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서 J와 P가 있다. J는 체계적이고 목표지향적이며 계획성 있는 유형을 말한다면, P는 유연하게 접근하고, 개방적으로 여기면서, 융통성도 보유하고, 일에 대해 조기 착수하여 빠르게 마무리하려는 J보단 임박해서 착수하는 경향이 있는 걸 의미한다.
나는 J다. 매우 J인 편이다. 아래의 그림은 전문적으로 진행한 MBTI 검사 결과다. 보다시피, J의 값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사실, 검사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알고 있다. 내가 J라는 걸.
출처, MBTI Form Q
J로서 하루하루의 일정을 빡빡하게 세우는 편이다. 이전에 비해, 수많은 변수를 고려하기에 엄청나게 밀도 있는 계획표를 짜는 편은 절대 아닌데, 가능하다면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많이 하는 걸 선호한다. 그 때문에 매일, 매주, 매달, 매년의 계획까지 고려해 촘촘히 일상을 구성한다.
여행에서의 J는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짠다고 알려져 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진 어디 가고, 그다음 일정은 예약해 둔 식당에 가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전의 나 역시 여행에서조차 J였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여행만큼은 나는 P다.
어릴 때부터 [해리포터]를 좋아했다. ‘왜 이걸 많은 이들이 읽는 걸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던 그 시리즈에 빠져버려 어둠의 마법사들과 싸우는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등 [해리포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함은 덕질로 바뀌었고, 소설에서 영화, 게임으로까지 덕질을 확장했다. 특히 2022년 대작 게임 [호그와트 레거시] 덕분에 내가 상상하던 호그와트에서 공부하고, 마법 생물, 어둠의 마법사와 싸우는 모험으로 행복함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이유는 고대하던 영국 런던에 갔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9와 4분의 3 광장이다.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로 들어가는 문인 그곳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가득할 정도로 인기가 넘쳐났다. 점프도 하며, 혹시나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밀어보기도 했으며, 지팡이, 머플러를 사용하는 등 잠시나마 호그와트 학생이 되었다. 마음만큼은.
어릴 때 100번은 봤을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을 뮤지컬로 보게 되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탓일까? 상상 그 이상이었다. 동물들 각각의 특징을 살려내기 위한 무용, 그를 뒷받침하는 노래 실력과 연기! 특히 [라이온 킹]의 포문을 열던 노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소름이 쫙 끼쳤는데. 진짜 세상에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열심히 복습한 덕분에 영어를 완벽하게 알아듣진 못해도 모든 장면들이 절로 이해되더라. 성인이 되어 보게 된 첫 뮤지컬 [라이온 킹]은 아마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듯하다. 그만큼 강렬했기에.
이틀에 걸쳐 대영박물관을 보았다. 박물관이란 게 그렇게 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 나의 편견이었다. 그래, 영국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는데 말이지. 이집트, 아시아, 유럽 등 다양한 유물들을 책이 아닌 실제로 접하는 것만으로도 내 세계가 조금 더 풍족해진 듯했다. 제대로 관람하려면 이틀로는 터무니없었다. 최소 일주일은 필요했다.
해리포터만큼 좋아하는 게 [셜록 홈즈]다. 특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셜록 홈즈]를 제일 선호한다. 나의 덕질력은 영국의 베이커가 221B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곳은 셜록홈즈 박물관이다. 상상 속의 인물에 불과한 셜록 홈즈이지만, 내 머릿속에선 늘 구체적으로 그려왔던 그 인물의 집과 방을 구경하고, 책에서 마주했던 그의 삶을 다시 돌이켜보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셜록 홈즈]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만다.
영국의 재래시장 코벤트 가든, 캠던 마켓을 돌아다니며, 유럽만의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를 몸소 체험했다.
지나가며 우연히 마주한 세인트 폴 대성당은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안을 보지 못했다는 게 큰 아쉬움이다.
근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지나가다 찍은 곳인데..
런던에 위치한 72층의 고층 건물, 더 샤드에서 런던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노을이 지며 밤이 되는 그 모든 걸 사진으로 담아내며 런던을 눈으로 질리도록 즐겼다.
런던에서도 걸음의 연속이었다. 뚜벅이 본능 덕분에 여유를 즐기는 영국인들이 가득한 버킹엄 궁전, 그린 공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빅 벤 등도 놓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햄버거보다도 쉐이크가 너무 달아서 기억이 남는 쉑쉑버거, 영국의 명물인 버거 앤 랍스타. 둘 다 정말 맛있었다. 근데 영국은 햄버거의 나라인가? 왜 햄버거만 기억이 남는가?
듣는 사람은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J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보통 할 말을 잃게 되더라. 하여튼, J를 삶에서 선택하게 된 이유는 하나다. 목표를 최대한 빠르고 많이 달성하기 위해서다. 철저한 계획하에 운동, 독서, 업무, 약속 등 그 모든 걸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활용하여서 말이다. 그로 인한 단점은 명확했다. 과한 욕심으로 잠을 자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체력도 감소했고, 빌빌대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단점을 반영하여 조금 현실적으로 계획을 구성하여 실천하고자 노력 중이다. 과도한 야욕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하지만 여행에선 P를 선택하여 따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좀 더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해. 그렇게 하여 좀 더 행복해지고자 말이다.
수많은 것들에 관심을 뒀다는 말은 그만큼 주의를 다양한 곳에 분산시켰다는 말과 일치한다.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어떻게든 소기의 성과를 내긴 하나, 단 하나에 몰입하는 거에 비하면 관심의 정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행복은 선택과 집중의 결과물이며, 선택을 단순하게 할수록 행복의 밀도는 올라간다는 책 [관계의 물리학]처럼 밀도 있는 행복을 추구하고 싶었다. 여행이란 시간만큼은.
오해하지 마라. J라고 선택과 집중을 못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많은 선택을 할 뿐이다. 너무 철저한 시간 단위의 여행을 하게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라도 제대로 즐기지 못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경험하기도 했고. 그래서 이제는 P를 선택했다. 물론 알아야 할 게 있다. 100%에 가까운 J가 어떻게 완벽하게 P로 전향할 수 있겠나?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쫙 적고, 그중에서 우선순위들을 정리하는 것만 여행 전에 한다. 여행에 돌입하고, 전날마다 우선순위들을 보며 결정한다. 하고 싶은 일들을 과도하지 않게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동선이 가능하면 붙도록 만들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고 천천히 아주 여유롭게 하나하나 즐기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의 영국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