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본과 2학년 무렵이다. 친구들과 첫 해외여행을 가게 되어 마냥 설레던 때다. 처음으로 국내를 나가게 되니, 생각 외로 준비할 게 많았다. 여행 계획까지 세우려니, 막막하더라. 거기다, 해외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시점이 바로 학기 마무리 시험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것저것 찾아보고 즐겁게 여행 준비를 하기엔, 공부량이 너무나도 방대했다. 자칫 잘못하여 시험을 망친다면, 방학 기간 또한 재시를 치르고, 나아가 1년 쉬게 되는 유급까지 당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의 어려움(?)을 공감해준 친구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반할 뻔했다. 이성이었다면 반하고도 남았을지도?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덕분에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온전한 방학을 마주했다.
시험 끝난 다음 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 간다는 사실이 기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비행기 타고 해외로 간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왜냐고? 시험의 여파로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죽은 것처럼 곯아떨어졌으니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와! 이곳이 바로 해외입니까? 해외의 향기(?)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군요! 다른 나라 언어들로 가득했던 태국의 공항, 그곳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태국으로 끌려온(?) 탓에,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까지도 우리의 일정을 정확히 몰랐다. 그걸 인지한 순간,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 : 오늘 우리 어디 가서 자는 거야?
A : 아, 맞다……. 너 모르지? 말 안 했구나!
B : 우리, 오늘 여기서 잘 거야
나 : 여기?
A : 응
나 : 여기가 어딘데?
B : 공항
나 : 응?
A : 공항 여기서 잔다고!
B : 잠 덜 깼냐? 왜 못 알아들어?
나 : ??? 왜 ???
믿을 수 없었다. 당황하다 못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친구들이 실제로 공항 의자에 이불을 깔고 배낭을 가방으로 쓸 때 황당함이 배로 더 커졌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계획 짜는 일에 참여도 못 한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
군소리조차도 하지 못한 채, 나의 첫 해외 일정은 노숙으로 결정되었다. 그것도 공항에서…….
그 와중에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피곤함이 축적된 탓일까? 배게 대용으로 삼은 가방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었다는 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길어도 3초? 잠이 몰려오긴 했다만, 그런데도 나 자신이 참 대단하다. 해외에서 잘도 잔다.
태국에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태양이 비치는 바깥에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왓포 사원에서 특이하게 누워 있는 부처님을 보고, 고수가 팍팍 들어간 국수와 팟타이를 배불리 먹다 보니 너무 좋더라. 이게 바로 해외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인가! 신나게 놀러 다니는 내내, 땀 한 방울을 흘리기는커녕 시원한 나머지 추웠다.
그런데 잠깐! 춥다고? 저렇게 태양이 떠 있는데 안 뜨겁다고? 자전거로 10km 이상은 족히 달렸는데, 등이 하나도 안 젖었다고? 뜨거운 국수와 팟타이를 먹었는데, 오히려 시원하다고? 아니, 심지어 지금 여름인데? 그것도 이 태국에서?
등 뒤에 한 줄기의 식은땀이 딱 맺히더라. 그 순간, 갑자기 시험공부 하던 때처럼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이내, 개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불로 덮인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 건 아니었다. 친구의 이불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그 녀석이 일어나 있더라. 깨면서 내가 소리를 지른 탓이겠지. 그가 말했다.
그랬다.
더위로 유명한 나라 태국에서, 추위로 지옥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게 바로 나였다.
노숙 일정이 있는 줄 모르고 이불을 안 가져왔다가 큰일 날 뻔했다. 친구가 본의 아니게 나의 큰 은인(?)이 되었다.
친구들과 가끔 그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내가 니 은인인 거 알제? 은인한테 술 정도는 사겠지 뭐.
야! 니네들 때문에 얼어 죽을 뻔했다. 은인은 개뿔!
아니, 억울하면 니가 일정 짜던가.
휴유…….
뭐 대략 이런 패턴으로 말이다.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 30대가 되다 보니, 웃음은 잃어가고, 진지함만 가득한 하루가 늘 반복되는 느낌이다. 물론 내가 그런 스타일인 것도 고려하면, 그렇게 살게 되는 경향도 없잖아 있지만.
지겨울 수도 있는 일상을 버티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이런 소소한(?) 유쾌함 때문이다. 덕분에 어떻게든 미소를 지으며 살게 된다.
앞으로도 이왕이면 진지함보단 유쾌함이 가득한 삶을 누리며 지내고자 한다. 때론 실없이 웃으면서, 잡담과 같이 별거 아닌 이야기도 나누고,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즐겁게 더러는 실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들 덕분에, 오늘도 99% 유쾌함, 그리고 1% 진지함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만들어 가볼까 한다.
참고 자료 : 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 고영성, 신영준 / 로크미디어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