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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톱 Oct 05. 2023

대학원생 A씨 #3

오렌지, A씨


시험 기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렸다. 으레 그렇듯이 시험 결과와는 상관없이 학생들은 한껏 들떠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은근히 기분이 좋았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굳이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알 것도 같다. 잘 봤다고 말하면 재수없어 보이고, 못 봤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니까. 아무튼 복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복잡함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상에 또다시 드리워진 그림자 때문에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에도 역시 A였다. 이번에 A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오렌지였다. 오렌지라니. 너무 오랜만에 보는 과일이라(우리집은 오렌지를 잘 먹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A에게 중국어 시험 범위를 알려준 일은 나에게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에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학교에 웬 오렌지? 대부분 학생들은 간식으로 과자나 사탕류, 가끔 삼각김밥 같은 것들을 주로 먹었지, 과일을 먹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잡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A는 내가 당황한 걸 느꼈는지 내게 오렌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먹어.]


나는 두 번째로 당황했다.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웬 오렌지? 뭘 주는 거니까 좋긴한데, 어딘가 찝찝했다. 내가 쭈뼛대자 A는 설명을 덧붙였다.


[너가 알려준 중국어 시험범위에서 거의 그대로 나와서 나 중국어 시험 95점 받았어.]


그제서야 며칠 전에 봤던 중국어 시험이 떠올랐다. 사실 나도 시험지를 받자마자 약간 당황했다. 중국어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알려주셨던 시험범위에서 거의 다 나왔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꼼꼼히 공부하고 암기한 학생이면 만점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시험범위를 알려준 일도 기억이 났다. A는 내 책상 모서리에  오렌지를 올려놓고는 자기 반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너 덕분에 시험 잘 볼 수 있었어.]


웃기게도 나는 이 상황에 중국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은 학생들이 많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문득 A가 놔두고 간 오렌지가 눈에 들어왔다. 달랑 시험범위 알려주고 이런 걸 받긴 또 처음이네. 나는 Give & Take라는 말이 뼈에 새겨진 사람이었다. 나는 받은만큼 정확히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받는 걸 그렇게 좋아라하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곧 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항상 가치를 꼼꼼히 따져보았다. 선물을 고를 때도 내가 받은 선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꼭 확인하고 똑같이 주거나 조금이라도 그 이상을 주려고 했다. 빚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산해 보았다. 시험범위를 알려준 게 오렌지를 받을 정도인가? 모르는 걸 알려준 것도 아니고, 그냥 남들 다 아는 거 알려준 것 뿐인데. 이해가 안되네.


그 당시의 나는 정말 별거없는 오렌지 하나로도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인간이었다. 주면 받고, 받으면 끝인데 나는 이유가 꼭 필요했다. 그 오렌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그냥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라 무언가 진심이 담긴 듯한 사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런 생각들은 여느 다른 잡생각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생각들에 묻혔다. 몇 분 사이에 오렌지는 그냥 과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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