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인트리 Apr 21. 2024

너무나 사랑한 죄

금단 현상일까


자꾸 게을러지고 있다.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의욕이 없고 매사에 감정 표현도 시들하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더불어 몸무게는 매일매일 증량을 하고 있다. 점점 더 나락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눈 뜨면 출근이고 퇴근하면 눈을 감는다. 이런 생활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내 의지도 하나도 없다. 내 감정과 몸이 이렇게 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생활의 변화라고는 2주 전부터 믹스커피를 끊었다는 것이다. 마라톤을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혈압이 너무 높다 한다. 거기에 고지혈증도 있단다. 넌지시 의사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마라톤 대회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내 질문에 담당 선생님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에고 어머님, 욕심부리지 마세요. 고지혈증에 고혈압인 몸으로 무슨 마라톤을 나가세요? 지금은 안 돼요. 쓰러져요. 그리고 어머님 퇴행성관절염 있잖아요.” 의사 선생님 말씀에 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는지

“어머님 혈압 관리 좀 하시고 나가셔. 그리고 마라톤 말고 경보 대회. 그런 거 나가셔요. 관절 아끼셔야지” 다시 나를 달랜다. 시큰둥하게 진료실을 나오는 내 등 뒤에 선생님은 또 한마디 하신다.

“어머님. 물 좀 많이 드시고, 믹스 커피 줄이셔요.”워낙 오래 나를 지켜본 선생님이라서 탄수화물 좋아하고 믹스커피 좋아하는 내 식생활까지 알고 계신다.      


출처. mat_sigedda 인스타그램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위장은 밥보다 커피에 훨씬 더 익숙해 있다. 눈뜨면 커피를 먼저 타 놓고 출근길에 한잔, 회사에 도착해서 한잔, 다시 업무를 시작하면서 한잔, 그렇게 하루 종일 커피는 나와 함께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이어 피로를 달래줄 믹스 커피가 줄줄이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근처에 있다. 그러다 보니 밥 먹자는 소리에 나의 반응은 시큰둥해도 커피 한잔 하자는 소리에는 두말없이 좋다고 한다.     

     

달달한 믹스 커피는 내 영혼의 친구 같다. 일에 집중해 있다가 한숨을 돌릴 때 시원하게 마시는 커피는 온몸의 세포를 깨운다. 달달한 커피가 핏줄 속으로 찌릿찌릿 퍼져가는 느낌이다.  시들해 가던  내 정서와 숨어있는 용기에 활활 불을 당기기도 한다. 커피의 힘으로 일의 능률이 오르기도 하고 , 감정의 최대치에 기대게 되어 한없이 상냥해지기도 한다. 일이 힘들수록 감정이 고될수록 달달한 믹스 커피가 최고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2주 동안이나 끊었다. 줄여도 되는데 내 시야에서 믹스 커피를 모두 없애 버렸다. 직장에도 집에도 믹스 커피를 보이지 않게 치워 버렸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벗어나려고 나름의 실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부작용이 너무 크다. 인생이 재미가 없다. 이렇게도 의욕이 없을까. 괜히 머리도 아프다. 늘어지고 게을러지는 이유가 커피 때문인 것 같다. 담배를 끊으면 심각한 금단 현상이 온다고 하더니 지금 내가 믹스 커피 금단 현상이 온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다시 쿠팡에 믹스커피를 주문했다. 밤에 주문한 커피는 새벽에 북청 물장수처럼 문밖에 벌써 와 있다. 커피택배를 보자마자 굶주린 사자마냥 박스를 뜯었다. 부랴부랴 커다란 머그컵에 믹스커피 두 개를 쏟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냄새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 알갱이들이 뽀얗게 녹아내리는 모습은 더더욱 예술이다. 묵직하던 두통이 사라지는 것 같다. 믹스커피 좀 줄이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새벽 4시 야금야금 기상 커피를 마신다.      


어제까지 의욕 없고 나른하던 기분은 모두 사라졌다. 믹스커피를 끊고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2주씩이나 우울하게 보냈는지 지난 시간들이 후회되었다. 나의 육신과 영혼을 이렇게 지배하는 것이 내 인생에 뭐 가 또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아침이다. 영혼의 단짝을 만난 듯 반갑고 기쁘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하고 행복하다. 어제까지 천근만근이던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당장 마라톤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컨디션이다.      


나는 왜 나에게 이롭지 못한 것에는 이토록이나 열광을 할까. 버려야 할 습관들이나 먹으면 안 되는 것들에는 줄줄이 끌려 다닌다. 끌고 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빼꼼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참 유혹당하기 쉬운 사람이다. 즐겨 따라가면서도 살짝 죄책감이 드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뭐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니 그리 죄지은 마음일 필요도 없기는 하다. 내 몸과 적당히 타협하는 선을 찾으면 그뿐. 나는 그냥 믹스 커피와 행복하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자잘한 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