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저기 나윤이야?"
" 몰라 얼른 집에 가자"
집으로 들어오니 밀린 설거지 거리와 빨래들이 기다리고 있다.
접시와 밥그릇들 하나씩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집어 넣으며 옛날 생각이 났다.
윤정이와 나윤이 그리고 어린 창훈이가 떠오른다.
살면서 친했던 사람들도 멀어지기도 하고 새롭게 가까운 사람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보통 학창 시절의 절친은 그런 저런 이유 없이 평생을 같이 가는 게 다반사인데 윤정이와 내가 멀어진 것은 10여 년 전 그 사건이 이후였다.
둘째를 가질 즈음 고등학교 동창인 윤정은 늦은 결혼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졌었다. 남편은 사업차 중국이나 동남아로 자주 출장을 가는지라 친정엄마도 형제도 없이 달랑 혼자여서 많이 힘들었고 내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후 자주 보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윤이 여자아이를 끝으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서 인지 윤정은 늘 나윤이를 챙기는데 진심이었다.
창훈이가 어릴 때 나윤이와 같은 나이여서 많이 어울리고 우리들끼리도 아이를 핑계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학창 시절이상으로 둘도 없는 단짝이라 생각이 들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 까지도 좀 더 지켜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창훈이를 그냥 일반 초등학교를 보내었다.
마침 나윤이와 같은 반이 되었고 창훈이는 늘 나윤이 옆에 앉았다. 자기가 손을 들어 짝꿍을 하겠노라고 선생님께 자청을 할 정도로 나윤이를 좋아했다.
아마도 익숙한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창훈이는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런 창훈이 게게 나윤이가 옆에 있어 주어서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학교를 들어가고 아마 요맘때 즘이었을 것이다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잠깐 숨을 돌리려는데 운정이에게 서 전화가 왔다.
"혜정아 뭐 해? 잠깐 통화해도 될까?"
"어 그럼 무슨 일 있어?"
"음 부탁 좀 하나 하려고 하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뭐가 그리 거창해 그냥 편하게 얘기해 봐"
"너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혜정아. 우리 나윤이가 사실 오늘도 학교 다녀와서 울면서 들어왔어."
"어머 왜 우리 창훈이가 무슨 실수한 거니?"
"아니 창훈이랑 짝꿍을 하기 싫다고 우는 거야 창훈이를 아이들이 놀리고 왕따를 하는데 짝꿍이라고 자기도 같이 따돌린다고..."
"애가 너무 마음이 여리고 소심해서 자기가 선생님에게 창훈이랑 짝하기 싫다고 얘기를 못하는 거야."
"어 그래...."
"내가 선생님에게 부탁을 드려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모양새가 좀 그렇고 우리 나윤이를 선생님이 좋게 안 보실 걱정도 되구... 그래서 말이야 네가 선생님에게 창훈이는 나윤이랑 짝꿍을 안 하고 싶다고 떼어 달라고 말씀 드려주면 안되겠니?"
혜정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냥 가슴이 미어질 듯하고 무엇인가 걸린 듯 답답해졌다.
" 어 무슨 말인 줄은 알겠어... 그런데 나 조금 많이 섭섭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라는 네가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좀 그래"
"야 그런 게 아니고 그래서 오해하지 말라고 얘기했잖아"
"아니 알아들었어 친구가 마음이 상하든 말든 너는 고상하고 수준 있는 학부모 하시고 좋은 엄마 해 "
"이기적인 년..."
"야 너 지금 말 막하는 거 아냐?"
"알았으니까 끊으라고 더 전화하지 마."
"여보세.."
핸드폰을 내려놓아 버리며 혜정은 참 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 잔인하다. 세상도 사람도 자신에게만 너무 잔인하고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훈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였지만 실상 윤정에게서 듣고 나니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옛 생각을 하던 혜정은 지금은 많이도 무뎌지고 맨지르해진 자신의 마음을 쓸어 보았다.
'좀 더 윤정이를 다독여 볼걸 그랬나 몰라... 아니 쉽지 않겠지.'
그렇게 싸움 같지 않은 싸움으로 윤정을 안 본 게 10여 년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이기에 윤정도 나윤의 엄마이기에 그랬을 것인데, 엄마에게 아이만큼 소중한 것이 그 무엇도 없는 것인데... 다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 벌어진 둘만의 사이는 다시 가까워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일상을 치러 내고 눈앞에 닥친 것들을 헤쳐나가기 바빴다.
4년 전 나윤이가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고 투신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었다.
다행히 아이는 생명을 건졌지만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아이는 모든 사람, 모든 것들, 온 세상이 다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어느 순간 식물처럼 꼼짝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윤정에게 미안하지만 야릇한 쾌감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런 못된 마음이 내게서 슬며시 올라올 때마다 두려움이 커졌다.
나의 죄로 창훈이 게게 안 좋은 일들이 씌워지면 어쩔까 싶었다.
전화를 해 볼까 찾아가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저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