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의 사생활
인생이 대체로 멸망을 향해 흘러간다지만, 나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잘못된 판단으로 주식에 투자했을 때뿐이리라. 그렇게 단정 짓겠다. 큰 파장 없이 완만한 인생 곡선을 가지게 된 이유는 도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처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여나 내가 스스로 불행을 수집했다면, 그 또한 온전히 납득하고 말 뿐이다. 남자친구가 이상하다는 20년 지기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했다가 상처로 점철된 이별을 경험하고, 지표도 없이 감으로 무식하게 시도한 투자가 실패를 향해 내리꽂아도. 모두 내 잘못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원치 않는 재앙이 들이닥쳤다면. 예견할 수 있었다면 피해 갈 수 있었을까. 피해 갈 수 있었다면 충돌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옆 주택 2층에 개진상 부부가 이사를 올 테니 도망가라는 경고를 해주지 않았다. 경고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도망가라고?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진짜 재앙은 일기예보처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으며, 내가 구태여 자초하지 않아도 도처에서 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안일하게도 그것이 내 이웃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주말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다. 웬일로 다복한 소리가 내 방 천장을 맴돌았다. 이웃 주민들은 저녁 무렵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익어가는 냄새와 화기애애한 소리가 ASMR처럼 내 오감을 주물렀다. 오붓한 가족 식사. 화목한 음성. 그들의 일상이 우리 가족의 모습과 겹쳐졌다. 우리도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거실에 고기판을 펼쳐놓고 식사를 즐기곤 했다. 다른 점이라면 젊은 부부와 그들의 친척, 또는 지인과 기운 넘치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성인만 네 식구가 엉겨 사는 우리 집보다 구성원이 많다는 점. 그들은 집 안 어딘가에서 마치 캠핑장에 놀러 온 듯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즐겼다. 그 소리가 어째서 바깥으로 죄다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가는 아직도 의문이다. 이른 시간부터 들려오는 화목한 소리에 나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으로 그들의 여가 시간을 지켜주고자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파티가 자정이 넘어가도록 지속되리라는 것을.
방으로 돌아오자 분위기가 눅눅하게 변해있었다. 음주가 곁들여진 탓이리라. 보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누누이 말하지만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많던 식구들이 이제는 각개전투로 흩어졌는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도 곧 차분한 마음이 되어 침대와 합체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예고도 없이 부부의 세계(그 『부부의 세계』말고)가 강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는 장르 제한 없이 다채로웠다. 아이의 목청은 모계 유전인 모양. 두 사람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충을 대화로 풀어가고자 많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내뱉은 문장과 토해낸 단어가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흡수되지 못한 채 알코올과 함께 증발해 버리는 것이 문제. 모든 소음이 필터링 없이 내 달팽이관 안으로 진격했다. 어째서 이토록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가. 조금만 더 엿들었다간 사생활 침해로 오히려 내가 잡혀가야 될 판이다. 집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지 의아할 지경.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 본바 부부는 별거 중이다. 아내는 외국인이다. 두 사람은 모두 힘들다. 무엇이 그토록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는진 안물안궁이다. 지금은 내가 제일 힘들다. 아이는 밤늦도록 부부를 따라 잠들지 못한 채 그래픽이 만들어낸 가상 세계에 잠식되었고, 부부는 양방향 고속도로처럼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내달리다 음악을 재생하며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 평화가 나의 평화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본 장르의 음악이었다. 중동 어드메의 사원에서 알라신을 섬기는 신도들이 단체로 군무를 추고 있을 때 머리에 금장을 두른 화려한 여인이 그들을 홍해처럼 가르고 나타나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각기 춤을 춰야 할 것 같은 음악. 그들의 문화나 음악은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중동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검색을 해보았을 뿐이다. 그런 감상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음악이 흘러나와 우리 동네 좁아터진 골목길을 테헤란로로 만들었다. 글로벌 부부는 대화가 통하진 않아도 선곡에 서로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듯했다. 처음에는 8090년대생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것을 흘러나왔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히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일반적인 TV나 휴대전화의 소음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성능이 우수한 초대형 스피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음악적 조예가 깊어서 부득불 그 스피커가 필요했더라면 이 동네에 이사 와선 안 되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들의 민폐가 고성방가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점이다. 자정을 바라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들지 못한 아이의 성장 호르몬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총 맞은 것처럼 심장에 구멍을 내는 구슬픈 가사가 나의 좌반구 우반구에 총알을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아아. 미친 것 같다. 아니, 저 쪽은 이미 미쳤고, 내가 곧 미칠 것 같았다. 메마른 이성이 불붙은 듯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모조리 닫아도 성능 좋은 스피커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저음이 내뿜는 진동과 밤을 잊은 소음이 동시에 벽을 뚫고 침입했다. 스트레스가 이성에 기름을 쏟아부었다. 자정을 넘어서자 새벽 특유의 몽환적인 감수성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성이 새카맣게 재가 되면 감성만 남는다. 나는 잿더미가 쌓여가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수차례 어떤 고민으로부터 갇혀있었다. 양심과 죄의식 사이 어느 즈음에 있는 일말의 배덕감. 해? 말아? 그러면 보통 말라고 하던데. 그러나 불이 붙은 순간부터 이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휴대전화 볼륨을 최대치까지 키웠다. 그것은 인생 최초의 시험이었다. 손가락이 버튼을 컨트롤할 때마다 제한을 두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래서 휴대전화가 얼마나 목청껏 울어댈 수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저 뛰어난 스피커의 다이내믹레인지를 따라잡으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이 연출될지도 모를 일. 나에겐 심장까지 뒤흔들 수 있는 스피커도, 마이크도 없다. 마땅한 옵션이 떠오르지 않아 선곡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사연자를 위해 음악을 선별하는 라디오 DJ가 된 기분으로 신중을 가했다. 나의 플레이 리스트가 저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뽐내야 했다. 감성이 시키는 대로 선택된 음악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흥분을 유도하는 전주가 내 작은 바보상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에라, 모르겠다.
“아모르파티”
요란한 사운드가 내 방안을 가득 휘저었다. 놀라 기절할 뻔했다. 예상보다 더 커다란 볼륨에 지레 겁이 난 나는 볼륨을 살짝, 아주 살짝 조절했다. 나의 공격이 통하길 바라는 마음과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가 아니길 바라는 두 마음이 충돌했다. 그러나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 관계없이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총포탄 대신 휴대전화 달랑 하나 지참한 채 전쟁을 시작한 나는 다시 침착하게 정세를 관망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어떤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행여나 저 부부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이코패스라면? 내 가소로운 일격에 화가 치밀어 우리 가족을 위협하러 온다면?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와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갈등 속에 잠겨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대로 계속 가도 될까? 혹시 내 얼굴을 알까? 층간소음 때문에 사람도 죽이던데. 흉흉한 사건으로 보도된 뉴스 기사의 피해자가 내 얼굴을 하고 있다. 아니, 나라면 다행이다. 우리 가족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때 마침 음악 소리가 줄어들었다. 푸다닥 몸을 일으켜 2층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창문이 닫혔다. 스피커의 진동음은 여전했으나 창문만은 제대로 닫혔다. 승리감에 고취되기도 전에 안도의 한숨이 먼저 터져 나왔다. 나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음악 재생을 멈추었다. 그러자 비로소 모든 소음이 차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