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콘서트 / 3

내 이웃의 사상활

by 고봉만




광란의 밤이 지나고 언젠가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에 대해 부모님 앞에서 되는대로 내뱉은 적이 있다.


옆 집 2층에 이사 왔나 봐. 젊은 부부 같아. 어어, 아이도 있어. 남자애. 초등학생이고. 아이 아빠는 따로 사나 봐. 아이 엄마가 밤마다 통화를 해. 그래도 가끔 오긴 하더라고.


부모님은 형식적인 질문이 끝나자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갈 무렵. 해가 길어지고 노을이 아름다웠던 어느 날. 나는 퇴근길에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옆 주택 입구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단란한 가족이었다. 부부는 아이를 중앙에 끼우고 나란히 걸어갔다. 아이 가방을 짊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다정하지만 단단한 인상의 아버지였다. 희끗하게 새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칠흑 같은 아내의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아이 어머니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채였다. 한 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나머지 손에는 아이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듬직한 풍채와 이국적인 모습이 내 예상과 딱 들어맞았다. 아이는 익숙한 듯 양손에 키가 엇비슷한 부모님의 손을 쥔 채로 방방 뛰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까. 아이의 외모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오붓하게 걷던 세 사람은 황홀하게 피어오른 노을을 등지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겐 스릴러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흥이 다 깨져버린 디오니소스의 지령을 받고 음악으로 지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내려온 오르페우스의 영혼일까. 그래서 굳이 이 삭막한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일까. 그들의 방구석 콘서트는 이젠 횟수를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 누구도 호응해 주지 않는 콘서트를 주기적으로 묵묵히 개최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 이웃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막무가내 콘서트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음에 매운맛을 더하는 것은 어머니의 전화 통화다. 그녀는 한국어도 능통하지만 주로 알 수 없는 본토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토해낸다. 종료 시점을 가늠하기 힘든 그 통화는 나를 자주 그 나라 어디 즘으로 데려다 놓는다. 굳이 굳이 창문을 열고 창가에 서서 창 밖을 향해, 마치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듯 밤새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언급했던 것처럼 그녀는 목소리가 크다. 저음이지만 존재감이 높은 톤을 가졌다. 발음이 곧잘 뭉개지곤 하지만 톤만큼은 화살처럼 귓바퀴에 정확하게 꽂힐 만큼 날카롭다. 어느 정도냐 하면, 삼중창을 뚫고 들어올 정도.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내 방의 방음 문제라고? 그것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분명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삼중창을 모조리 닫아도 그녀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는 것. 그 통화는 주로 오밤중에 시작해서 차분하게 끝장내지 않을 경우 오열로 이어진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서럽게 만든 것일까. 억울하게 죽은 혼령의 곡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나의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극복하라는 법은 어느 나라에도 제정되어있지 않으리라. 자정 무렵 그 소리가 들려오면 가위에 눌릴 것만 같아 또다시 잠들지 못한다. 취침시간을 방해받을 때면 나는 닫았던 창문을 다시 한번 더 닫곤 했다.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섭게. 쾅.


이른 저녁에는 아이와 대거리를 하고, 밤이 늦으면 전화 통화나 오열을, 심란한 날엔 음악을 틀어 위로받는다. 그들과 함께 사는 기분으로 견뎌온 시간이 벌써 2년 가까이 되어간다.


“옆 집 사람들 좀 이상해.”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엄마도 음악 소리 들었어.”


옆에서 고기를 한 점 집어먹던 엄마 아들이 물었다.


“왜. 뭔데.”


가족들에게는 공포스러운 감정은 모조리 배제한 채 그날 밤 울렸던 승전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제는 꽤나 오래전 일이 되었다. “내가 노래 좀 불러줘?” 동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공격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동생은 힙합과 여돌 음악을 즐겨 듣는다. 아우의 방은 내 방과 아주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어서 이 불편한 이웃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노래하면 너만 잡혀가.” 엄마는 이 대화를 즐겁게 경청하고 계셨다. 나의 반격이 꽤나 유쾌하셨던 모양. “또 그러면 헤비메탈 틀어버릴 거야.” 온 가족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전포고했지만 실제로 헤비메탈 장르가 옆 주택을 향해 폭격을 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합리적인 대처 방법도 고려해 본 적이 있다. 소음이 발생하면 충전 중이던 스마트 워치를 깨워 실시간 소음 감지 기능을 확인했다. 워치가 주변 소음을 감지하여 90dB(데시벨) 이상으로 청력에 무리를 줄 경우 알림을 띄운다. 알림은 대체로 노래방에 가면 작동한다. 나는 워치를 구매했을 때부터 액정이 켜지면 곧바로 이 소음 레벨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세팅해 두었다. 옆 주택이 맹공을 퍼붓는 날이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소음 레벨을 관찰했다. 그러자 60에서 70dB에 육박하는 소음이 감지되었다. 평소 내 방의 생활 소음은 30~40dB 수준이다. 주가가 이렇게 뛰어오르면 좋으련만. 원치 않는 소음 공해가 상한가를 넘어섰다. 측정한 데시벨은 휴대전화 메모리에 동영상으로 저장되었다. 법적 제재가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공권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나자 저항은 점점 체념에 가깝게 옅어졌다. 한 차례 경험해 본 공포가 피로감에 대한 데이터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굳게 닫힌 삼중창 속에서 엇나가는 이성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그러나 닫고 외면하고 걸어 잠글수록 해소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다.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할 수가 있다고? 감정이 곪을수록 피해자였던 내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저 예전과 같은 조용한 저녁 환경을 원한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싶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싶다. 새소리, 매미 소리, 빗소리, 풀벌레 소리. 자유를 잃자 그전엔 몰랐던 사소한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내가 예민한 탓일까. 그들은 이것마저도 내가 자초한 재앙이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누렸던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는데, 집이라는 공간에서 지켰던 평화마저도 잃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속세를 떠나고 싶다. 분노와 체념이 오르락내리락 줄다리기를 한다.


내가 과연 이 녹음 파일들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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