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떠나는 사람들

by 승환

떠나는 사람들



한 사람이 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거처 삼은 집은, 살아야 할 때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쓸모없는 감정들을 걷어낸 듯, 검박하고 단정했다. 작고, 옹색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한 사람의 마음을 눅여주었다. 불편함이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편안함이 된다는 것, 그는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실상 나보고 저렇게 살라고 하면 나는 아직, 용기가 없다. 산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고, 막연히 군대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나. 산은 아름답기보다는 가혹하고 불편하고 꾸질한 나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그를 바라본다. 대신 살아주는 삶을 화면 너머로 지켜보고 나의 편안함과 안정감에 마음을 쓸어내린다.

거짓과 과장이 섞인 방송이지만 나는 그것을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설처럼 읽는다. 영화처럼 본다. 사람이 싫다면서 도시가 싫다면서 방송을 하는 그는 진실되지 못하다는 생각, 혹시 그의 출연료가 얼마나 될까 하는 의심들 그런 마음을 담은 채로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도시는,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지닌 것만큼의 소음을 동반한다. 마을도, 거리도, 사람도 어느 순간 나를 흔들어 놓는다. 가장 외로운 순간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라는 걸 나는 도시에서 배웠다.

산속의 사람은 사람을 떠난 후에야 외로움을 잊는다. 고요 속에 사연을 묻고, 반복되는 불편에 익숙해지고, 성공이니 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그저 충실한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별거 아닌 추레한 사람들의 넋두리라 말하면서도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꾸질한 살림살이며 청결하지 않은 식사를 하는 모습들에 살짝 눈살을 지푸리기도 한다. 왕년의 그들은 모두 한가락했었고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사연이 모두 다르면서도 그들은 모두, 같은 리듬으로 말한다.

그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사람들은, 대개 중년의 남자들이다. 나 역시 중년이서일지 어쩐지 모르게 빠져든다. TV가 없어도,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그들을 다시 불러온다. 처갓집에 가서 티브이가 켜있으면 채널을 돌리다가 나오는 그 프로그램을 은근슬쩍 관심 없는 척하며 고정시키다. 어색한 처갓집 식구들 틈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대신, 조용히 그들을 본다.


가끔, 아버지가 생각난다. 술에 취하면 멀리 떠날 거라 말하던 아버지. “같이 갈래?” 혹은 “혼자 갈 테니 찾지 마라.” 모든 것을 다 팔고 훌훌 멀리 떠나자는 그가 떠나고자 했던 곳은 지명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는 떠나지 못했고, 70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다가, 죽음으로 처음 훌훌 멀리 떠났다.

나도 떠나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했고, 결국 되돌아왔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관계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걸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해가 지고 배가 고프면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과 골목이 이어진 작은 세상, 그러나 그 세계는 내 전부였다.

크면서, 도시는 나를 부르고 나는 시내를 거닐며, 넓어진 공간만큼 내가 가진 것이 적고 초라하다는 생각에 좁아진 마음을 견뎌야 했다. 잠시 머문 외지에서 돌아온 후, 집은 더 작고, 더 초라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늘 그곳이었다. 작은 집, 그저 그런 사람들, 가족들, 익숙함은 때로 무력하지만, 익숙함은 나를 안심시킨다.

젊을 땐, 그 익숙함이 싫어서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숙을 하고, 자취를 하고, 군대를 다녀오며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정서의 결이 닮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편안함. 그 안에서 받는 사랑, 그리고 상처. 편안함이 반드시 안락함이 아니듯, 상처도 때로는 그리움으로 변한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사람들도 자신이 겪은 만큼 이해를 하게 된다. 외로움이나 고립감, 무력감들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견디기 힘든 감정들이었음 알았다.

우리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가족일 수도, 직장일 수도, 혹은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너만 힘든 것 아니고 모두 다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야" "버텨야 돼 나약하게 왜 그래" 힘들다는 것은 늘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들의 변명으로 치부된다.

상처는 어디선가 받았고,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였다.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때로는 그것을 되갚으려 독해지기도 하고 관계 속에서 서로 자멸하기도 하고 스스로 무너지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 중 마음이 여린 이들은 그 독을 스스로 마시고 속으로 녹이며 아파한다. 세상살이가 제법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면 그러다 깨닫는다. 상처는 누구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내가 떠나야 하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중년은 떠나고 싶어진다. 인생의 쓰고 떫은맛을 아는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산의 고요와 무심함이 유혹처럼 다가온다.

젊은 자연인은 없다. 젊은 사람들은 도심의 골방으로 숨는다. 세상과 단절하며, 안으로 침잠하며 자신만의 우주를 만든다.

떠나지 않는 은둔자와 떠나버린 은둔자. 그 둘은 닮았다. 한 사람은 산에서, 한 사람은 방 안에서. 두 사람 다, 똑같이 말이 없고 부질없는 욕망과 관계를 무시한다.

산에 사는 사람은 먹고 자고 짓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며 자연의 무언無言을 껴안고 산다. 자연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으며, 그저 존재한다. 그 존재가 위로가 된다.

도시에 남은 은둔자는 움직이지 않음으로 떠난다. 그들은 떠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간 사람들이다.


떠남은 본능이었다. 사람들은 그 옛날부터 빙하기를 넘고, 유목을 하고, 종교를 찾아 행복을 찾아 먼 이국으로 가고, 떠남은 늘 이상향을 품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떠난다. 더 따뜻하거나, 더 아름다운 곳을 믿는다. 떠난 후의 정착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선한 사람들은 싸우고 뺏는 일보다 다른 곳을 찾아 나간다.


도시살이라는 것은 남보다 빨리 더 많이 얻고 가져야 하는 치킨게임과 닮았다. 비싼 아파트와 자동차를 탐하고 나의 필요보다는 내가 꿈꾸는 남들이 보는 나의 멋진 이미지를 위해 살아간다.

그 허상은 실제 하지 않지만 꿈은 집요하고 중독성이 있어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한다. 멋지고 위대하고 그렇게 나를 누군가 바라봐주고 대해주기를 바라며 남들의 눈에 투영되는 허깨비를 자기라 생각한다.

자연인은 허상을 버리고 나니 명품의류도 집도 의미가 없어진다. 흙이 묻고 지저분해도 봐줄 누군가가 없다. 욕망으로 도망치니 더 이상 도시의 룰이란 게 의미가 없어지고 마음이 자유로와 질 것 같다. 잠깐의 자연인이 되기 위하여 차박이며, 캠핑을 하고, 오지의 여행을 하고 사람들은 잠깐의 일탈로 마음을 달랜다.


나는 자연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묻는다. 나는 언제 떠날 수 있을지. 어쩌면 나는 떠나지 못하고, 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

산다는 것은 집착이고, 집착은 소유를 절실하게 만든다. 자유와 욕망을 한 손에 쥐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인가를 버리고도 괜찮다는 마음을 나는 아직 갖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에 비교나 성패를 따지는 따위의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스스로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아끼는 것이 중요하다. 힘들고 아프더라도 끝까지 버틴다는 것보다, 조금은 내려놓아도 마음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것이, 내가 떠나지 못한 채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애틋함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