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욕망

라캉, 전지작업, 그리고 글쓰기

by 승환

글쓰기의 욕망


서울에 얼마 없는 주택이나 아파트가 아닌 집들의 경계는 오밀조밀 붙어서 궁색하기가 그지없다.

지방의 너른 마당이나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 사이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붙어있는 생활이란 게 서로에게 기대는 안온함보다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가 일쑤다.

가을이면 화단의 나무들은 낙엽이 지고 바람이 불어 옆집과 길가에 수북하게 쌓이곤 했다.

옆집의 침범은 부들거리며 못마땅해서 죽을 지경인데 우리 집의 나뭇가지가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는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태연한 나의 마음을 반성하게 되자 봄에는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막상 봄이 되어서 나무를 전지하고 정리하려고 하니 마땅한 장비가 없었다.

전지가위니 톱 하나도 없다 보니 사야 했고 무엇을 살지 어디서 파는지 찾아가기보다는 인터넷을 검색하게 된다.

전동으로 작동하는 작은 체인톱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좀 있는 밀워키 체인톱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가지고 있는 배터리가 호환이 되어서 금액이 절약되는데도 만만치 않다. 좀 더 검색을 하면 예초기부터 높이 있는 곳을 자르는 봉이 연결되고 다른 기능들이 있는 세트가 눈에 들어온다.

백만 원이 넘는 이 세트가 아른거려서 며칠을 고민했다. 일회성의 작업을 위해 이리 큰돈을 들여서 사는 게 맞는 것인지 그래도 두고두고 쓴다면 좋은 것을 사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닌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더 적은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제품들을 보다가 중국제 저가상품까지 비교를 하니 머리가 어지럽다.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옆지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볼멘소리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설득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아는가? 고작이라 생각하는 일, 이 미터 나무를 오르려 사다리가 쓰러져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뿐인가 톱질을 하루 종일 하다가 손에 물집이 잡히고 생나무가 일반나무랑 다르다. 혹시 나무에 톱이 끼면 억지로 빼내다 톱날이 날라 나는 실명을 할 수도 있고 당신은 애꾸눈 남자와 평생 살아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옆지기는 죽으면 따라 죽고 애꾸가 되어도 같이 살아준다는 단호한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나는 목숨을 걸고 작은 톱을 사기는커녕 빌려서 작업을 해야 할 판이었다.


봄이 되고 더는 늦추기 힘들어 어느 쉬는 날을 잡고 아내 없는 날을 택해 전지 작업을 했다.

나의 노력을 조금 과장해서 공치사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아니 이렇게 쉬울 수가….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정도에 나무들을 모두 잘라내고 정리가 되었다. 높은 곳의 가지를 자르려 조금 애를 먹었을 뿐 후다닥 끝난 전지작업에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가진 능력보다 과소평가한 나는 겸손한 사람임이 틀림없었지만 왜 그리 공구에 탐을 내었는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 욕망의 속살은 다분히 소유의 환상이었다.

비싼 차를 사면 하차감이 좋다는 우스갯소리, 액션 가면을 산 아이처럼 우주를 지키는 용사가 되는 그런 기분과도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것은 물건을 가짐으로써 나의 존재가 더 확실해질 것이라는 착각이자, 어쩌면 무기처럼 견고한 ‘나의 장비’를 통해 누군가의 시선에 더 효율적으로 포착되고 싶었던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렇지만 사람들은 점점 소유라는 것에 천착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특성일지 필요 이상의 고가의 장비와 의류를 차려입고 암벽등반이 아닌 트래킹을 한다. 고립되고 위험에 빠지기에 우리의 산은 도시에 붙어있다.

작은 땅과 인구에도 골프산업과 인구는 세계에서 손꼽히지만 정작 국산 골프채의 성능이나 개발보다는 의류 브랜드들만 넘쳐난다.

비싼 자전거, 명품, 스포츠카, 강남의 아파트까지 나의 존재를 비싼 것들만큼 고급스럽고 멋지게 사람들이 바라봐주길 원한다.


"Le désir de l'homme est le désir de l’Autre."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의 욕망을 타인을 통해 구조화된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과 언어, 상징 질서 안에서 욕망하게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무인도에 고립된 혼자 남은 사람에게 패션이나 과시의 욕구가 생길지 모르겠다. 아마도 없을거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소유하는 것으로 스스로 타인과 구별된다고 배우고 느낀다. 나이를 먹고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소유로서의 한계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것이 너무 많이 가져서 소유로서 얻는 욕망이 시들해진 경우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유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부터이다. 욕망은 살아있는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향하는 순간부터 또 다른 욕망의 기저가 발동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확신과 인정을 추구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가진다는 것은 불안을 낳는다"라고 한다.

물건을 갖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즉 삶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은 소유의 방식이 아닌 살아내는 방식이다. 성숙한 사람이란 게 아마도 그 불안의 본질을 캐치하고 벗어나 보려는 것일 거다. 프롬이 말한 ‘존재의 존재 양식’은 어쩌면 미니멀리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직도 소유에 집착을 놓지 못하면서도 마음은 수긍한다. 미니멀한 삶을 살고 싶기도 하지만 마음뿐이고 또 다른 인정과 욕망에 힘들어한다.

왜 하필 나는 글을 쓰려고 할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포기를 하면 편할 텐데 그냥 독자로 읽는 즐거움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왜 쓰는 것인지에 대해 사는 것처럼 그냥이라는 말로 쉽게 자신을 이해시키려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마도 숨겨진 나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단 생각이 떠돌기 때문일 거다.


그저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으로써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도 없고 만족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찾는 일은 지난하다. 수행자와 종교인이 되어도 떨칠 수 없는 고통이었고 그것을 이룬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발로인데도 드러나면 유치해진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말의 속내는 나의 욕망이 너무 크고 허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떨칠 수 없이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인정에 대한 욕망을 꿈꾼다.

성숙이란 말의 겉 포장은 요란하지만 결국 소유에 대한 욕망이 대체되고 말과 상징계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생존하고 번식하고 성장하고, 우리에게 내재하여진 본능일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것이 그럴진대 정신에 대한 것도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고 표현하고 관계 속에서 소통을 꿈꾼다는 것은 정신의 확장이나 일종의 번식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과 이념들, 밈 같은 것들은 실재하지만 실체 하지 않는 것들이다. 인간의 문화나 지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를 이어오게 되었고, 사람들에 대한 인정욕구는 그런 내재한 본능의 발현이라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라캉, 이봐 당신의 말은 그냥 가설일 뿐이군. 나는 좀 다른데. 아니 다르고 싶다고 우기고 싶은데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마음이 씁쓸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셀럽이 되고 트렌드세터 같은 인싸가 되려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나의 욕망이 당신에게 왔듯이 당신에게 나의 상상과 상징을 욕망으로 작용하게 하고 싶다는 발로이다.


정명섭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전업 작가가 꿈이라는 말만큼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없다고. 실상 다가가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지망생들에겐 작품을 남기고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 그것이 인정받고 안 받고는 작가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다. 그 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가치나 인정은 유기적일 뿐이라는 말, 작가가 되는 것, 전업 작가가 되는 것은 목표가 아닌 과정일 뿐이라는 말이 진실되어 보였다.


타인의 인정과 환대가 그리운 것은 모두의 욕망이고 바람이지만 나와 당신이 작가를 꿈꾼다면 그것은 잠시 무시하여도 좋다. 글을 쓴다는 본질은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상기하여야 한다.


나는 미미하고 초라할지라도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일이 결코 부끄럽거나 부질없는 일은 아니다.

내가 아름드리나무가 아니어도, 이름 모를 풀떼기여도 나만의 꽃이 피고 누군가 보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작가라는 타이틀의 소유에서 나 스스로 인정하고 존재를 찾아가는 일, 그것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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