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전통의학을 메디케이드에?
미국은 과거에 미국 원주민들을 강제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폈고 장장 150년에 걸쳐서 그들의 언어, 문화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자라나는 인디언 어린이들을 부모 품에서 떼어가 ‘인디언 기숙학교’에 입학시켰고, 여기서 인디언의 언어를 실수로 사용하기라도 하면 학대를 일삼았죠.
<익숙한 약물 이야기>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지는데요. 인디언 동화정책하에 자라난 인디언들은 자신이 인디언과 백인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약물에 손대는 수순을 따르게 됩니다.
강제 이주기 (1830년 ~ 1860년대): 1830년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 제정 이후, 미시시피강 동쪽의 원주민들을 척박한 서부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사망한 ‘눈물의 길(Trail of Tears)’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강제 동화 및 기숙학교 운영기 (1819년 ~ 1969년): 가장 직접적인 학대로 꼽히는 시기입니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 어린이를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격리해 연방 원주민 기숙학교에 수용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하고 머리카락을 잘렸으며, 차별과 폭행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겪었습니다.
부족 해체 및 토지 할당기 (1887년 ~ 1934년): 1887년 ‘다스 법(Dawes Act)’을 통해 부족 공동체의 토지를 개인에게 분할하여 사유화함으로써 원주민의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고 남은 땅을 백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미국의 인디언 동화 정책은 크게 이 세 파트로 나뉩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비교적 최근에야 과거의 학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오바마 정권 때에 이르러서야 원주민 학대 정책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이루어졌던 것이죠.
150년은 꽤나 긴 시간입니다. 당연히 그 말살 정책의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며,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자살율은 굉장히 높습니다. CDC의 2023년 및 2025년 보고에 따르면, 비히스패닉계 아메리칸 인디언/알래스카 원주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약 23.8명으로, 미국 내 모든 인종 그룹 중 가장 높습니다.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로 남은 겁니다.
위 표는 CDC에서 발표한 2023년의 미국 자살율 통계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과 알래스카 네이티브의 비율이 가장 높은데요. 알래스카 네이티브가 있는 것이 좀 특이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알래스카 네이티브의 높은 자살율이 납득이 되는데요. 알래스카는 고위도 지역이므로 일조량 부족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러한 물리적 고립 상황에서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은 것이죠.
최근 미국에서 인디언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전통의학을 메디케이드(의료보험)에 포함시킨다는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짧은 기사입니다.
인디언의 전통의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약용 식물 및 허브 요법: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지식을 바탕으로 허브차, 연고 등을 사용합니다. (예: 심장 질환에 쓰이던 폭스글러브, 해열 및 소화제 등)
정화 의식 : 세이지, 시더, 스위트그라스 등의 약초를 태워 그 연기로 몸과 마음의 부정적인 기운을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스웨트 로지 : 뜨겁게 달군 돌을 이용한 증기 목욕으로, 신체적 해독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찰과 기도를 동반하는 강렬한 정화 과정입니다.
전통 치료사 : 공동체의 영적 리더이자 치유사로, 상담, 노래, 춤, 기도를 통해 환자의 내면적 치유를 돕습니다.
치유 노래와 춤: 북소리와 노래를 통해 환자의 진동을 자연의 리듬과 맞추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전통의학인 한의학과 어느 면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좀 더 영적인 치유에 집중한 듯한 느낌입니다. 미국 정부가 인디언 전통의학에 비용을 지불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영적'인 치유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디언들에게 현대 의학이 채우지 못하는 점을 보완해준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원래 인디언들에게 무상 의료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만, 관련 기관인 인디언 보건서비스(IHS)의 예산은 늘 처참할 정도로 부족했습니다. IHS 시설 내에는 전통 치료사가 상주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외부 치료사에게 환자를 보낼 돈도 없었습니다.
왜 IHS의 예산은 부족한 걸까요? 안타깝게도 IHS는 '재량적 지출'로 분류됩니다. 즉, 매년 의회에서 예산안을 짤 때마다 "올해는 이만큼만 줄게"라고 결정할 수 있는 항목입니다. 국방비나 다른 긴급 예산에 밀려 늘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됩니다.
(2020~2023년 기준)
일반 미국인 평균 의료비: 1인당 연간 약 $12,000~$13,000 지출
재향군인(VA) 의료비: 1인당 약 $10,000 이상 지출
IHS 대상 원주민 의료비: 1인당 약 $4,000 수준
IHS는 일반 미국인의 1/3 수준의 예산으로 병원을 운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통 척박한 오지에 있어서 실력 있는 의사를 데려오기도 쉽지 않죠.
서양 의학에 대한 불신도 뿌리깊은 문제입니다. 과거 미국 정부 산하 의료기관들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수술을 하거나 실험적인 치료를 행했던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지긋한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운영하는 병원은 우리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려 한다”는 생각이 깊게 박혀 있죠.
또한 미국 원주민들이 시달리는 주요한 질병은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 자살입니다. 서양 의학의 상담이나 약물 치료는 이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치료를 우선시하는 인디언 전통의학이 위와 같은 중독 치료에 더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계산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번 인디언 전통의학의 메디케이드 급여화는, 예산이 늘 모자라는 IHS 주머니를 털어서 치료해주는 게 아니라, 저소득층 보험인 '메디케이드'라는 더 큰 돈줄을 인디언 전통의학에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연방 정부가 부족한 IHS 예산을 우회해서 증액해주는 효과를 냅니다.
다만 인디언 전통 치료사의 수급과 분포 현황은 현재 미국 원주민 보건 정책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입니다. 수요는 압도적인데, 공급은 부족하고 분포는 불균형한 문제가 있죠. 전통 치료사는 부족 단위로 활동하므로 정확한 총수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디언 전통 치료사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거주구 오지에 머뭅니다. 하지만 원주민의 70% 이상은 현재 도시에 거주합니다. 도시의 원주민들은 전통 치료사를 만나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메디케이드 급여화는 바로 이 ‘분포’와 ‘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동안 무보수나 소액의 사례비로 봉사하던 치료사들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공식 비용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젊은 세대가 전통 치료사의 길을 걷게 하는 강력한 경제적 유인이 됩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치료사들을 제도권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하여 분포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에도 사각지대는 있습니다. 여전히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원주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도의 노란색 주(텍사스, 와이오밍, 플로리다 등)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소득이 아무리 낮아도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모순점이 남아 있는 정책이지만, 전통의학을 제도에 편입하려는 이 획기적인 시도가 정부의 선의대로 잘 진행될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