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릴 병원 실습 1주차가 끝난 그날 새벽 3시 반, 알람이 울렸다. 일어났다. 혼미한 정신으로 짐을 주섬주섬 꾸려나갔다. 새벽 4시 반의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네덜란드 암스트레담을 향하고자. 새벽 버스라는 로망을 가지고 네덜란드로 출발했지만, 여기서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1년 전이다. “우리 청춘 아니가?”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부산에서 강원도로 향하는 새벽행 무궁화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무려 8시간의 시간이 걸렸던 그 기차 여행 때, 취침 당시 허리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잊고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5시간의 버스행을 통해 떠올렸다는 거 아니겠는가. 젠장.
자체적으로 선택한 고난(?) 끝에 도착한 네덜란드는 프랑스 릴과 다르게 좀 더 현대적이면서도 드높은 품격의 향이 물씬 풍겼다. 흐린 날씨에도 사진이 상당히 예쁘게 나올 정도로 좋았던 곳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던, 큐켄호프의 튤립 축제는 한국의 벚꽃, 유채 축제만큼의 매력이 있던 곳이다. 유럽의 풍경들과 가지각색의 아름다움을 지닌 튤립들이 어우러지면서 꽃구경의 즐거움이 극에 달했다. 물론, 사람들이 과하게 많았던 것이 단점이긴 했다.
저녁에 방문한 곳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였다. 참고로 방문 자체가 합법적이며, 오로지 ‘구경’만 했다. 처음 접하자마자 충격을 받았다. 성이란 걸 이렇게 자유롭게 표현해낸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매우 과하게 자유로웠다) 말이다. 이곳을 관광지로 삼아 구경하러 오는 수많은 이들을 마주하며 좁디 좁았던 사고방식이 조금이나마 넓어졌다고나 할까?
암스테르담 Rijksmuseum은 말도 안 되게 큰 곳이다. 족히 5시간 이상 할애해야 다 볼만큼 아주 큰 박물관이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변화하는 네덜란드 예술을 접한다는 건, 동시에 당대의 유명한 미술가들의 그림들을 마주하는 건 그 자체로 행운이었다. 특히 렘브란트, 고흐의 작품을 볼 땐 더 그랬다. 굵은 붓으로 한 차례씩 수백 번 반복하여 그려 만들어낸 고흐의 자화상, 어두운 느낌이 들면서도 작품을 바라보게 만드는 생동감을 만들어낸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경외감을 선사해줬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를 통해 말한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기에, 여행지에서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고.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 등이 여행자를 대변해주며 특별한 존재 (Somebody)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가 된다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네덜란드 그 자체보단 노바디(Nobody)가 되는 그 순간들이 나에게 매혹적이었다. 암스테르담의 고고하고 현대적인 분위기, 튤립과 유럽 풍경들의 조화, 내 머리를 부수는 것만 같던 충격적인 홍등가, 네덜란드의 예술를 보여주던 박물관 등 그 거대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내 정체성은 오로지 한국의 20대 후반 남자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낯선 곳에서 관광객과 현지인들 안으로 들어가, 드러내지 않으면서 숨을 수 있었으며, 고유의 개별성을 잠시 버릴 수 있었다. 그게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항상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 덕택에 숨 막히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번 아웃 늪에 빠지게 하던 나 자신을 잠시나마 잊어버려도 되었으니깐.
무엇인가를 얻으며 ‘나’라는 사람을 더 알아가고 정립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여행이라 여겼던 때도 있다. 하지만, 마냥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행이란 때로는 정체성을 잠깐 버리는 것, ‘나’를 잊고 살아보는 것, 수많은 굴레 속에서 벗어나보는 것. 그렇게 하여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 그 또한 여행의 이유라는 걸 배우게 된 계기였다.
유럽에서의 나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다.
Nobody knows me.
나에게 큰 위안이 되던 문장이다.
PS.
2018년 4월 29일. 이날은 위 문장에서 주어가 바뀌던 날이다.
Somebody knows me.
한국에 있던 이들 덕분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전하는 생일 축하 덕택에, 특별한 존재 (Somebody)가 소중하다는 걸, 노바디(Nobody)는 가끔이면 족하다는 걸 마음속에 새기던 시간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