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기쁨이라던지 희열을 인생에서 몇 번이나 마주할 수 있을까?
행복은 또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머물다 가는 것일까?
행복하다는 감정이나 느낌은 그렇게 오래 머물지 못하고 우리를 지나쳐 버린다.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는 한 번이면 족하듯 인생의 필름 속에서 웃고 행복에 겨운 모습들로 채워질 수는 없다. 오히려 긴 적막이나 역경이 또 슬픔이 길게 들어있다.
정서는 늘 비교대고 상반되어 차라리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이 더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기도 했다.
감정의 흔들림은 너무 주관적이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쉬었으며 휘발성이 강한 행복이라는 고취감은 장마철 햇살처럼, 잠시 스치고 금세 사라지는 법이라 믿었다.
행복해지려고 산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제각각의 행복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똑 부러지게 정의를 하지도 못했고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끝없이 나는 마음속을 헤집어서 정체를 알고 싶기도 했다. 행복이나 만족은 그냥 정서의 고양된 일시적 상태일지,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도 너무도 상대적이고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고 보면 약물에 빠져 도파민이 절어대는 것이 행복이 아닐 텐데.
혹시 행복을 골라내기보단 불행이나 나머지의 감정들을 뽑아서 내버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은 아닐까 생각했고 감정이란 것들을 그저 무시하기만 했다.
오래되고 낡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면 우리 집은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이란 게 기념을 위한 행동이다 보니 우울한 날을 기리면서 서글퍼서 외로워서 인물 사진을 찍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진 한 장 영상 한 꼭지보다 기억이란 건 견고하지 못했다.
세월을 먼저 맞고 귀퉁이 어딘가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한다.
명확한 사실보다는 왜곡되어 버리고 나면 훗날 남는 것은 내가 가졌던 혼란과 인상만이 확대되어서 남겨져 있었다.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고 이해가 없이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행복한 사람들, 행복한 집으로 보기만 했다.
살아오면서 나는 슬픔이나 분노를 또 어떤 날의 외로움들을 누군가에 보여야 하는 것을 꺼려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의 성격은 비슷하게 닮아있고 감정에 인색했다.
누군가 볼까 봐 잘 웃지도 않고 감정을 옷깃에 넣고 감추기 급급하다.
가족들의 인상은 대부분 비슷하다 아니 비슷해진 것이다.
생글거리는 웃음을 띤 이들의 가족사진을 보다 우리 집의 가족사진은 자뭇 엄숙하고 무뚝뚝했다. 입자 욱을 꾹 다물고 먼 허공을 노려보기도 한다. 그날이 생일이었는지 졸업이었는지 아님 집안에 애사가 있는 이들이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우울한 가족사진의 주인공들은 태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환하게 웃고 떠들던 그런 어린 날들이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도 태어나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우리는 누군가에게서부터 배워야 했다. 그것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습자지처럼 조용히 스스로 머금는다.
말을 배우고 단어를 외우고 덧셈 뺄셈을 익혀가듯이 아이들은 모든 것이 학습이 되고 없던 것들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를 자식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생하고 사랑으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다는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폭풍 같은 증오의 감정들이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다시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폭언 힐난이 난무하다가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같이 먹고 어디를 가야 할 때에는 차려입고 외출을 같이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애증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일찍 알아버린 것 같았다.
곧 싸울 것이라 웃을 필요가 없었고 또 무덤덤해지리라 알았기에 서글프거나 울지 않았다.
웃음과 울음은 밖으로 나오는지는 않았지만 반복되었고 일상이 되어버린 감정의 소비는 결국 메마르고 서서히 시들어 갔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가까이 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유유히 흐르는 양평의 강가변에 카페를 가도 창문 안을 고집했다. 예쁜 정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나 꽃들이 피워내는 향기도 나는 저녁이면 날벌레들이 많아서 끔찍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차라리 건물 안에서 보이는 먼 풍경으로 만족하는 게 좋았다.
사람들의 구구절절 사연들이 아프지만 그것이 내 것이 될까 거리를 두었다. 관계의 질퍽거리는 수렁이 싫었고 서로 간에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지는 것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 믿었다.
결혼초에도 나는 아이가 생기면 축복보다 부담스럽고 두렵다는 마음이 컸다.
아이들의 행복과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행복도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받은 상처만큼 아이도 다치고 아플 것이라 두려웠다. 나 스스로도 정형화된 아버지의 모습을 몰랐고 내가 그렇게 될 자신도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없는 나는 남보다 자유롭고 행복했다고 믿었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도 잘 속이는 사람이기에.
나이를 먹고 점점 바라보는 거리는 늘어나고 나는 자꾸 뒷걸음친다는 생각이 들 때 그제야 나는 너무도 멀리 오고야 말았구나 알게 되었다.
뜨거운 태양이 멀리서 작은 별이 되어 보이고 나는 작고 차가워 보이는 그 별이 그렇게 크고 뜨거운 것을 알지 못했고 본질을 알기보다 보이는 그대로 별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이 푸석해지기만 했다. 무미건조하여도 나는 위험하지 않았고 그 정도면 행복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었다.
멀리서만 보려고 애쓰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인생일지 어쩌면 남들과 똑 같이 늙으면서 세상을 반만 산다는 허전함이 들었다. 비 오는 날 비를 맞지 못하고 눈 오는 날 눈을 피해서 사는 인생 같다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스스로 떨치지 못하는 두려움이고 나의 모순이었다
인생이 희극이 되어야 나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입안에서 나오면 거품처럼 꺼져버리는 속성의 물건이었다.
책 속에는 사람들의 글이, 또 나의 주변에 수많은 이야기들은 내 귓가를 간지럽히고 나는 점점 흔들린다. 이제는 고만 멀어지고 가까이 가야 한다는 사실.
살아가는 일은
역경이 되어도, 조금쯤 아파도 괜찮지 않을까.
슬프고, 울만큼 서러워도 그게 인생의 본모습이라면 피할 이유가 있을까?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
아프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살아내야 한다.
우리는,
사는 게 다 그냥이니까.
그냥 태어나고,
그냥 살아가고,
그냥 죽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그냥’이라는 말속에 숨은 용기를 믿으며 살아가야 한다.
조금씩 다가가고, 때론 머뭇거리더라도, 결국엔 가까이에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