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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07. 2016

[Cine] 인간실험-원래 이러려던 것은 아닌데

영화 [박쥐] (Thirst, 2009) 

   에밀 졸라라는 이름을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처음 접했다. 유시민은 자신이 기술한 세계사의 출발점을 드레퓌스 사건으로 삼았다. 한 개인(드레퓌스)이 억울하게 스파이로 몰려 마녀사냥을 당할 때, 에밀 졸라는 자신을 겨냥할 비판과 힐난을 감수하고 궁지에 몰린 개인을 구명하기 위해 나섰다. 여론은 에밀 졸라를 매국노, 반동분자로 불렀지만, 오늘날 역사는 그를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유시민이 드레퓌스 사건을 자신의 책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는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에밀 졸라에게서 발견했고, 희망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밀 졸라'가 쓴 작품들과 그가 제창한 사조인 자연주의는 '희망'과 거리가 멀다. 그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를 기반 삼아 이를 확장시켰다. '자연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자연주의'는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외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와 같다. 하지만 졸라는 더 나아가 인물을 소설 속에 밀어 넣고 그 인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관찰하며 실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 밖의 작가와 독자는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자'가 되고, 소설 속 인물과 세계는 우리의 실험용 쥐가 되어야 했다. 졸라는 '물질주의적 인간관'을 신봉했고, 이에 따라 인간을 무기질로 간주하며 인간은 하등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졸라에게 '인간은 추악한 존재'였고, 소설의 평가 기준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잘 드러내는지 여부에 있었다.  


  19세기 말, 과학기술의 질주는 거칠 것이 없었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진보는 인간이 믿어온 '신', '관념', '추상'의 자리를 대체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과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새로움을 쏟아내던 과학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됐다. 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학의 발전이 모든 문제와 궁금증을 이해시켜주리라고 믿었다. 그는 문학이란 인간을 실험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추악한 존재'인 동시에 '개량이 필요한 존재'였다. 과학, 특히 생리학은 인간의 이러한 추악함을 치료하고 개량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이때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가 소설가로서 그의 고민이었고,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후에 생리학이 인간을 치료할 때 문학적 실험은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지금 인간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실험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문학 역시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이에 동참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쉽게 포착될 수 없는 부조리들이 있다. " 내 친구 A는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A가 다른 상황에 놓인다면? 그가 AIDS에 걸린다면?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다면?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노후생활을 즐기다 죽는, '보편적인 삶'. 하지만 인간이 어떠한 상황 속에 던져진다면, 어떠한 다른 얼굴을 갖고 있을까? 졸라는 문학과 문학가의 존재 이유는 이러한 실험을 수행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는 에밀 졸라가 처음으로 자연주의 원칙에 입각해 집필한 작품으로 알려진 <테레즈 라캥>을 바탕에 두고 있다. 흡혈귀가 된 '신부'라는 설정을 비롯해 몇 가지 큰 상징적 설정이 차이를 만들지만, 영화는 <테레즈 라캥>의 서사를 따라가며 졸라가 주창한 실험소설적 요소를 영화라는 매체 위에서 그려 낸다. 선한 성품의 신부 상현(송강호)은 희생을 자원하며 '순교'를 꿈꿨지만 흡혈귀가 되었다. 그는 학대에 시달리고 있는 친구의 부인 태주(김옥빈)를 사랑하게 되고, 욕망에 사로잡혀 친구를 죽이고 만다. 상현은 에로스적 욕망을 주체 못 하고 흡혈 욕망도 견디지 못한다. 그는 태주마저 흡혈귀로 만든다. 생의 욕망을 함께 나누게 된 연인 태주와 상현. 이들의 질주는 거듭된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빠르게 추락한다.  

  

 신부는 성스러운 직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성직자'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흡혈귀가 되었고 흡혈 욕망, 에로스적 욕망의 최전선에서 끝이 없는 타락을 경험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실험 수행자로서 냉정한 시각으로 이들을 관찰한다. 더 이상의 타락이 불가능해진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해를 볼 수 없는 흡혈귀'는 태양과 만난다. 연소한다. 타오르며 재만을 남긴다. 실험용 쥐는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박쥐>의 결말은 씁쓸하다. 자연주의 문학은 인간의 개조를 목적으로 했다. 그래서 인간의 개조 지점을 밝히는 데 관심을 가졌다. 자연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린 <테레즈 라캥>을 원작으로 삼은 <박쥐>의 파국은 필연적이다. 주인공 상현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소설 테레즈 라캥의 주인공들 도마 지막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화 내내 관객들은 내리막만 설계된 롤러코스터에 타고 추락만을 경험했다. <박쥐>는 비관적인 태도를 지닌 영화이다. 

 

   그래도 '스스로'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자살이라는 잔인한 과정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된다. 상현이 '스스로' 택한 '연소'는 추락을 조장하는 운명에 맞서는 의지적인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인간을 살펴보던 실험 수행자 '에밀 졸라'와 '박찬욱'이 장악하지 못한 빈 틈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부딪힌다.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대부분 쉬운 길(타락)을 선택하곤 한다. 

                                

                                '원래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보통 우리는 원래 되고 싶지 않은 인간이 되어 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미숙함, 에밀 졸라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가 되는 요소에 몰두했다. 먼 훗날, 과학기술이 이 나약함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리라 굳건히 믿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빈 틈'을보이면서 인간=추악이라는 명제가 완벽하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어느 순간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 게 만드는 본능적인 발동 때문이다.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에서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이 작은 울림은 '인간은 어쩔 수 없어'라는 비관적인 명제를 선언하는 일을 방해한다. 비관을 이야기하던 자연주의 소설가가 어느 한 순간 더 나은 사회를 갈구하며 행동하는 양심이 되었던 과정은 이 '빈 틈'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결코 실험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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