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제일 아래 서랍칸 안에 쌓아놓은 편지 무더기를 발견했다. 매우 너저분하게 늘어져있었기에 정리를 위해 침대 위에 우르르 쏟아놓고는 어느새 하나 둘 읽기 바빴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12년간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였다. 카테고리를 학년별로 설정한 후 분류 작업을 하며 한통씩 꺼내 읽어보았다.
초등학생 시절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대체로 4학년 때.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다. 편지를 받았을 당시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이 친구는 어떻게 지낼까, 이 친구는 참 많이 변했지, 하는 회상도 한몫했고.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옛날에 나는 어떤 친구였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중학생 때는 미스터케이(MR.K/엠알케이라고 불렀다)라는 편지지 잡지가 유행했다. 편지지보다는 주로 이 잡지를 사들여 자르고 붙여서 편지를 썼다. 잡지였기 때문에 아마 읽을거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여기저기 오려낸 페이지 때문에 너덜너덜 해지곤 했지만. 엠알케이 편지지는 독특하게도 입체적인 형태가 많아서 모양을 온전히 보관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는 왜 이런 의미 없는 편지 한 통을 쓰겠다고 이 고생을 했을까. 그때는 몰랐다. 그 과정이 재밌고 즐거웠을 따름이다.
또 이 시기에는 무궁무진한 양의 쪽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쪽지를 보낸 발신자는 대부분 한 사람이지만, 상당한 양이 쏟아져 나왔다. 쪽지 접는 방법도 각양각색. 기밀문서인지 수십 번 접어서 돌덩이처럼 단단해진 쪽지나, 돌돌 말아서 받은 쪽지도 있다. 다시 잘 펴서 접어 놓았지만. 기대를 가지고 쪽지를 펼쳤을 때 상당히 허무한 경우도 많았다.
'심심한데 할 일이 없어. 선생님한테 이거 걸리면 죽어. 답장 꼭 줘.'
아이고, 감탄하면서 웃었다. 그래도 이 쪽지에 답장을 써 주었을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는 휴지에 쪽지를 써 준 적이 있다. 그 쪽지를 이 친구가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밖에도 오엠알 카드에 쓴 편지라던가, 노트 한 편을 주욱 찢은 쪽지라던가, 특이한 케이스 많다. 그 시절의 아기자기함이 귀엽고 즐거웠다.
중학생 때도 물론 주고받았지만, 고등학생 때는 쪽지보다 생일 축하 편지와 크리스마스 엽서가 많았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친구와 우표까지 붙여가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펜팔이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어떤 가수의 팬카페에서 만난 친구였을 거다.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뒤적대던 것이 기억난다. 요즘엔 통 마주하기 힘든 우체통이지만, 고등학생 때만 해도 동네 우체통 위치는 죄다 꿰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과 친구들 뒷담으로 시작해서, 연예인 이야기, 싸운 이후에 주고받는 화해편지, 쉬는 시간을 쪼개 주고받았던 쓸데없는 내용의 쪽지들. 문득 내가 써 준 답장의 내용들이 궁금했다. 나는 당시에 어떤 표현으로 무슨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지금도 늙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어떤 학생이고, 어떤 친구였을까도 굉장히 궁금한 거다.
편지 내용으로 유추해 본 바, 나는 아마도 착하고, 소심하고, 조용했던 친구였나 보다. 편지 내용들이 그런 걸! 그리고 아마도 잠이 많고, 고독하고, 가끔 까불거리고, 무뚝뚝했던 친구였나 보다. 편지를 읽으면서 대충 짐작해 본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면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상상을 해 보았다. 당장이라도 다시 교복을 입고 등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에게 예전보다 큰 변화는 없지만, 왠지 자신감이란 것이 생겨서. 다시 돌아간다면 왠지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라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걸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후회'라고 하겠다. 나는 왜 그때 그토록 자신감이 없었을까. 그 당시를 다시 한번 회고해 보는 것이다.
소심왕에 말수도 적고 활동 영역도 좁았던 나라서, 친구가 많고 인기가 많은 학생이 아니었던 것이 후회가 된다. 그때는 더군다나 통통하고 얼굴에 여드름도 많았고. 옷도 못 입고. 정말 못난이였다. 왜 그때 더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걸까. 성적이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고. 아마 그래서 더 위축되어 있었을지도? 핑계일라나?
옛날보다 크게 업그레이드된 나는 아니지만, 그때는 그렇게 입기 싫었던 교복이 그리운 것은, 다시 돌아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은. 내가 이만큼 커버렸기 때문이겠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앞으로 꾸준히 나이를 먹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지, 더욱더 학창 시절이 그립다. 나중에 더 시간이 흘러서, 구석에 처박아놓은 교복이 해지기 전에 빨리 친구들과 교복을 맞춰 입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싶다. 학교 근처에 있던 떡볶이, 정말 맛있었는데 말이지.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꼭.
- 2011년 9월 25일, 번뇌에 시달리던 22살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