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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혼8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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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채 Mar 19. 2022

물건 마다 사연이 있다

한꺼번에 사기 보다는 추억을 담아 하나씩

혼수라는 이름으로 신혼집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건 너무 재미가 없다.  야금야금 우리들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한지붕 아래 같이 살게 될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신혼집에 두고싶은 물건이다 싶으면 하나씩 사서 모아두었다. 긴잠에 빠져있던 물건들에게 원주로 가자는 소식을 전했던 그 날. 녀석들도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토이스토리의 버즈와 우디처럼 녀석들은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해주었다. 오늘 사진으로 남긴 이 작고 예쁜 컵들도 마찬가지다. 헬싱키에서 업어온 아이들인데 우리집으로 오게된 사연이 또 있다.


2020년 1월 초. 헬싱키에서 새해를 맞이한 우리는 작고 아담한 한 카페에 들렀다. 커피도 맛있고 공간도 감각적이라 무척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물컵이었다. 누구나 따라 마실 수 있게 구비된 물병 앞에 가득 쌓여있던 물컵. 적당하게 작아 그립갑도 좋으면서 특유의 은은한  하늘색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내가 물을 가져다준 그 순간부터 그녀는 나의 이야기는 듣는둥 마는둥, 온통 정신이 이 작은 컵에 쏠려 있었다. 이 컵은 대체 어디걸까? 어디서 살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컵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어떤 정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카페를 떠난 후에도 떠나지않은 그 궁금증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혹시나 하면서 여러 소품샵을 전전했지만 어떤 힌트도 찾을 수 없었고, 우리는 카페에 다시 가기로 했다. 사실 여행 중에 같은 카페에 두번은 가지 않는 편이다. 갈 곳이 너무 많으니까. 매일 새로운 곳을 시도하는 편이 더 좋았다. 하지만 컵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상념에 잠긴 그녀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짙은 어둠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금기를 깨고 같은 카페를 두번 가기로 했다. 그냥 무작정 물어만 보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단군에서부터 전해내려온 내 안의 유교유전자가 커피 두 잔부터 주문하도록 했다. 가만 앉아서 짐짓 아무 일도 아닌 듯 영혼없는 담소를 나누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는 직원 한명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저 물컵은 어느 브랜드건가요?’


그녀는 알바라 잘 모른다며 사장님께 물어본다 말했고, 잠시 후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장님이 우리의 테이블로 왔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듯, 그녀는 말해주었다. 사실 그 컵은 프랑스에서 온 요거트  제품의 컵이라는 사실을. 좋아해서 자주 사먹었는데 그 컵이 예뻐서 모으고 모으다보니 많아졌고 결국 자신의 카페의 물컵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처 마트의 요거트 코너에 가보라는 친절한 설명에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냉장 코너를 한참을 뒤지다 감격의 비명을 질렀다. 아, 정말 요거트였다. 정말 상상도 못한 정체였다. 이 감각있는 사람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걸 눈여겨본 우리도 대단하다. Real recognizes real.


허겁지겁 요거트 4개를 샀다. 먹어보니 과연 맛도 좋았다. 컵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스러운데 맛까지 좋다니.. 감탄하며 싹싹 긁어 다 먹고는 컵을 씻어 한국까지 모셨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핀란드 살이를 하다 한국까지, 원주까지 오게 된 운명. 삶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인가. 그것은 인간뿐 아니라 물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여행 직후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이 여행은 우리의 마지막 해외 여행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한국행 막차를 탄 친구들이라고해도 좋을 것이다.


이 녀석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2년도 채 안되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까. 더 오랜 세월을 기다린 물건도 많다. 이제 우리의 신혼집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미녀와 야수>의 루미에와 콕스워스처럼, 우리가 잠든 사이 저마다의 무용담을 뽐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요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돌리면 떠오르는 추억이 많다. 작고 큰 물건 하나하나에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새하얀 도화지가 아니라 형형색색으로 가득 색칠한 스케치북으로 이 공간을 채웠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곳에 놓고 싶은 것은 단지 고급스럽고 비싼 물건이 아니다. 추억이다. 수집가는 자신이 수집한 물건을 어디서 어떻게 샀는지 모두 기억한다고들 한다. 내가 수집하는 것은 추억이다. 신혼집은 8평이지만 추억을 모으는데 필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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