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퇴사자들의 공백이 있어서 우리 회사는 상시채용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입사 지원자들의 이력서가 메일로 들어와 있습니다. 제조현장의 생산직은 고학력도 필요 없고 대단한 경력도 필요 없습니다.
성격 좋고 성실하며 건강하면 되지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눈에 띄게 고학력과 화려한 경력으로 정년퇴직을 하신 60대 초 중반 연령분들의 이력서가 종종 있습니다. 대기업의 임원이던 분도 있고, 공무원으로 퇴직하신 분도 있고, 심지어 은행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신 분의 이력서도 있었습니다. 만나보면 그분들 대 부분이 몇 년을 놀다 보니 자신의 쓸모에 대한 고뇌가 생겼다고 합니다. 평생 일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것이지요. 퇴직과 동시에 그 역할이 사라져 버리니 자존감이 급격히 하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보다도 다시 어딘가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뜬한 나이, 60대 초 중반의 고뇌가 내 안으로 스며듭니다. 나도 어느새 퇴직을 앞둔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 면접자 한 분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반듯하게 체크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분이 면접에 오셨어요. 반짝이는 구두에 깔끔한 첫인상은 정장과 너무나 잘 어울리셨지요. 표정에도 여유와 온화함과 격식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어디 기업체의 ceo 이거나 크게 한자리를 하고 계실 것만 같은 인상이었어요. 그분이 면접장에 들어서자 거래처에서 미팅을 하러 오신 분인 줄 알았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어느 팀의 누구를 찾아오셨어요?"하고 질문을 했지요. 그분은 살짝 주저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저 오늘 면접 보러 왔는데요...."
순간적으로 그분의 외모가 주는 느낌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습니다.
"아,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시고요." 그리고 이력서를 살폈지요. 이력서에는 누구나 알만한 기업의 정년퇴직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더구나 근무 기간도 30년이나 되시더군요.
"식품회사 생산직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고 오셨을까요?"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미리 좀 알아봤는데 음식을 만들어서 도시락 같은 형태로 제조하는 회사라는 것 정도만 알아요."라고 답을 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일이면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을 했어요. 제가 음식 하는 것을 좋아해요. 일을 시켜만 주면 뭐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십여 분 동안 우리 회사는 샐러드를 만드는 회사이며 대표님의 제품에 대한 열정과 우리의 작업 공정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면접자 분과 비슷한 나이의 또래분들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면접자는 마음을 좀 놓으셨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실 퇴직을 하고 몇 년은 너무 재밌었어요.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하고 실컷 놀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울해졌어요. 일이 없으니까, 하루가 너무 길더라고요. 점점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없어져서 게으름을 피우게 되고, 더구나 사람하고 말할 기회도 없고… 일을 안 하고 사는 게 맞나 싶어 진 거죠. 그때부터 모든 게 시들해졌어요. 연금 있으니 살아가는데 사실 별 문제도 없어요. 하지만 아침산책을 하다가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단순한 일이면 이 나이에도 시작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체력도 기르기 시작하고 이력서도 넣기 시작했습니다." 긴 이야기가 왠지 내 맘을 찌릿하게 울렸어요. 나도 정년퇴직 후 어느 날 일을 찾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생산성 있는 삶이라는 게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분께 입사 설명을 해 드리고도 채용을 해야 할까 말까 고민을 했어요. 괜히 하루이틀 나오다가 안 나오면 같이 일을 하던 사람들만 힘들어지니까요. 팀 내 젊은 친구들은 작업 특성상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우리의 일을 하지 못할 것 같다면서 입사 반대를 했지요. 하지만 나는 달랐어요. 그분의 의지와 용기를 격려하고 싶었어요. 내 고집으로 채용하기로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그분은 입사 첫날부터 30분이나 일찍 오셨고 근무시간에는 항상 즐거운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누구보다 어려운 일에 앞장서 주시는 현장의 형님이 되셨어요.
나는 이력서를 고르고, 면접을 보고, 함께 일할 사람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지요.
누구는 정말 절박하고, 누구는 외롭고, 누구는 자존심을 꾹 눌러가며 찾아오거든요. 이력서 한 장에 인생을 담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줄줄이 쓰인 경력으로는 그들의 경력만 보이고 인생은 보이지 않습니다. 면접에서 얼굴을 맞대어 비로소 보이는 절실함과 성실한 태도가 인생의 이력서로 읽힙니다. 눈에 보이는 반듯하고 성실한 태도가 바로 인생의 고품격 이력서 같거든요. 그래서 요즘 나는 고스펙 이력서가 아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더 따뜻한 마음으로 오래 기억하게 됩니다.
“늦게 배워도, 꾸준히는 할 수 있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정말 성실하게 하겠습니다.”
참고용: 가끔 들어가 보는 "중장년 일자리 찾기 "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