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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간질

스케치

by 승환

곱게 단장하고 가지런한 꽃들이 피는 정원은 없는 대신 온 동네가 꽃밭이었다.

내봄 내봄 없듯이 옆집, 건넛집에 피는 꽃들은 네 꽃 내 꽃 없이 같이 피는 계절이 왔다.

담장 옆에 골목 어귀쯤에 비스듬히 삐뚤 하게 봄 꽃들이 얼굴을 디밀기 시작했다.

개나리꽃 담장에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하더니 염 씨 할머니네 마당에 핀 목련이 하나둘씩 떨어지며 바닥을 구르고 마을 어귀에 벚꽃, 살구꽃, 철쭉들이 하나씩 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봄이 왔다고 따뜻한 봄 볕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골목엔 사람보다 집집마다 개들이 대문을 뛰쳐나와 쏘댕기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질세라 학교를 파하고 오면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신발을 꽤어차고 밖으로 밖으로 나간다.

겨우 내 한 뼘 훌쩍 큰아이도 통통이 살이 올라 빵빵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봄날 오후에 숙제나 공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사내 녀석들은 한쪽이 다 터진 축구공을 들고 공터로 향하고 한적한 골목쟁이에는 계집애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간질간질간질 봄바람이 불어온다 강남 갔던 제비가 노래를 한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래를 한다 간질간질 간질 발가락이 간지러워 병원에 갔더니 무좀이래요 엄마엄마엄마엄마 나는 어떡해 "


짧동한 다리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연신 고무줄놀이에 정신없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리며 봄바람에 멀리멀리 퍼져간다.


"칙폭칙폭 칙칙폭폭 칙폭칙폭 칙칙폭폭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설탕을 싣고서 엄마방에 있는 우리 아기한테 갔다 주러 갑니다"

"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와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사내 녀석들은 공놀이가 시들해졌는지 한 명 슬쩍 계집애들 노는 고무줄놀이를 구경하다가 자기도 해보겠다고 고무줄에 뛰어든다.

계집애들이 빼액 소리를 지르고 머스마 녀석을 밀어낸다.

"니들은 공 차고 놀아 이건 우리들 여자들 하는 놀이야!!!"

사내 녀석은 삐쭉하고 토라져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금 여자애들이 깡총이며 고무줄놀이에 여념이 없다.

"꼬꼬댁 꼭꼭 먼동이 튼다 동철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아까 토라져 갔던 사내 녀석은 음흉스럽게 다시 조용히 와서 구경하는 척하더니 손에 감춘 가위로 고무줄을 끊고 냅다 도망간다.


"야, 뭐야? 거기 안서"

화가 난 계집애들은 도망간 사내 녀석을 쫓아가 기어코 목덜미를 붙잡아 팽게친다.

깡마른 계집애들이라고 너무 얕보았다.

작은 손들이 맵기는 어찌 매운지 몽둥이로 맞은 듯 욱신거린다.

사내 녀석의 등짝이 얼큰해진다.


사내대장부는 울지 않으려 했는데 너무 아프고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콧물이 흐른다.

'이게 아닌데 여자애들이 놀려주면 주저앉아 엉엉 우는 걸 보고 으쓱하려던 건데' 사내 녀석은 계획대로 일이 안되고 자기가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것이 서러웠다.


마실 나온 복실이는 주인이 우는 것을 보고 놀라 뛰어와서 위로한답시고 얼굴을 핤고 난리가 났다.

얼굴이 간질간질거리는데 등짝은 화끈하고 봄볕은 뜨거워 죽겠다.

"야 저리 가 간지러 저리 가라고!"

사내 녀석은 애꿎은 복실이에게 화풀이를 한다.

쪼그려 앉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눈물 속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무리들이 뭉개져 찬란란 봄날이 들어왔다.

바람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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