밤공기를 나는 감히 집 안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10년 전 급하게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성인 네 명이 부대끼며 살기엔 비좁은 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다. 우리 집은 그중 가장 아래층으로, 위에 두 가구의 이웃이 있다. 위치 선정의 치명적인 착오로 인하여 이웃 주택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수준으로 근접하다. 덕분에 내 방은 불필요한 그늘막에 가려져 볕이 아주 들지도 않는다. 출근하기 전, 그리고 귀가하자마자 제습기를 켜는 것이 이제는 생활 루틴이 되었다. 두 개의 주택이 마치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붙어 있지만, 교류와 소통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대화는 곧 결투 신청이었다. 오래전 정화조 수리에 대한 소란을 끝으로 대화가 일절 오고 간 적이 없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트로트와 일일극 대사 소리로 그들의 생존을 짐작해 볼 뿐이다.
집에서 들어본 적 없는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던 일은 이젠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그날 주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대와 하나가 되어 고양이 궁둥이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귓바퀴를 찢고 들려온 괴음에 화들짝 놀라 창밖을 살폈다. 소리의 발원지는 문제의 옆 주택 2층이었다. 윗집으로부터 아이의 목소리가 거센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초등학생쯤 되었을까. 으레 목청 좋은 남자아이가 그만한 체력으로 내지르는 소음이 그렇듯 충격의 여파가 대단했다. 그 나이 또래 아이의 음성을 들어본 것도 실로 오랜만인데, 비명이라니. 아이는 무슨 일인지 이따금씩 소리를 내지르며 괴로워했다. 무슨 일일까? 할머니 댁에 놀러 왔나?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나? 그렇다면 신고를 해야 할까? 망상이 꼬리를 물며 길어질 무렵 나는 아이를 향한 걱정도, 신고에 대한 우려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자꾸 나만 죽이는 건데!’ 잔뜩 흥분한 아이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이웃 주택에 새로운 주민들이 입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내가 굳이 알아야 했을까?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삼중 방어벽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달팽이관의 레이더망에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시계를 보니 오후 아홉 시 무렵. 모두가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므로 견뎌내야만 했다. 수면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그 이후의 문제로, 지금의 고통과 시련은 나 스스로 슬기롭게 극복해야 했다.
나는 평소에 이명을 앓고 있으며, 불량 콘센트의 전기 신호음에도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귀가 예민하다. 사소한 소리더라도 한번 꽂히면 늪에 빠진 듯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대화가 공기만큼 가득 찬 공간에 놔두면 급속도로 에너지가 방전되며 집중력을 잃는다. 버스의 바람 빠지는 소리, 오토바이나 스포츠카가 내는 굉음은 그야말로 공포스럽다. 출퇴근을 하며 갖은 위협에 노출되어도 10년이 넘도록 직장인 딱지를 털어버리지 못한 나 스스로가 기특할 지경. 중이염의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중이염으로 두 번의 수술을 경험한 바 있다. 요즘엔 기술이 발달하여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탑재한 이어폰이 외부 소음을 완벽에 가깝게 차단해 준다. 그러나 때때로 이 제품이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드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분산된 집중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넷플릭스 앱을 열었다. 최근 본 프로그램 리스트를 뒤적거리다, 도입부에서 중단했던 애니메이션을 재생시켰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엄지를 치켜세웠던 사랑받는 작품인데,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어떠한 희망과 사랑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전개를 꾸역꾸역 학습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소음이 멎을 때까지 게임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