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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채 Mar 06. 2017

당신이 3월에 러시아를 간다면

케이채의 포토 산문집 #5

여행지에는 성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지역을 여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그곳의 매력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기겠죠. 당연하게도 누구나 이런 성수기에 여행을 하고 싶어 하니 비행기표나 숙소도 비쌉니다.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고 유명 관광지에서 줄 서는 것은 기본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수기에 여행하자니 그것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비행기표나 숙소 등의 가격은 쌀지 몰라도 날씨가 너무 춥거나 혹은 더워서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비수기에는 유명한 장소들이 제법 문을 닫거나 영업시간을 단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행 좀 했다는 사람들은 성수기와 비수기의 사이의 틈새를 이용해 여행하려고 미리 계획을 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저는 여러 번 여행하기 부적합하다는 시기에 여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3월에 러시아로 떠난 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요, 바로 슁겐 조약 때문이었습니다. 핀란드에서의 3개월 여정을 마치고 저는 주변 다른 곳을 조금 더 여행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슁겐 회원국들은 한 번에 90일 이상 여행할 수가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핀란드에서 이미 90일을 다 채워버린 저는 3개월은 더 기다려야 다시 이 국가들을 여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대부분의 유럽권 국가들이 슁겐 회원국들이었기에 저는 유럽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핀란드의 국경만 넘으면 유럽이면서 유럽이 아닌 러시아가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월에 상트페테부르크에 도착한 이유였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아주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북유럽권처럼 긴 백야와 함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고요. 크리스마스 즈음 한 겨울도 참 매력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새하얀 눈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알록달록 장식들이 겨울왕국처럼 도시를 물들인다고 말이죠. 그런데 3월은 겨울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었습니다. 봄이 찾아 올랑 말랑하고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시즌이었습니다. 거리는 반쯤 녹다 얼어버린 눈들로 지저분하고, 하늘은 매일같이 흐리고 우중충하기만 했습니다. 비가 오던가 눈이 오던가 하나만 하면 좋을 것을 그 중간쯤 위치한듯한 어떤 것들이 간혈적으로 내렸습니다. 공산주의 영웅 레닌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과거의 이름인 레닌그라드와 더 닮게 느껴졌습니다. 공산주의처럼 차갑고 칙칙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진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진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제가 여행 사진가였다면 아마 이런 시기에 여행을 하진 않겠지만, 이런 칙칙한 풍경도 결국 이 도시의 한 부분이니까요. 흐린 날씨와 지저분한 거리는 저로 하여금 밤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저녁이 찾아오면 젊음으로 가득 찬 연인들과 여성들이 한껏 차려입고 거리로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고부터 저는 밤에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기 없는 3월의 풍경도 그들의 화려한 스타일 앞에선 초롱초롱 반짝였습니다.



사실, 처음 러시아에 올 때는 밤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많고 스킨헤드들이 공격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요. 역시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유 없이 두려움을 키우게 되는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에 무척 긴장했지만, 생각 외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에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그 역시 3월이라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성수기도 아니고 날씨도 통 좋지 않으니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일찍 집에 들어가 버렸을 수도 있겠죠. 범죄자들도 일기예보는 보니까요. 그렇다면 무척 운이 좋았습니다.



외부의 좋지 않은 날씨가 저를 박물관으로 향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사진에만 온통 정신을 팔다 보니 박물관을 잘 가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헤르미타쥬(Hermitage)는 굉장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세계 최대의 크기에 온갖 장르의 미술이 가득한 그곳은 저의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엘리엇 어윗 같은 사진가들도 일찍이 뉴욕이나 파리의 박물관에서 눈부신 순간들을 찾아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눈을 활짝 열고 이 거대한 박물관을 하루 종일 헤매었습니다. 사실 작품보다는 사람들을 관찰하느라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은 아직까지도 헤르미타쥬입니다.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넘어왔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스크바의 3월 역시 여행에 적합한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날씨는 흐렸고 채도는 낮았습니다. 봄은 올 듯 말 듯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붉은 광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테트리스 게임에서 보았던 세인트 바실 성당이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알렉산더 가든에서 근위병들의 교대식도, 레닌의 썩지 않는 시체를 보는 것도. 관광객이 되어 하나씩 다 클리어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람들은 제게 모스크바가 진짜 러시아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이라고요.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도 아닌 것이 아시아도 아닌 것이. 러시아는 러시아만의 묘한 개성이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다 서구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도 유럽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비록 우울증이 찾아올 것 같은 날씨였지만 저는 모스크바의 독특한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냉전시대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지하철역들이 참 좋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혁명광장 역이 가장 마음에 들었답니다. 날씨가 안 좋을 때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키다가,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역들도 보고 사람들도 구경했습니다. 모스크바의 여성들의 감각적인 패션은 어딜 가나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재밌는 것이 남자들은 대부분 정말 막 입고 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여성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패셔니스타였고 런웨이를 걷듯 당차게 거리를 걸어나갔습니다. 휴대폰 통화를 하며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 또한 알게 되었는데요. 이 두 가지 깨달음은 모스크바에서 제가 사진을 담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보낸 시간 중 단 하루, 맑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봄이 찾아올 듯 푸르른 하늘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는 햇빛을 느꼈습니다. 따가울 정도로 제 볼을 강하게 비추었지만 반갑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날 고르키 공원에 들린 것은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의 이 좋은 날씨에 모스크바 사람들도 한가득 공원으로 몰려들었으니까요.



문을 열지 않은 가게도 많았고, 치워지지 않은 눈도 있었습니다. 여름부터 가동하는 놀이기구들은 쓸쓸한 모습으로 가만히 멈춰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른 하늘과 햇살에 이끌린 연인들이, 또 가족들이 공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금세 사람들의 활기는 차가웠던 공원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습니다. 매력적인 모스크바 강가의 산책로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고, 먹는데 인색한 저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오랜만에 기분을 냈습니다. 뛰어노는 아이들, 사랑에 빠진 연인들. 따스한 햇살만큼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들. 아 이곳에 오길 잘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3월이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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