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와 드라이버가 인정하는 세계

일단 고쳐보기

by 파인트리

집에 돌아오니 세면장의 하수구가 막혀 있습니다. 뚜껑을 열고 살펴보니 중간 거름막이 막혀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딸 만 많은 집이니 머리카락이 좀 많이 흘러들어갔겠어요? 막힌 내용물이 유추되었지요. 하수구를 해부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살펴보니 밸브를 돌려서 열라는 신호가 보이더군요. 열림, 닫힘, 화살표. 집중해서 망치와 드라이버를 가져와 화살표 방향으로 드라이버를 대고 망치로 툭툭 밀어 내니 자연스럽게 하수구 뚜껑이 열립니다. 하부의 걸림 장치까지 모두 꺼냈습니다. 예상대로 머리카락이 꽉 막고 있네요. 머리카락을 뜯어 내고 하수구 밸브를 새것처럼 닦아서 다시 조립했습니다. 예상대로 물이 시원하게 내려갑니다. 훌륭하게 해결을 했지요.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남편은 투덜댑니다.

"아니, 내가 오길 기다리지 그걸 혼자 왜 해치우는가?"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대충 뜯어서 살펴보면 고장 난 곳이 보여요. 맞춰놓고 부속을 갈아 끼우면 잘 되기도 하고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얼마 전에는 전기밥솥이 고장이 났어요. 스프링도 바로 잡고 뭐 이것저것 손을 댔어요. 그런데 밥이 될 때 김이 핑핑 솟아올라야 하는데 김 올라오는 소리가 안 나더라고요. 고압 설정 밥솥이 아닌데 왜 김이 안 나지? 밥이 다 되었는데 뚜껑이 안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젓가락을 꽂아서 바람구멍을 내줬지요. 김이 빠지더군요. 식구들이 난리가 났지요. 밥 솥이 폭파하게 생겼다고요. "엄마, 제발 서비스받아요." 아이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히히. 할 수 없이 밥솥은 구매했습니다.


사실 나는 뭔가 고장 나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칩니다.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면 일단 뜯고 보지요.

문제가 보이면 해결하려는 본능이 나에게는 있나 봅니다.


빨간색은 망가뜨림.


이게 하수구나 밥솥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 이기는 합니다. 사람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거든요. 어딘가 막혀 있으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돼요. 소리가 안 나면 구조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믿게 되고, 물이 안 내려가면 반드시 어딘가에 머리카락이 엉켜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해 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나는 기다리지 않아요.

서비스센터를 부르기 전에 설명서를 보기 전에 일단 먼저 열어보고 살펴봅니다.

남편 말대로,

“기다리면 될 일을 왜 혼자 해치우느냐”는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위험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용감함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압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더 답답해하고 막힌 걸 보고는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지는 거지요. 고장 난 걸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불안해요. 고쳐지든, 망가지든. 성공하면 혼자 뿌듯해하고, 실패하면 새로 사는 거죠 뭐. 아마 나는 무엇을 잘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막힌 걸 그냥 두지 못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에 냉전 중인 상하 관계 두 분이 있었어요. 서로 서운하다고 상대 흠집을 잡았지요.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는 관계였어요. 양쪽 모두 자기 맘을 몰라 준다고 하소연을 했고요. 작업 지시를 해도 '그 사람이 시킨 일이면 안 해! 못해!'라고 고집을 피우고, 상사 역시 '지까짓게 뭘 하겠어? 부정 덩어리! 투덜이' 이랬지요. 두 사람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회사 내에서 큰 소리가 날까 봐 나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동료들이 모두 조마조마했어요. 막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내 맘은 정말 불편하더라고요.

" 둘이 탁 터놓고 문제가 무엇인지 남자답게 한번 싸우면 안 돼요? 회사 앞마당에서 멱살잡이라도 하고 풀어요. 서로 얼굴 안 마주치려고 하고 뒷담 까고 비겁하게 왜 이래요!!" 내 제안에 둘 다 쳐다보기도 싫다는 답변이었어요. 누군가 퇴사하지 않는 한 해결 될 방법이 없었지요.


그날부터 나는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의 칭찬을 계속해 줬지요. "와, 그때 이렇게 행동한 것은 너무 잘했다고 칭찬하시더라" 이렇게 전달하면

"왜 나한테는 직접 얘기를 안 하신대요."이렇게 삐졌습니다. 뭐 사실 칭찬을 직접 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내가 " 이렇게 해결을 하다니 정말 잘하는 거네요."라고 분위기 엄청 띄웠지요. 결국 "그건 좀 잘했네요."라고 상사의 입에서 억지 칭찬을 내뱉게 만들었지요.

"그 친구가 이런 면은 너무 감사해하고 있어요." 하고 상사분께 전달하면

" 왜 직접 얘길 안 한대요." 떫떠릅하게 상사 역시 이런 반응을 보였지요. " 아니 졸개가 어떻게 직접 감사하다는 말을 하겠어요." 나는 이렇게 저렇게 둘 사이의 감정 줄다리기에 온기 한 스푼을 계속 넣어 주고 있었지요. 반년을 이렇게 보냈나 봐요. 어느 날 보니 둘이 절친이 되어 있더구먼요. 주차장 화단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뭐라 뭐라 속삭이기도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나서면서 상사의 마음을 녹이더라고요. 지켜보던 내가

"와~~ 두 남자가 서로 잡아먹으려 들더니 이제 절친이 되었네요?" 내 말에 둘 다 머쓱해하더니 "서운하게 말씀하시니까 그렇죠!"라고 아랫사람이 말합니다. 그 이후로도 둘은 암튼 서로를 극진히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어요. 나는 어느새 막힌 것을 하나 뚫었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겁이 없는 건지 신중하지 않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살아왔어요. 고쳐보면서 배우고, 망쳐보면서 크게 한번 배우고, 해체하면서 모르는 구조를 이해하고, 조립하면서는 나름의 순리의 질서를 배우고 만들어 왔던 건가 봐요. 공인된 완벽한 방식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나만의 자연스러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나는 앞으로도 물길이든, 김 빠지는 구멍이든, 사람 사이든, 내 삶의 구조든. 어디선가 막히면 나는 또 뚜껑을 열어볼 게 뻔해요. 나쁜 관계는 안된다고 설득하고, 막힌 것은 뚫어 가자고 설득하면서 내손에는 또 어느새

망치와 드라이버를 들고 있을 것 같네요. 좋은 방식인지 아닌지 아직 구분은 안되지만요.ㅎㅎ.


막내가 보낸 오로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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