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 씨는 여고 시절 동무아닌동무다. 나보다 두 살이나 위였다. 무슨 사연으로 나랑 같은 학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피부가 유난히도 하얀색이었다.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 덕에 얼굴이 더 돋보였다. 금순 씨는 유난히 나를 챙겼다. 나는 철없고 인정머리 없는 아이였다. 남을 챙길 줄을 몰랐다. 그저 받기만 했다. 금순 씨는 틈틈이 초콜릿을 내 가방에 넣어 두었다. 점심이라도 거르고 있으면 영락없이 내 책상 속에 빵과 우유가 있었다. 체육시간이 끝나면 내 체육복을 정성스레 접어놓았다. 공부 한다고 도서관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금순 씨는 공부하는 내 모습이 좋다면서 간식거리를 사 왔다. 언니처럼 엄마처럼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그냥 받는 게 익숙한 사람처럼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고3 여름방학에 뜬금없이 금순 씨가 자기 집을 같이 가자고 했다. 남의 집에 가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거절했다. 금순 씨는 한번만 같이 가 달라고 애원했다. 그동안 일이 고맙기도 해서 일단 가방을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기차역으로 가는 게 아닌가, 나는 가까운 거리인줄 알고 따라 나섰다가 크게 당황했다. 불안한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고 옆에 잠자코 앉아있었다. 완행열차는 밤새 달려 광주에 도착했고 또 갈아타고 어찌어찌해서 함평에 다다랐다. 금순 씨의 집은 마당이 넓었다. 마당을 지나서 마루까지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마루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나니 중학생 남자아이 하나가 달려 나와 금순 씨 품에 안겼다. 누나라고 불렀다. 금순 씨는 동생을 안고 쓰다듬고 귀여워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을 차렸다. 다른 건 기억이 없고 깻잎 장아찌가 맛있어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던 기억만 난다. 그렇게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돌아서서 기차역으로 갔다. 그때까지도 금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는 어디 있는지, 아버지께는 왜 인사도 안 하고 오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를 못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나는 학력고사를 치렀다. 금순 씨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 하던 날 금순 씨는 꽃다발을 사들고 나를 축하해 줬다. 나는 여전히 맥락 없이 받기만 했다. 그런데 그날 다방에서 나를 보던 금순 씨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음악다방의 테이블에 있던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면서 금순 씨는 어렵게 한마디씩 말을 했다. 동생학비를 마련해야해서 자신의 학업을 포기 했다던 금순 씨, 새엄마 밑에 두고 온 동생이 마음에 걸려서 한번만 보고 오려고 했다던 지난 여름방학, 그 길을 같이 가줘서 마음깊이 고마워한다던 말, 몇 마디 말끝에 눈물이 그렁하던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로 금순 씨를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한번쯤 찾아가보기라도 했어야 맞다. 마음속으로는 나중에 먹고살기 좋아지면 꼭 한번 찾아보리라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여고 졸업 후 40년이 지나버려서 금순 씨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금순 씨에 대한 기억이 순수하게 남아있는지도 의문이다. 일부기억은 왜곡 되어졌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기억을 찾을 수 있는 증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심지어 내가 졸업한 학교도 폐교가 되었다.
함평은 지금 유명한 고을이 되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 함평나비축제에 간 적이 있다. 함평이라는 지역이름이 나를 끌었기 때문이다. 나비 축제는 뒷전이고 어렴풋한 기억으로 함평농고 뒤 어디쯤에 있었던 금순 씨네 집을 찾아보려고 한나절을 헤맸다. 내 나이 또래의 함평 주민을 보면 혹시 금순 씨가 아닌지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말씨 점잖은 목소리를 가진 가게 주인을 만나면 혹시 이름이 금순 씨가 아닌지 명함을 먼저 보기도 하였다. 함평 너른 들에 연보랏빛 가득하던 자운영 꽃이 망울망울 금순 씨 눈물 인듯하여 내 마음만 아팠다. 그때 참 많이 후회 하였다. 좋은 사람을 나는 그냥 보냈구나. 이제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겠구나 싶었다. 내가 어렸다는 이유로 그렇게 살가운 정을 모른 체 했다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진정한 정을 몰랐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지냈던 철부지 였다고 반성만 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금순 씨라는 이름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다. 여고시절의 금순 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음이 간다. 젊을 때 월세를 살던 주인이 금순 이라는 이름이었다. 집주인 금순 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사는 동안에 단 한 번도 건물의 하자에 대해 얘기를 해 본적이 없다. 무조건 내 손에서 해결했다. 수도가 고장나도 망치를 들고 고쳤고, 천정에 빗물이 새도 아무말 없이 밤새 도배를 했다. 또 다른 금순 씨는 지금은 나의 절친 이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다. 처음만나는 날부터 내가 그렇게 잘 해줬다고 지금도 말한다. 50넘어 직장에 나와서 낯설고 무서웠는데 나를 만나 잘 적응했다고 말한다. 옛날 금순 씨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절친 금순 씨에게 그리 한 모양이다. 절친 금순씨의 말을 듣고 나는 새로운 생각을 하였다. 50넘어 사회에 나온 두려운 그녀들에게 금순씨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나는 기꺼이 그녀들의 금순씨가 되어 주기로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 옛날 금순 씨는 나에게 왜 그리 잘 했을까 의문이라고 지금의 절친 에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의 절친 금순 씨는 말한다. “ 너한테는 묘하게 믿음이 생겨. 뭔지 모를 의지가 되고. 그건 왜 그런지 모르겠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우라가 너한테 있었을 거 같아. 아마 어릴 때 금순 씨도 친구여도 친구 같지 않은 든든함이 너에게서 느껴졌을 거야. 마음이 편했겠지. 지금의 나처럼.” 하여간 금순 이라는 이름은 나로 하여금 맥이 풀리게 하는 이름이었다. 그런 금순 씨가 기억이 나질 않아 추억 할 수도 없다. 역시나 그 금순 씨는 나를 기억 할까 의문이 든다. 내가 아는 그 금순 씨를 아시는 분 있을까요?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