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랍스터](The Lobster, 2015)
특별한 시간
영화를 보는 경험은 특별하다. 영화를 보는 시간 내내 우리는 극장 밖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것과 같은 경험을 한다. 끊임없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화가 다른 시간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야기의 시간을 늘이거나 압축하여 조정하는 방법이 있다. 과장된 환상이 스크린에 투사되기도 한다. 역으로 집요하게 현실을 파고드는 것도 훌륭한 방식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각각의 행위가 모두 ‘특별한 시간’이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영화예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방식이 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형식
영화 [더 랍스터]는 사랑의 형식에 대해 말한다. 이를 위해 극단적인 알레고리와 상징을 활용한다. 혼자된 인간은 호텔에서 투숙하며 45일 동안 짝을 이루어야만 하고, 짝을 이루지 못할 경우 동물이 된다. 혼자 살고 싶은 사람은 숲 속에서 저항군이 되어야 하며, 저항군은 호텔 사람들의 사냥감이 된다. 영화가 구축한 세계는 사뭇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알레고리(도식)가 두드러지는 것은 영화에서 위험하다. 배우의 연기, 서사, 공간 등 모든 것이 감정적으로 전달되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이해’되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예술’이 갖는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더 랍스터]는 불안요소들 앞에서 타협을 하지 않는다.
[더 랍스터]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불친절했다. 극장 밖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다른 영화들처럼 내레이션이나 자막, 설명적인 시퀀스를 활용하지 않는다. 관객에게는 당황스럽게 여겨질 상황들이 산발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고속촬영 장면이 활용되는 등, 숏 구성은 일관성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하는 음악의 형태나 구성도 기괴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들은 폭발하거나 절규하기보다는 무덤덤한 톤을 유지한다. 영화를 보지 않고 설정에 대한 소개만 들으면, 마치 관객에게 느끼기 전에 산재된 상징과 기호들을 이해하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극단적인 것
그럼에도 [더 랍스터]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영화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사랑은 달콤함, 행복과 같은 말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서사의 측면으로나 형식의 측면으로나 끊임없이 ‘현실적’이라는 명제와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에 녹아있던 그로테스크한 정념이나 과격함은 휘발되어 버린다. 동시에 ‘사랑’이라는 개념 주변의 판타지(환상)를 걷어내며 다른 어떤 텍스트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랑의 속성을 현실적이고 성실하게 그려낸다.
이는 역설적으로 영화를 만든 이(감독)가 ‘완전한 사랑’(유토피아적 사랑)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진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랑 -시간이 지나도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승하는 그런 사랑- 은 본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판타지를 덧씌워 적절한 타협을 하거나, 혹은 사랑을 향해 서둘러 비관과 냉소를 보내곤 한다. [더 랍스터]는 예술의 형식으로 앞선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한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불가능에 끝없이 도전하는 행동은 현실에서는 단순히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예술의 범주 안에서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것(전위)은 불가능한 것에 전부를 거는 행위이다. [더 랍스터]는 치열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극단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완전한 사랑에 도전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는 데 처절하게 실패한다. 다시 말해 [더 랍스터]는 독보적으로 ‘특별한 시간’을 만드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