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에도 벼락치기는 통했다.

어려운 IT세상

by 파인트리


청소년기에는 왜 그랬을까요. 평소에는 공부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놀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시험 날이 다가오면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지요. 쫄깃쫄깃, 달력만 들여다보며 날짜를 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 바로 전날.

“지금이다.”

그때서야 책상 앞에 앉아 밤을 꼴딱 새우며 공부를 했어요. 신기한 건, 그렇게 밤새운 공부로도 그럭저럭 부끄럽지 않은 등수 안에는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엔 벼락치기를 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던 덕분이었을까요. 하긴 40~50년 전이니, 시험 날 농삿일 때문에 학교를 빠지기도 하던 때였으니까요. 어쨌든 그때 쌓은 건 실력이 아니라 ‘벼락치기로도 되더라’는 이상한 자신감이었습니다. 그걸 믿고 어영부영 살다 보니, 나중에 깊이 있는 학문 앞에서는 내가 얼마나 준비가 안 된 사람인지 자주 마주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제가 이 나이에, 며칠 전 다시 벼락공부를 했습니다.


시작은 이랬어요. 대표님께서는 함께 만나기로 한 석학의 약력을 보내주셨습니다. 만나기로 한 분은 서울대 이준환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표님의 은사님이신 분이라고 했어요. 약력을 보니 우리가 만나게 될 분은 로봇저널리즘을 실제로 실행했고, 인간과 AI가 어떻게 융합해야 더 좋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분이더군요. 석학의 약력을 보니 더 어렵고 머리만 아팠어요.

질문하고 싶은것은 많았지요. 제가맡은 업무가 생산라인의 자동화이거든요. 자동화라는 것에는 요즘 대세인 AI활용이 빠질수 없잖아요. 요즘은 “AI와 챗GPT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 것은 나도 알고는 있지요. 하지만 컴퓨터, AI, 챗GPT. 이 단어들은 내게 여전히 어렵고, 솔직히 말하면 불편해요.


완전한 컴맹에서 출발해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려고 죽도록 애쓰는 중입니다. 그런데 날이 밝을 때마다 새로운 게 하나씩 들어와 있는 IT세상이잖아요. 또 배워야 하고, 또 익혀야 하고, 또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야 하는일이 너무 많아요. 정말로 정신이 없지요. 그리고 묻는일이 많아서 미안할 때도 많아요.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업무 안으로 AI가 들어오면서 혼자 해결되는 답이 생길 때면 속으로 고마워 했지요. 한편으로는 AI에게 얻어낸 정답은 진짜 내 실력이 아닌 것 같아 조심스러워지기도 했어요. 그런 와중에 전문가를 만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만나기 전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강의는 모조리 찾아 들었어요. 생소한 컴퓨터 용어를 정리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청소년기 벼락치기 공부를 하던 때처럼 정신이 말짱하고 잠이 오지 않더군요. IT 전문가들 사이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나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어려운 말은 수첩에 적어 ‘컨닝용 메모’를 만들고, 질문도 미리 정리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용어를 물어보며

“이런 질문 어때? 너무 유치하지 않지?” 하고 확인도 했지요.


드디어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대표님과는 사제지간이라 그런지, 너무도 다정하게 맞아주셨습니다. 동행한 우리까지 반갑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셨어요. 유튜브에서 보던 모습보다 실물은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셨고, 표정은 훨씬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제자인 대표님을 바라보는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어요. 대표님께서 회사의 성장 과정과 실행 목표, 추진 중인 사업들을 설명하는 동안에 교수님은 꼼꼼히 메모하며 진지하게 경청하시더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대표님을 이렇게 사랑해 주시다니’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조 현장에서 컴퓨터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이야기가 시작됐어요. 이상하게도 어렵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재미있었어요. 구간별 자동화를 위해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을 이야기하자 교수님은 실제로 가능한 사례를 들어 주며 “이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이야기할 때는 교수님 자신의 과거를 꺼내며 미리 미래를 상상하며 공부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그 덕분에 막연한 걱정이 한결 줄어들었습니다. SF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이 현실이 되어 가는 세상 이야기는 놀랍고 신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공상과학 영화를 참 좋아했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이 봐온 장면들이 이해를 돕는 배경지식이 되어줄 줄은 몰랐지요. 그날, 나는 알게 된게 있어요. 배움은 공포가 아니라 호기심이 되면 재밌어 진다는 사실을 말이죠.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행했던 부문장님께 조심스럽게 털어놓았습니다.

“저 어젯밤에 벼락치기 했는데, 오늘 성공했어요.”

그러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온 대답.

“아, 저도 벼락치기 했어요.”

순간 웃음이 났어요. 나보다 훨씬 아래 연배의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 괜히 안심이 됐거든요. 나만 뒤처진 게 아니었구나. 나만 애쓰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던거지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발을 들인 이 세계는 이제는 ‘경력’으로 버티는 곳이 아니라 ‘공부’로 따라가는 세계인 것 같아요. 모르는 건 나이 탓이 아니고, 시대가 발전하고 변하는 것이니 죽어라 준비하면 되는것라고 깨닫기도 했지요.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노병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계속 공부해야 할 뿐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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